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65화 (66/763)

< 65화 >

[제논 일대기 10권. 발매까지 앞으로 하루.]

출판사에서 제논 일대기의 발매일을 잡았다는 소식이 신문에 실렸다. 그것 외에는 이렇다 할 소식은 없었다.

아무래도 출판사는 제논 일대기가 발매되는 날에 내가 휴재를 할 거라는 소식을 알려줄 생각인 것 같다. 나야 상관없는 문제다.

사람은 모든 일을 끝낸다면 한결 여유로워지기 마련. 시험도 끝났겠다 하루하루 기쁜 마음으로 강의를 듣거나 그 후에는 마리와 단란한 데이트를 즐겼다.

뭐, 그렇다고 흥청망청 노는 건 아니다. 방학이 되기 전까지 약 한 달 정도가 남았고 그 안에 기말고사가 남아있다.

다행히 조별 과제는 별로 없는데다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나는 장학금을 딸 생각은 추호도 없고 유급만 면하면 그만이니.

무엇보다 헤일로 아카데미는 3학년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점수를 아슬아슬하게 못 채워도 특정 교수에게 이쁨을 받는다면 올라갈 수 있다.

"너는 1학년이 끝나자마자 나한테 찾아와. 내가 추천서 써줄게."

예를 들어 나를 마음에 쏙 들어하고 있는 엘레나 교수님처럼.

늘 그렇듯이 연구실에서 신디에게 작문법을 가르치다가 잠깐 쉬는 중에 엘레나가 저리 말했다.

이에 나는 신디가 직접 우려준 차를 홀짝이다가 눈을 깜빡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추천서요?"

"응. 추천서."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교수가 직접 손으로 쓰는 추천서의 가치는 실로 막강하다.

약간 과장을 보태서 2학년까지 성적을 개판으로 쳐도 3학년으로 진학할 수 있다.

단, 여기서 조건이 하나 있는데 추천서를 써준 교수가 담당하는 전공이어야만 하고 그 전공 하나만큼은 성적이 좋아야한다.

하지만 추천서는 교수가 직접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기에 절대 남용할 수 없다. 말 그대로 교수가 판단하기에 인재 중의 인재를 골라야 하는 것이다.

엘레나 교수도 위의 이유로 나에게 저런 말을 꺼냈을 가능성이 높다. 나에게는 조금 당황스러운 이야기다.

"저 아직 방학도 안 한 신입생인데요? 너무 급하신 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겠지. 그런데 최근들어 너처럼 역사에 열정적인 학생이 드물었거든. 참고로 인간 기준이 아니라 내 기준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엘프인 엘레나 교수가 저렇게 말하니까 무게감이 확 달라졌다. 도대체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 얼마나 적다는 거야.

아무튼 간에 엘레나 교수가 나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평소 역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기쁜 일이다.

이미 확고한 길을 잡은 상황에서 다른 전공을 공부하려니 죽을 맛이었는데 짐을 살짝 덜어낼 수 있게 되었다.

"저야 좋죠. 다른 전공도 아니고 역사인데."

"그거 다행이네. 참고로 내가 쓴 추천서는 꽤 다를거야. 내 동행 하에 알븐하임으로 데려갈 수 있거든."

"알븐하임이요?"

나는 엘레나 교수가 꺼낸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븐하임은 전에 말했듯이 엘프들의 국가이며, 최초의 문명이 세워진 곳이다.

수도, '위그드라실'에는 성지(聖地)인 세계수가 존재하고 있으며 최초의 문명이 세워진만큼 살아있는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응. 네가 알고 있는 알븐하임이 맞아. 네가 원한다면 방학 기간에 방문할 수도 있어."

"알븐하임은 입국 절차가 엄청 힘들지 않아요?"

알븐하임은 종족전쟁 이후 국교를 개방했지만 여전히 까다로운 출입 절차를 자랑한다.

오죽하면 일반인이 한 번 방문하려면 국가 차원에서 직접 인증까지 해야할 정도.

엘프 입장에서는 문명도 모자라 하나부터 열까지 모방하려는 인간을 좋게 볼 수 없으니 당연한 입장이다. 하물며 종족전쟁에서도 인간과 혈전을 치뤘으니 더더욱.

