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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67화 (68/763)

< 67화 >

어째서 리나가 시간을 내달라는 건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분명 제논 일대기를 휴재하면서 몰아치기 시작한 폭풍을 잠재우기 위해서겠지.

헌데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봐야할 것이, 리나는 대변인을 통해 나를 부르지 않고 직접 찾아왔다. 지난 번에는 우연히 만났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따로 사람을 시켜 나를 불렀을 수도 있다.

즉, 리나가 재빨리 나를 찾아와 해결해야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의미. 신문에서도 그렇고 주변에서 들리는 말로는 제국 곳곳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중이라 들었다.

하기야 제국으로서는 당장 옆나라이자 라이벌인 테르스 왕국에서 '제이로스 혁명' 같은 대사건이 발생했으니 쉬이 넘길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유들로 인해 황녀인 리나가 저자세를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너는 꼭 있어야겠니?"

"네가 아이작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참고로 나와 리나만 있는 게 아니라 마리까지 합세했다. 위의 말처럼 마리는 리나가 나에게 이상한 말이라도 할까봐 걱정되어 따라왔다.

나야 뭐, 상관없는 일이지만 리나는 아니다. 리나로서는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오고 가야하는데 마리가 고집을 부리니 다소 짜증날 수밖에.

물론 마리가 내 비밀을 모르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다. 마리도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는지 리나를 힐긋 쳐다봤다.

리나는 특유의 포커 페이스가 완전히 부서지고 눈쌀을 찌푸린 채 쌀쌀맞은 표정이었다. 그에 마리는 같잖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더니 한 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나도 아이작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걸? 설마 너만 알고 있다 생각한 건 아니겠지?"

"뭐? 그게 무슨 소리..."

마리의 대답에 리나는 순간적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어서 마리와 번갈아보더니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납득했다는 반응이다. 그녀는 앞을 쳐다보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런 사이니 비밀 같은 건 알려줄 수도 있겠지."

"응. 맞아. 누구처럼 압박해서 비밀을 억지로 실토하게 만들지도 않았고."

"난 압박한 게 아니...!"

마리의 빈정거림에 울컥했는지 리나가 버럭 소리치려다가 간신히 억눌렀다. 그러면서 나를 힐끔 쳐다봤다.

아무래도 본인도 찔렸던 모양이다. 실제로 계급 차이에서 발생하는 간격은 실로 막대하며, 그것이 지도자 계층이라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더구나 리나는 어릴 때부터 정치계에 입문했을테니 그 사실을 모를리가 없다. 실제로 그 간격을 이용하여 나와 니콜을 압박하고, 조별과제 당시 잭슨을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머리가 비어있거나 정말로 바보 멍청이가 아닌 이상 리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본인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압박감을 줄 수 있다고.

그리고 리나는 내가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휴재를 결정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진짜 이유는 학업과 더불어 재충전을 위한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휴재를 결정한 거지만.

하지만 압박감이라는 이유도 없지 않아 있다. 만약 리나와 레오르트가 압박하지 않았더라면 이대로 쭈욱 집필했을 수도 있다.

"...우선 카페부터 가자. 되도록 빨리 해결했으면 하니까."

리나는 벌써부터 피곤해진 듯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재촉했다. 마리도 더이상 놀리지 않기로 결정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벌써부터 개판으로 가버릴 듯한 분위기 속에서 리나의 눈치를 보다가 마리와 눈을 마주쳤다. 마리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베시시 웃더니 슬며시 팔짱을 꼈다.

그러면서 은글슬쩍 자신의 가슴 쪽으로 잡아당겼는데, 나는 교복 너머 가슴 특유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져도 미소만 지었다.

이런 애정 행각은 이미 많이 했던지라 얼굴이 살짝 붉어질언정 더이상 부끄럽지는 않았다.

"...좋아보이네."

