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제논 일대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가장 수혜를 입은 집단은 누구일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마족'을 선택할 것이다.
단순히 책 하나로 인해 종족 전체의 명운이 뒤바뀌었으며 마족이 본격적으로 활동하자 세계의 정세마저도 요동쳤다. 그동안 마족은 반강제적으로 폐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가 태동하기 시작했으니 다른 나라에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
마족은 개개인의 무력이 강할 뿐더러 엘프와 견줄만큼 마법 능력이 특출나니까. 대신 그 마법이라는 것이 '검은 마나'라는 불길한 기운으로 펼치는 것이라 엘프들은 마족과 엮이는 걸 매우 싫어하고 있다.
어쨋거나 마족은 제논 일대기를 통해 큰 수혜를 입은 건 사실이다. 지나가던 사람 중 한 명에게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이 나올 정도로 상식으로 변하는 중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깊게 파고들면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논 일대기를 통해 마족의 인식이 바뀐 건 맞지만, 근본적으로 제논 일대기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다시 말해 제논 일대기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한만큼, 그 수익은 하늘을 뚫을 정도로 무시무시하다는 의미다.
다만 제논 일대기는 전세계에 퍼져나가 유행을 하고 있는 탓에 제대로 된 집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논 일대기의 수익보다는 책 자체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그다지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수익은 제논 일대기와 판권 계약을 한 출판사에 고스란히 영향을 가게 되기 마련. 실제로 제논 일대기를 처음으로 발간한 출판사는 홍수처럼 범람한 수익을 통해 덩치를 부풀렸다.
"흠흠~ 흠흠흠~"
사무실과 흡사하면서도 다양한 사치품이 가득 채워져 있는 어느 방.
책상에 앉은 중년의 남자가 콧노래를 부르며 노트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현재 기분이 매우 좋은 것인지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비싼값을 지불하면서 기술을 도입하길 잘했어. 벌써 전부 다 갚았구만.'
현재 그가 펜촉으로 쓰고 있는 노트의 정체는 장부다. 그것도 단순한 장부가 아니라 남자가 관리하고 있는 상회와 큰 연관이 있는 장부.
평범한 장부였다면 남자가 아니라 다른 직원이 관리하고 있겠지만, 높은 직급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관리하고 있는만큼 장부의 용도는 특별했다.
귀족들이 선물해준 자금, 그러니까 흔히 뇌물이라 불릴 수도 있는 자금을 관리하고 있는 장부다. 평범한 상회였다면 모를까, 귀족에게 뇌물을 받는만큼 남자가 관리하는 회사는 매우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관리하고 있는 회사는 바로 출판사, 그것도 제논 일대기는 맨 처음으로 발간한 출판사였으니까.
귀족에게 뇌물을 받는 이유도 신권이 발간되면 자기한테 먼저 달라고 부탁하거나, 아니면 저자가 누구인지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한 것이다.
'황금 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수는 없지.'
의외로 남자는 제논 일대기의 정체를 알고 있다. 정확히는 아이작이 아니라 호크로 착각하는 중이다.
1권의 원고를 본인이 직접 들고 출판사로 찾아왔으니 그리 착각할만도 하다. 하지만 제논 일대기가 예상을 한참 웃돈 히트를 처버리자 신분을 숨기고 심부름꾼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 별의 별 사람들이 출판사로 찾아와 저자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으며, 개중에는 협박까지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출판사 사장 입장으로서 상당히 곤란하기 짝이 없었으나 용기를 내 모두 씹어버렸다.
귀족들이 주는 뇌물이나 협박보다 제논 일대기가 벌어들이는 수익이 더욱 탐났으니까. 제논 일대기와 계약이 묶여있는 이상 돈이 복사되는 중이라 해도 무방하다.
'황실은 조금 무섭긴 했다만...'
물론 황실에서 직접 행차한 건 출판사 사장이어도 상당히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건진 건 없고 출판사에서 탈세를 했는지 조사한 것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장부를 꼼꼼하게 관리한 덕에 탈세도 걸린 적은 없다. 솔직히 제논 일대기가 너무 많은 수익을 벌어들이는 탓에 탈세를 해도 전혀 모를 것이다.
이러한 상황 끝에 사장의 기분은 하늘을 찌를 듯이 좋아졌다. 최근 비싼 투자를 하면서 신기술을 도입한 대가도 치루는 중이다.
'원금은 갚았고, 이제 유지비만 손 보면 돼. 어차피 시간이 갈 수록 유지비도 천천히 낮아질테고.'
신기술의 도입으로 인해 수익률이 2배로 상승했다. 본래 출판사는 책과 계약만 하면 그만이지만 사장은 아예 인쇄소를 인수해버렸다.
그 결과 귀족조차 화들짝 놀랄 정도의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그러한 자금으로 다시 투자하니 회사의 규모도 상당히 커졌다.
사장으로서는 하루하루 바쁜 나날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만큼 행복했다.
똑- 똑- 똑-
이제 슬슬 장부를 다 쓸 때 쯤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사장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장부를 책상 서랍에다가 넣은 후 입을 열었다.
"누군가?"
"사장님. 저 매튜입니다."
"오. 매튜! 어서 들어오게."
사장은 문을 노크한 사람이 매튜라는 걸 알자마자 화색을 띄며 들어오라고 명했다. 다른 직원이라면 모를까, 매튜는 평소 자신이 아끼는 비서인데다가 늘 좋은 소식을 갖고 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논 일대기라던지, 제논 일대기라던지, 제논 일대기라던지.