엘레나 교수는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처럼 신디가 우려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맞아. 네 말대로 인간이 알븐하임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귀찮은 절차가 필요하지. 하지만 나와 동행하면 이야기가 달라져. 우리 엘프는 자기가 인정한 사람에 한해서 자비롭거든. 본인이 인정할만큼 상대방이 고귀하다는 의미로서 자격을 부여하는거야."

"그거 좀..."

"그래. 실로 엘프다운 마인드지. 종족전쟁에서 된통 당했는데 여전하단 말이야."

본인이 엘프인데도 엘프를 신랄하게 까내리는 엘레나 교수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쓴웃음을 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튼, 내 추천서를 받게 되면 알븐하임에 방문할 수 있다는 것만 알아둬. 나중에 데려갈 생각이니까."

"전 그렇게 대단한 학생은 아닙니다만..."

"그래.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네가 대단한 학생은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역사를 향한 사랑은 진심이잖아? 그리고 생각도 깊고 말이야.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지?"

역사학 시험에서 내가 적었던 답안지를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낸 엘레나 교수. 나는 안경 너머로 빛나는 연두빛 눈동자와 마주했다.

전생에서 널리 퍼져있던 명언을 그대로 베껴적은 거라 양심이 찔리긴 했지만, 이런 말을 해봤자 큰 의미는 없을거다. 이때는 침묵만이 답이다.

엘레나 교수는 내 침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걸 보고 꽤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 실제로 네가 적은 답안처럼 역사가 반복된 적은 수도 없이 많아. 그러면 역사는 어째서 반복되는 걸까?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해?"

"글쎄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역사를 보면 항상 비슷한 패턴이 나와서요. 예를 들어 전쟁이 발발한 과정을 살펴보면 놀랍도록 비슷해요. 나라끼리 갈등을 벌이고, 그걸 해소하다가 이도저도 안 되면 전쟁으로 귀결되기 마련이죠."

실제로 역사적으로 나라 사이의 전쟁을 보자면 이유가 비슷한 경우가 많다. 세세히 파고들자면 여러가지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다.

누군가의 욕심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명분을 갖다 붙일 수 있고, 전국민이 분노할 대사건을 일으켜 전쟁이 발발될 수도 있다.

이처럼 전쟁은 쉽게 결정할 수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사회문명이 발달한 전생에서도 과거에는 툭 하면 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전쟁이라 해서 무력만 사용하는 건 아니에요. 미네르바 제국과 테이로스 왕국 사이에 발발한 문화 공방도 일종의 전쟁이라 볼 수 있죠. 그게 심화되면 무력으로 변질되는 거고."

"흠. 확실히 일리가 있네. 종족전쟁도 종족 간의 문화 차이에서 발생한 전쟁이었으니까."

엘레나 교수는 내 설명에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종족전쟁이 발발한 이유에는 여러가지 굵직한 사건들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문화 차이 때문에 발생했다.

엘프는 힘도 없으면서 욕심만 많은 인간을 탐탁치 않아했고, 인간은 겉으로 고결한 척 하지만 자신들을 깔보는 엘프의 면모를 싫어했으니까.

이런 이념 차이가 점점 크기를 부풀리다가 종족전쟁이 터져버렸다. 그 후로 각 측마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나서 전쟁이 끝났으나 후유증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그럼 네가 생각하기에 현재로서 발발하기 쉬운 전쟁은 뭐라고 생각하니?"

"음..."

나는 엘레나 교수의 질문에 시선을 위로 두며 곰곰이 생각했다. 현재 이 세상에는 다양한 나라가 존재하고 각각 고유의 문화와 특성이 있다.

이때문에 여러모로 갈등을 벌이고 있지만 상당히 평화로운 편이다. 이렇다 할 문제점도 없을 뿐더러 건덕지를 잡을만한 부분도 없다.

굳이 있다하면 미네르바 제국과 테이로스 왕국, 이 두 나라일까. 이 둘은 최근까지도 문화 때문에 서로 언쟁을 주고 받았다.

물론 이것 때문에 전쟁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본격적으로 문화를 침탈할 거면 별의별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만들테니까.

