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제논 일대기가 국가를 가리지 않고 이 시대의 진정한 걸작으로 추앙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고 있으나 제논 일대기는 계급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구분없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지도 않았고, 빙빙 돌려서 말하지도 않는다.
간결하게, 하지만 명확하게 하나의 이야기를 책에 담아내어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그 상상력을 통해 또 하나의 세계를 머릿속에 펼쳐줬다.
이 특징 하나만으로도 제논 일대기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기 위한 조건이 충족된다. 여기에 더해서 흥미진진한 스토리까지 있으니 인기가 하늘을 찌를듯이 상승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심지어 제논 일대기를 읽기 위해 문맹이었던 사람들도 글을 배울 정도였으니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제논 일대기를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거나 문장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파악하여 스스로 깨닫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렇듯 인기가 하늘을 찌를듯이 높아진다면 자연스레 부작용도 있는 법.
제논 일대기를 제외한 다른 책이 거의 팔리지 않는 건 둘째치고, 책 속의 주인공이 되겠다며 설치다가 피를 본 경우가 부지기수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이 세상은 그런 경험을 겪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애초에 남녀노소, 계급, 종족 전부를 가리지 않고 유행을 탄 '문화'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 문화를 즐기기에 바빴지 부작용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지만, 제논 일대기 10권이 세상에 등장하고나서 숨어있던 문제가 터져나왔다.
"빨리 문 열어! 너희들은 출판사잖아! 제논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있을 거잖아!"
"적어도 상황만이라도 알려주세요! 지난 번에 건강이 우려된다고 하셨잖아요!"
"갑자기 왜 휴재를 한다는 거야?! 심적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말은 또 뭐고? 당장 나와서 해명해!"
제논 일대기와 판권 계약은 것으로 유명한 출판사 입구 앞.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중이다.
평범해 보이는 자유민부터 시작해서 잔뼈가 굵은 것 같은 모험가, 이밖에도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까지.
이처럼 공통점없이 다양각색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물며 선동을 하는 사람조차 없는데 시위를 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아, 물론 공통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들 모두 제논 일대기라면 열광해 마지않는 속칭 '팬'들이었으며 제논 일대기 10권을 읽고 이리 몰려든 것이다.
"저희도 모른다고요! 저희는 단지 원고를 받고 책을 찍어내는 일만 하고 있어요!"
"그래요! 이렇게 소리를 질러봤자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시위대를 힘겹게 막고 있는 직원들은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그들로서는 다소 억울한 것이, 본인들도 작가가 장기 휴재를 선언한 이유를 자세히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제논 일대기 10권이 나오고 이틀이 지나자 해일처럼 몰려든 인파를 막기에 급급했다. 다행히 시위대가 과격하게 나오지 않아 당장은 막을 수 있다는 걸까.
하지만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자극되었다간 정말로 출판사가 점령당할지도 모른다. 그전에 어떻게든 진화 작업을 해야되는데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든 좀 해봐!'
시위대를 막고 있는 직원은 본인의 회사를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면서 소리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그렇다면 현재 출판사 내의 상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어떻게 안 되겠소? 당신은 분명 작가, 그러니까 제논과 연결고리가 있을 거잖소."
"부디 이 편지만이라도 보내주시오. 심적으로 고생하신다 하시니 내가 책임질 수 있소."
전국에서 몰려든 귀족들을 상대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사장은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에게 애걸복걸하는 귀족들을 허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예상은 했다지만 직접 맞닥뜨리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진풍경도 이런 진풍경이 없을 것이다.
자신은 단지 제논 일대기와 계약을 맺은 이후부터 어마어마한 수익을 벌어들인 졸부에 불과하다. 눈 앞의 귀족들처럼 권력이 강하다거나 절차 따위는 싸그리 씹어버릴 힘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한 명도 아니고 우르르 몰려들어 사장실을 점령하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나도 모른다고. 이 새끼들아.'
사장은 자신의 눈 앞에서 시위를 펼치는 귀족들을 보며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귀족도 지금 출판사 입구를 점령한 시위대와 별 반 다를 게 없다.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제논 일대기의 작가를 걱정하는 마음은 같았다.
몇몇 못 돼 먹은 귀족들처럼 작가를 찾기 위해 안달이 난 부류가 아닌, 진정으로 제논 일대기 그 자체를 좋아하는 팬이다.
그걸 반증하는 것처럼 현재 사장실에 모든 귀족들은 대부분 백작 이하다. 후작부터는 공무에 치여살다보니 출판사 같은 곳에 찾아올 여유가 되지 않는다.