리나는 자기가 있어도 애정 행각을 펼치는 우리 둘을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에 나는 약간 민망한 웃음을 흘렸지만 마리는 이거 보라는 듯이 팔짱을 더 강하게 끼면서 입을 열었다.

"부럽지? 부럽지? 부럽다고 해도 아이작은 절대 안 넘겨줄 거야."

"나도 남의 남자친구를 뺏는 취미는 없어."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못 믿겠네."

역시나 리나를 강하게 불신하는 중인 마리다. 리나는 그저 쓴웃음만 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 했다.

이럴 때 보면 항상 드는 생각이 있다. 과연 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관계가 형성되었을까.

성격이 좋은 마리가 저리 불신할 정도면 리나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 확실하다. 물론 둘 사이에 오해가 있을 수도 있으니 훗날 입장을 들어보는 게 좋을 듯했다.

"그런데 레오르트 님도 있는거야? 아이작이랑 아이작 누나를 불렀을 때 레오르트 님도 있었다며."

"...오라버니는 현재 긴급 회의 때문에 황궁으로 돌아갔어. 아마 지금쯤 많이 혼나고 있을거야."

"황제 폐하에게?"

마리의 질문에 리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걸 듣고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황태자를 불러 문책할 정도면 사안이 심각하긴 심각한 모양이다. 아마 나중에 레오르트도 나와 니콜에게 사과를 하지 않을까싶다.

'잠깐만. 그러고보니 니콜은 안 부르나?'

사과를 하려면 니콜까지 불러야 정상이다. 하지만 리나는 나만 따로 부른 상황이다. 그 점은 약간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앞장 서서 걸어가는 리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리나도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뒤로 돌아 나와 눈을 마주쳤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니? 시선이 다 느껴지네."

"저희 누나는 안 부르나 싶어서요."

"니콜 씨는 오라버니가 만날거야."

아무래도 레오르트가 황궁으로 돌아가서 그런 모양이다. 납득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과는 한다니 일단 넘어갈 수는 있다.

이후로 리나가 데려간 카페에 도착하고, 방음과 보안이 확실한 방까지 잡았다. 카페는 지난 번 세실리와 독대했을 때 왔던 곳과 같은 장소다.

하마터면 세실리와 거하게 사고를 칠 뻔했던 곳이라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내 옆에 마리가 앉아있고 맞은편에는 리나가 앉아있다는 걸까.

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직원이 문을 열었다. 주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미리 음료를 준비한 모습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제가 부르기 전까지 찾아오지 마세요. 알겠죠?"

"알겠습니다."

보아하니 미리 예약을 한 듯한 모습이다. 리나는 내가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걸 미리 예상했던 모양이다.

물론 거절했더라도 리나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자그마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녀인데 일개 카페 따위가 감히 이의를 낼 수는 없을테니.

나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바라보더가 리나의 얼굴을 바라봤다. 리나는 마셔도 된다는 듯이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마셔도 돼. 이상한 건 타지 않았으니까 괜한 오해는 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나는 왜 안 줘?"

내 옆에 앉은 마리가 투덜거렸다. 실제로 마리의 앞에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아마 리나는 나만 부를 생각이었을테니 마리의 것은 미리 예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이작만 부를 계획이었거든. 네가 멋대로 난입한거고."

"아. 그러셔? 그래도 다행이네. 네가 허튼 짓을 하는 걸 막을 수 있으니까."

"마리.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영악하지 않아. 그때는 정말 어쩔 수 없던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너는 그러지 말았어야지. 그때..."

트라우마라도 자극되었는지 마리의 감정이 점점 고양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마리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질 기미가 보이자 그녀의 손을 말없이 잡아줬다.

마리는 내가 손을 잡아주자 몸을 크게 흠칫 떨더니 나를 바라봤다. 뒤이어 내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화가 가라앉았는지 콧김을 길게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

"...그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일단 알겠어."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아이작."

"네. 리나님."