"저는 잘 모르겠네요. 엘레나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 있긴 있어. 이걸 전쟁이라 쳐야할지 모르겠지만, 그 중심에는 제논 일대기가 있겠지."

"네?"

전쟁 이야기를 하는데 왜 뜬금없이 제논 일대기가 언급되는 걸까.

내가 속으로 황당해하던 말던 엘레나 교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진지한 표정을 보아 진심인 듯했다.

"너도 알겠지만 제논 일대기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종족을 가리지 않고 전세계적으로 상한가를 달리고 있어. 여기서 문제는 특정 나라에서만 인기가 있다면 모를까, 국가를 가리지 않는다는 게 제일 큰 문제지."

"겨우 책 하나 때문에 전쟁이 발생한다고요?"

나도 내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다. 주위에서 그렇게 알려줬는데 모르면 이상하지.

하지만 전쟁은 조금 심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책이 아니라 책을 쓴 사람, 그러니까 작가를 말하는 거야. 지금 제논 일대기와 판권 계약을 맺은 출판사가 미네르바 제국에 있다지만 완전히 종속된 건 아니거든. 제논 일대기가 미네르바 제국 밖으로 유통이 되어도 관세를 매길 수가 없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하. 만약 작가가 특정 나라에 종속된다면, 경우에 따라 그 나라가 제논 일대기에 관세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말인가요?"

전쟁 중에서도 무력만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경제적으로 막심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게 무역 전쟁이다.

겨우 책 따위에 관세를 매기는 건 조금 웃기는 상황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국가가 나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정 물품에 관세를 매긴다는 건 경우에 따라서 아예 유통을 못 시키게 막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불 보듯 뻔하다.

"그렇지. 관세를 매기는 순간 그 나라는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게 될 거야. 외교에서의 이점은 말할 것도 없겠지."

"음..."

"개당 3실버도 안 되는 물품에도 관세를 매기는 걸 생각해보렴. 관세라는 게 좀 복잡한 거야."

솔직히 쉽게 와닿지 않는다.

마리에게도 들었지만 내 가치는 제국조차 쉽게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실제로 미네르바 제국과 테이로스 왕국이 물밑에서 암투를 벌이는 중이라고 들었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제논 일대기가 상업적으로도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이는 건 사실이지만 수출품 중 일부에 지나지 않을테니까. 더구나 작가가 지금처럼 정체를 숨긴다면 아무런 일도 없을거고."

"... ..."

"너도 알겠지만 전쟁은 별의별 괴상한 이유 때문에 발생해. 서로 힘이 비슷하면 그 경우가 더 심해질거야."

하기야 전생에서는 축구 하나 때문에 전쟁이 발생한 적도 있었으며 반대로 축구 하나 덕분에 전쟁이 멈춘 경우도 있다.

크트디부아르가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을 당시, 드록바가 카메라 앞에서 무릎을 꿇어 전쟁을 멈춰달라 호소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나라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내전이 멈췄다. 축구선수조차 그정도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나라고 못 할 건 없다.

만약 정말로 전쟁이 발발한다면, 너무 불안해서 글을 못 쓰겠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무역 전쟁 정도라면 가만히 지켜보고 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할 시에만 그렇게 호소할 거다.

아니면 전쟁 관련 소설을 발간해서 전쟁의 참사를 알려줄 수도 있고. 내 인지도가 전세계급인 이상 나라 간의 사소한 다툼은 해소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휴재는 할 거야.'

나도 좀 쉬어야지. 겸사겸사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그렇게 마음편히 하루가 지났을 쯤이었다.

[제논 일대기 10권 드디어 등장. 그런데...]

[충격! 제논 일대기 최소 1년 반 동안 휴재! 경악을 금치 못하는 팬들.]

[현재 출판사 앞에 몰려들기 시작한 인파... 다급히 해명 촉구.]

[작가의 말에 적힌 의미심장한 글귀. 작가 '제논'에게 무슨 일이? 혹시 귀족의 소행인 것인가?]

고작 이틀도 지나지 않아 매서운 폭풍이 세상에 들이닥쳤다.

"와우."

이건 좀 예상을 벗어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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