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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68화 (69/763)

< 68화 >

내가 새삼스레 나의 위상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에도 리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정면을 바라보니 황금색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듯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내 입이 열리기 전까지 고개를 들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비록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긴장하고 있지 않을까.

우선 리나의 사과는 받아줄 생각이다. 제국의 황녀가 고개까지 숙이며 사과했는데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과를 받지 않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 꾸물꾸물 기어오르는 이 감정이 그대로 표출될 것 같다. 여태까지 이 감정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 했지만, 리나가 사과함으로서 눈치챌 수 있었다.

권력(權力)

이 세상에 환생하면서 그토록 혐오하던 점이 부당한 권력 구조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내 가슴 속에서 꾸물꾸물 올라오는 중인 이 감정은 권력욕이었다.

전생에서는 그저 글 쓰는 걸 좋아하던 작가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하물며 마족의 공주와 제국의 황녀가 저자세를 취하며 나를 우대하고 있다.

과연 누가 이 욕심에 휘둘리지 않을까. 단언컨데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 본래 권력을 싫어하던 사람도 한 번 맛보게 되면 헤어나올 수 없는 힘이 권력이다.

그러니 여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내딛는다면, 그대로 권력에게 잡아먹히겠지. 하지만 권력은 언제나 사람을 파멸로 이끌게 되는 법이다.

'권력보다는...'

다른 것을 원하고 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내 대답을 기다리는 중인 리나에게 말했다.

"고개를 드세요. 리나 님."

"... ..."

내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자 리나는 아래로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려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사이 온갖 번민을 거쳤는지 아름다웠던 미모가 약간이나마 퇴색될 정도로 표정이 매우 어두웠다.

나는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 뒷목을 매만지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리나 님도 본인의 잘못을 알고 계시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은 없지만... 약간 늦은 감이 있어요."

"... ..."

"만약 사과를 하고 싶으셨다면 지금이 아니라, 저와 누나를 불렀을 때 사과하셨어야 했어요. 그랬다면 리나님의 사과가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게 느껴졌을 겁니다. 정 아니라면 제논 일대기 10권이 발매되자마자 사과하시거나. 사태가 다 터진 뒤에야 사과하시면 아무리 저라도 좋게 볼 수는 없어요."

조곤조곤한 내 말에 리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내가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해하는 모양이다.

나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두 손을 맞잡으며 약간 고민의 시간을 거쳤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으니.

그렇게 약 1분가량 정도가 흘렀을까. 나는 커피잔에 담겨있는 커피에 내 얼굴이 투영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도 사태가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저는 단지 학업을 위해 휴재를 선언했을 뿐이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의 말에서 보셨다시피 저는 제논 일대기를 단순히 취미로 쓰고 있었어요. 어떤 목적이나 사상을 가진 게 아니라."

이건 마리에게도 했던 말이다. 슬쩍 마리를 쳐다보니 그녀는 나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다.

그 얼굴에 하마터면 손이 갈 뻔했지만 분위기상 가까스로 억눌렀다. 싱숭생숭한 이 상황 속에서도 마리에게 손이 갈 뻔하다니 나도 참 중증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리나님과 레오르트님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에 휴재를 결정한 거예요. 저는 제 가족을 정말로 사랑하거든요. 만약 그때 저희 누나가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아예 펜을 놓았을 수도 있었어요."

"아..."

나의 진솔한 이야기에 리나의 반응은 사뭇 볼만했다.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인데 핏기가 가신 탓에 새파랗게 변해버렸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의 잘못과 욕심 탓에 지금보다 더한 사태가 발생할 뻔했으니까.

나는 입술까지 파르르 떠는 그녀를 보면서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리나의 입장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녀는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높은 위치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선민사상 또한 자연스레 깔려있을 것이다.

자신은 만인이 우러러 보는 황제의 딸이며, 그만큼 행동할 수 있는 범위가 남들보다 훨씬 넓다고. 그러니 제논 일대기의 작가에게 압박을 가해도 된다고.

나는 전생의 기억이 있기에 권위와 동떨어진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지, 리나는 아니다. 리나는 옛날부터 교육을 그렇게 받았을테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크다.

"음... 말이 좀 길어졌는데 저는 일단 사과를 받아줄 거예요. 리나님이 직접 사과하시는 걸 보면 사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이야기고, 저에게도 좋은 건 없으니까요. 특히 여론을 보니까 미네르바 제국을 향한 비난이 많더라고요. 맞죠?"

"맞아요. 그리고..."

"그 전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어쩌면 부탁일지도 모르겠네요."