나는 리나의 부름에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대답했다. 리나는 긴장 때문에 굳어진 얼굴로 나를 마주하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름에 잠겨있는 그녀의 모습이 썩 불쌍했지만 미안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이 잘못한 건 맞으니까.

이어서 리나는 내 얼굴과 똑바로 마주하더니 이윽고 결의를 다진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며 곧 큰 게 오겠구나 싶어 잠자코 기다렸다.

"...일단 이것부터 말할게. 우리 오라버니는 네 아버지, 그러니까 호크 경이 제논 일대기의 저자로 추측하고 있는 중이지. 하지만 나는 달라. 호크 경은 단순히 본인의 경험담을 알려주고, 진짜 작가는 너라고 생각하고 있어. 맞아?"

"네."

"역시... 그렇구나."

부정할 생각은 티클만큼도 없었기에 담담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리나는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연이어 말을 걸었다.

"그러면... 제논 일대기를 휴재한 것도 우리 때문이야?"

"... ..."

"고의가 아니었다는 변명은 하지 않을게. 나도 내 존재 자체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큰 압박이 될 수 있다는 건 분명히 알고 있거든. 그 상황 속에서 너에게 큰 압박이 되었겠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리나가 본론을 꺼내기 전까지는 입을 꾹 다물 생각이다.

"그래서 말인데..."

잠깐 말을 흐리던 그녀는 내 눈치를 보다가 자신감을 잃은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우리 때문에... 휴재를 결정한 거야?"

"... ..."

"정말로 우리가 너를 압박한 탓에 심적으로 괴로웠는지 묻고 싶어."

애처롭게도 들릴법한 그녀의 물음에 속으로 골똘히 생각했다. 아까 전에도 말했지만 휴재를 결정한 이유는 학업과 재충전을 위해서다.

하지만 리나와 레오르트가 압박을 가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겠지. 근본적인 원인이 이 둘에게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함이 감도는 리나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네요."

"... ..."

애매한 내 대답에 리나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 해 입술을 앙 다물었다. 보아하니 스스로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 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나는 입술을 앙 다문 리나에 의외라고 생각하다가 뒷목을 매만졌다. 지금은 내 마음을 진솔하게 꺼내야 할 듯했다.

"제가 휴재를 결정하게 된 이유는 아카데미 생활과 재충전, 그러니까 설정 정립을 위해서에요.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주위에서 보내는 압박감이 컸죠. 만약 두 분께서 부르지 않았더라면 휴재를 안 했을 거예요."

"... ..."

"미리 말하는데 저는 휴재를 번복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이미 한 번 결정을 내린 건 철회하지 않는 성격이거든요."

내가 딱 잘라 말하자 리나가 더욱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지금 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테이블 밑으로 감춘 두 손도 불안감에 꼼지락거리고 있지 않을까.

"...알았어."

한동안 고민하던 리나는 결의를 다진 표정을 짓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 옆에 앉은 마리는 신경쓰지도 않는 모습이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리나가 고개를 천천히 숙이며 나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황금을 실로 짠 듯한 머리카락이 서서히 내려앉으며 테이블 위에 살포시 얹어졌다.

나는 그녀의 사과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턱을 서서히 젖혀올렸다. 예상은 했다지만 자그마치 황제의 딸인 황녀가, 나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있다.

세실리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처럼, 가슴 속에서 이상한 감정이 다시 한 번 꾸물꾸물 기어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저희 때문에 작가님이 심적으로 괴로우셨다면, 다시 한 번 사죄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

"휴재를 번복해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현 사태를 보면 아시다시피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진압이 어려울 정도로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리나가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꺼낸 부탁을 듣고 한 가지 깨달을 수 있었다.

'...유명세라는 게 참 무섭구나."

정말로 내가 전세계 끼치는 영향력이 막강한 수준을 한참 웃돈 수준이라고.

'휴재도 함부로 못 하겠네.'

앞으로 휴재도 마음대로 못 할 것 같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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