설령 여유가 되더라도 자기들끼리 회의에 들어가지, 출판사 같은 곳에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저... 여러분? 죄송하지만 아무리 따지셔도 저도 잘 모릅니다. 작가님이 어떤 이유로 휴재를 한 건지..."
"그러니까 저희가 부탁하는 거잖아요! 작가님이 어떤 이유로 힘드신 건지, 그리고 어째서 2년 가까이 휴재를 한다는 건지 알아주시라고요!"
사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귀부인 한 명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꾸하면서 무산되었다.
사장은 귀부인의 날이 선 목소리에 움찔거렸다가 소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여러분이 계속 이러신다면 작가님께서도 불편해하실 겁니다."
"그런 말이 지금 우리에게 통할 것 같나요? 우리가 원하는 건 작가님의 자세한 사정이지, 당신의 같잖은 추측이 아니에요. 우리를 납득시킬만한 이유를 설명하기 전까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겠어요."
"제발 편지라도 보내주시오. 작가님이 누구인지 몰라도 상관없소.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걱정되서 이러는 것이오. 최근 건강에도 문제가 있다 하셨잖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사장은 귀부인 다음으로 애처로운 귀족의 부탁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옴을 느꼈다.
'편지가 오고 가는데 하루 이틀인 줄 알고 있나?'
이미 편지를 보낸지 오래다. 비록 회의를 하느라 지난 번 팬레터를 보낼 때 같이 보내지는 못 했지만 지금쯤이면 저택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러니 대략 사흘 정도만 진득하게 참으면 답장이 돌아올 터. 사장은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틸 생각이었다.
물론, 사흘이라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제논(필명)이 호크라는 전제 하에 잡은 것이다. 실제로 답장이 돌아오기까지 며칠이 걸릴 것이라는 건 사장은 전혀 예측하지 못 하고 있다.
"안 되겠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직접...!"
"그렇게 되면 제논 님을 괴롭히던 사람들과 다를 게 뭐요? 지금 바깥의 시위대가 내는 목소리를 듣지 못 했소?"
"그게 우리가 한 건 아니잖아요! 왜 우리가 피해를 봐야하는 건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당장 지금도 불이 붙기 직전인데 거기에다가 마나석이라도 투여할 생각이오? 아주 시원하게 타오르겠군. 제이로스 혁명 같은 사태가 전세계적으로 발생하는 꼴을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시오."
잘 싸운다, 잘 싸워.
사장은 결국 본인들끼리 언쟁을 벌이기 시작한 귀족들의 모습을 보며 해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말마따나 지금 이 현상은 이들보다 더 윗쪽에게 불안한 징조로 보일 것이다. 심지어 제이로스 혁명 당시에 있었던 징조보다 더욱 과격했다.
만약 여기서 누군가 선동을 하거나 잘못된 소문이라도 퍼지게 된다?
제 2의 혁명이 발생할 건 불 보듯이 뻔한 일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진화 작업을 해야하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도 아니다. 당장 땀과 눈물로 성장해낸 회사가 불타고 있는데 어떻게 구경을 할 수 있겠나.
'루미너스시여...'
사장은 속으로 신을 찾아 기도했다.
*****
시위는 제논 일대기와 계약한 출판사 앞에서만 이루어진 건 아니다. 제논 일대기가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친만큼 곳곳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광장에서 팻말을 들며 열심히 목소리를 높이는 시위대는 물론이고, 심지어 국가의 주요 시설 앞에서 시위를 펼치는 전대미문의 일까지 발발했다.
이들 모두 제논 일대기의 작가가 어떤 상황인지 알려달라며 제대로 된 해명을 촉구했고, 신문에 봤던 것처럼 정말로 몇몇 귀족이 귀찮게 굴어 이런 참사가 발생한 거냐며 항의했다.
제이로스 혁명처럼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없었지만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각 나라마다 높으신 분들은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골머리를 앓았지만 이내 한 묘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제논 일대기의 저자, 즉 제논은 없다. 애시당초 출판사도 미네르바 제국에 있다.]
[목소리를 높이는 시위대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에게 따져봤자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도 제논의 장기 휴재 소식에 당황스러우며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제논이 심적으로 힘들었다면 분명 국가 차원의 압박이 있었을 것. 문화라면 죽고 못 사는 나라라면 두 곳밖에 없다.]
그건 바로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에게 책임을 돌려버린 것이다.