리나가 미처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내가 싹뚝 잘라버렸다. 무례하다 못해 개념을 밥 말아먹은 행동이겠지만 주도권은 아직 나에게 있다.

리나도 그 점에 대해서 알고 있어서 아무런 말조차 못 한 채 입을 다물었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어두운 표정을 보면 일단 참는 모습이다.

"마리에게도 말했지만 저는 제논 일대기를 그저 취미로 쓰고 있어요. 아버지에게 경험담을 듣고, 그 경험담을 토대로 제가 원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는거죠. 아실지 모르겠지만 취미가 일이 되는 순간 정말로 하기 싫어져요. 그러니까 부디 간섭만큼은 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지난 번처럼 사람 마음대로 불러놓고 압박을 한 것처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나는 리나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숙이려 하자 급히 멈춰 세웠다. 황녀나 되는 사람이 두 번 씩이나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다. 내가 불편하기도 하고.

"두 번씩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한 번이면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말도 그냥 놓으세요. 그리고 제가 하고싶은 제안이 뭐냐면..."

내가 말을 흐리면서 눈치를 보자 리나가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앉은 마리는 과연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된다는 얼굴이다.

나는 정말로 이런 제안을 해도 될지 몰라 살짝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은 계급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에 따른 확고한 권위가 있다.

그러니 내가 앞으로 꺼낼 이 제안은 리나의 권위를 해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마음 속의 욕망이 작게 속삭였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는 것이 힘들다면, 반 정도만 내딛으면 되지 않냐고. 그것도 아니면 내딛자마자 바로 떼면 되지 않냐고.

그래서 리나에게 제안했다.

"제가 말을 놓을 수 있게 해주세요."

"...네?"

나는 리나가 이해하지 못 했다는 표정을 짓자 다시 한 번 더 알려줬다.

"제가 부를 때 리나님이 아니라, 리나라고 부르게 해주세요."

권력이 아니라 평등.

내 성격이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누군가를 하대하는 것보다 차라리 동등한 입장으로 대하는 것이 편하다. 반대로 누군가 나를 권력으로 대놓고 찍어누르는 걸 매우 싫어한다.

조별과제 당시의 아이라와 달리 리나는 대놓고 누르지 않아서 참을만했지만 상황이 급격히 반전되었다.

사태가 발발하자 그녀 쪽에서 먼저 잘못 인지했으며 고개까지 숙이는 입장이다. 엄연히 내가 갑이 되었다는 소리다.

허나 나는 불편한 관계가 싫다. 마리처럼 서로가 서로를 편하게 대하는 편이 나에게 훨씬 좋다.

누군가는 왜 그런 짓을 하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데, 사실 내가 꺼낸 제안도 상당히 위험한 것이다. 리나의 권위를 해칠 수도 있을 뿐더러 그녀가 기분 나빠할 수도 있었으니.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었다지만 그녀가 앙심을 품는다면 훗날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말을 놓는 걸로 타협을 본 것이다.

"... ..."

예상 밖의 제안이라서 그럴까. 리나는 내 제안을 듣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다. 그러면서 내 옆에 앉아있는 마리와 시선을 마주쳤다.

나 또한 자연스레 마리 쪽으로 향했는데, 그녀는 시큰둥한 얼굴이다. 왠지 모르지만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내 제안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그래도 불평을 하지 않는 걸 보니 나를 존중해주는 건 확실했다.

"...그것 뿐이에요?"

잠깐의 침묵 이후로 리나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나에게 물었다. 정말이냐는 표정을 보아 쉬이 납득이 가질 않는 듯했다.

이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했다. 아, 물론 여기서 한 마디 꺼내는 건 잊지 않았다.

"그리고 리나님도 존댓말을 하지 말고 말 놓으세요. 불편하니까요."

"그... 알겠어. 정말 그거 하나 뿐이야?"

"네."

"왜? 나와 말을 놓는 것이 너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거 참 말이 많으시네.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뉘앙스로 말하는 리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포커 페이스가 와르르 무너진 채 해답을 요구하는 얼굴이다. 이에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득이야 많죠. 제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 ..."

"다시 말하지만 저는 제논 일대기를 특정 목적을 두고 쓰는 게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취미에 불과하죠. 그러니 원하는 것도 딱히 없고 그저 독자들이 즐거워하면 그만이에요."

내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것일까.

"...이해할 수 없어."

리나는 어딘가 황망해진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

"그래서 받아줄 거예요, 말 거예요?"

그 날, 나는 황녀와 평등한 입장이 되었다.

"흥."

내 귀여운 여자친구는 불만인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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