실제로 두 나라는 문화라면 눈에 불을 켜도 달려드는 것으로 유명하며, 문화 전쟁 직전까지 갈 뻔한 전적도 있다.
여기에 더해서 미네르바 제국은 테르스 왕국의 문화를 침탈하는 것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이때문에 테르스 왕국에서 엄격한 규율을 새로 지정한 건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사실.
출판사는 미네르바 제국에 있고, 미네르바 제국은 문화라면 남의 것을 빼앗을만큼 탐욕스럽다.
위의 두 가지 가설이 딱딱 맞아떨어져서 비난의 화살이 모두 미네르바 제국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선동에 불과했지만 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려도 거센 화염으로 변질된만큼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테르스 왕국은 제이로스 혁명 같은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 전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런 사건까지 겪었는데 제논 일대기 저자를 압박한다는 미친짓은 저지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제국에도 제이로스 혁명 같은 사건이 벌어지면 어떡하지? 괜찮을까?"
"지금 바깥에 나가면 난리도 아니야. 황궁 앞에서 시위를 펼치는 시민들도 등장하기 시작했어."
"어떡해..."
그런 불안감은 수도에 위치한 헤일로 아카데미에도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강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미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강의실 내부를 둘러봤다.
제논 일대기 10권이 출간된지 겨우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후폭풍이 실로 무시무시했다. 신문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펼쳐졌다는 기사가 실렸으며, 경비대로는 막지 못해 군대까지 동원했다는 말이 나왔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많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단지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 휴재 공지를 올렸을 뿐인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 시작했으니까.
심적으로 힘들다는 말은 진실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압박을 받고 있다는 걸로 왜곡되었다. 문제는 이것도 마냥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까.
일단 출판사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과연 진화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이상하게 흘러가는 사태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쯤, 내 옆에 앉은 마리가 시시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기분이 어때?"
"뭐가?"
"제국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몸소 느끼고 있잖아."
나는 마리의 질문을 듣고 무어라 대답할지 곤란하여 머리를 긁적였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겪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강의실 내부가 술렁이는 모습을 보자니 실감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 학생조차 불안한 기운을 감지할 정도이니 바깥 상황은 난리도 아닐 터. 나는 콧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마리를 슬쩍 바라봤다.
그녀는 아무런 걱정도 되지 않는지 특유의 방실거리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마리는 황제 다음 가는 권력을 지닌 레킬리스 가문 출신이다.
그러니 분명 마리의 가문에도 영향이 갔을 것이다. 걱정될 수밖에 없다.
"너는 걱정도 안 돼?"
"조금은? 그래도 머지않아 진정될 거야. 이건 확신할 수 있어."
자신만만한 대답에 절로 의문이 나온다. 내가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갸우뚱하자 마리가 피식거렸다.
뒤이어 그녀는 뒷쪽을 힐긋 바라보더니 나에게 손짓했다. 귀를 빌려달라는 듯한 제스쳐에 얼굴을 천천히 갖다 대었다.
"후우~"
"으핫!"
귓속을 파고드는 바람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팔딱거렸다. 내가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펄떡 뛰자 마리는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흘렸다.
"히히. 좋았어?"
"아, 진짜... 이런 장난 좀 하지 마."
"미안. 미안. 그리고 옆을 한 번 볼래?"
"또 뭐..."
또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지만 그녀의 말에 따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한 사람의 모습에 눈을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내려오고,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와 청초한 인상의 미녀가 내 옆에 서 있었다.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 리나였다.
나는 어째서 리나가 내 옆에 서있는지 의아한 것도 잠시, 리나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언제나 평온했던 얼굴이 아니라 수심에 잠겨있는 얼굴이다.
"...아이작."
"어... 네."
내 이름을 부른 그녀는 마리를 한 번 쳐다봤다. 그 시선에 마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마음대로 하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마리에게 허락도 받았겠다, 리나는 어딘가 결의를 다진 표정을 짓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그 부탁에 어안이 벙벙해졌을 때였다. 옆에 있던 마리가 빈정거리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게 부탁할 사람의 태도니?"
"... ..."
"정중하게 부탁해야지. 정.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끊어서 말하는 마리가 짜증났던 걸까. 리나가 약간 표독스러워진 얼굴로 마리를 쏘아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는 콧방귀를 뀌며 잔뜩 여유를 부렸다. 어디 한 번 해볼테면 해보라는 표정이다.
하지만 리나는 이렇게 소모전을 펼쳐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를 바라보며 부탁의 말을 꺼냈다.
"...부탁할게."
목소리에는 힘이 상당히 빠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