매튜는 사장이 신뢰하고 있는만큼 제논 일대기의 편집 담당까지 맡는 중이다.
끼익-
사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매튜는 슬며시 문을 열었다. 갈색 곱슬머리에 흐리멍텅한 눈동자, 그리고 안경까지.
전체적으로 하루하루 피곤에 쩔어사는 듯한 직장인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소식을 가져왔나? 슬슬 제논 일대기의 원고가 올 시기이긴하다만."
사장은 매튜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소를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기대감에 두 손을 맞잡은 건 덤이다.
매튜는 사장의 질문을 듣고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의 품 안에는 웬 우편 봉투가 고이 안겨져 있었다.
"우선 세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 평범한 소식, 나쁜 소식. 뭐부터 알려드릴까요?"
매튜는 사장의 질문에 피곤에 쩔어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항상 저런 식으로 보고를 하는 편이다.
사장은 세 가지 소식 중에 나쁜 소식이 있다고하자 의문어린 표정을 지은 반면, 일단 보고부터 듣기로 정했다.
"평범한 소식부터 듣도록 하지."
"심부름꾼에게 전달받은 이야기입니다. 출판사로 온 팬레터를 전달해줄 수 있냐고 묻더군요."
"팬레터? 아, 편지 말인가?"
"네. 허구한 날 우리 회사에 쌓이는 편지요."
제논 일대기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만큼 열광하는 팬들도 엄청 많다. 심지어 그 팬들도 다양했는데 평민은 기본이고 고위급 귀족까지 있다.
더 나아가 마족이나 드워프, 심지어 간간이 엘프나 수인들이 보내는 편지도 있었다. 그 편지에 무슨 내용이 담겨있는지는 모르지만 국가와 종족 가리지 않고 인지도가 넓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사정상 작가에게 직접 보내지는 못 하고 출판사에게 보내는 중이다. 출판사조차 작가와 소통을 주고받기 힘들어 하염없이 쌓아두고만 있는 상황이었는데 때마침 잘 되었다.
"당연히 되지. 그런데 전달은 어떻게 하나?"
"심부름꾼을 시켜서 보내달라고 합니다. 적당한 값을 치를테니 보안에 신경써달라고 하더군요."
"알겠네. 마침 저걸 어떻게 처분해야하나 싶었거든."
사장이 엄지손가락으로 뒷쪽을 가리키자 자연스레 매튜의 시선도 따라갔다. 사장이 가르킨 곳에는 네모반듯한 상자가 놓여있었는데 그 상자에 팬레터가 가득 담겨있다.
상자의 크기도 만만치 않았는데 팬레터로 가득 채워진 걸 보면 얼마나 많은 양이 담겨있는지 유추할 수 있다.
"그럼 좋은 소식을 알려줄 수 있겠나?"
"좋은 소식은 제논 일대기 10권의 원고가 이제 막 도착했다는 겁니다."
정말 좋은 소식이다. 사장은 당장이라도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제논 일대기는 새로운 책이 나왔다 하면 돈이 쏟아지는 수준이었으니 기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방심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나쁜 소식이 하나 있었으니까.
사장은 입꼬리를 쭈욱 말아올리며 매튜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나쁜 소식은?"
"이걸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원고가 든 우편물인데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매튜가 원고를 전달하자 사장은 의문을 가지면서도 아무런 의심없이 받았다. 이어서 이미 개봉된 우편 안에서 원고를 꺼내 매튜가 말한대로 마지막 페이지로 넘겼다.
마지막 페이지는 평소 작가가 적지 않았던 '작가의 말'이 실려있었다. 사장은 세상과 소통하려는 건가 싶어 놀라는 것도 잠시, 작가의 말을 읽고나서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이게 정말로...?"
사장은 행복했던 마음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끼며 매튜와 원고를 번갈아봤다. 떨리는 목소리와 두려움에 빠져있는 듯한 표정이 압권이다.
"후우... 보시는대로입니다."
이에 매튜는 생기없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고 착잡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본인도 믿을 수 없다는 뉘앙스로 입을 열었다.
"1년 반에서 2년 동안 휴재를 한답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사장은 한동안 혼이 나간 것처럼 우두커니 앉아있다가 다급히 고개를 세차게 털었다. 그동안 회사를 운영하면서 위기를 맞은 적이 한 번도 없던 건 아니다.
더군다나 이럴 때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사장인 자신이다. 이에 사장은 작가의 말에서 놓친 게 있는지 파악했다.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제논 일대기의 저자인 '제논'이라고 합니다. '제논'은 제 임시적인 필명이니 굳이 찾으려 할 필요는 없어요. 아무튼 제가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겉보기에는 평범한 인사말이다. 인사말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제논 일대기를 사랑해줘서 놀랍다니, 정말 감사하다니 등등. 본인의 심정을 드러내는 말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중간에 나타났다.
[제논 일대기는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시는 책이지만 그에 비례해 제 어깨에는 부담이라는 짐이 얹어졌습니다. 저는 단순히 취미로 쓰는 글이었는데 몸과 마음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어요. 저는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휴식을 결정했습니다.]
상당히 공손한 내용이지만 저자의 상황과 비교하자면 이야기가 다르다. 현재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찾기 위해 다양한 곳에서 추적하는 중이다.
그것이 귀족이든, 아니면 황실이든, 아니면 다른 종족이든. 모두 저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독자들의 눈에는 이렇게 보일 것이다.
[너네들이 나를 귀찮게 굴어서 당분간 쉴 거다. 쉬고 나서도 또 찾는다면 책 안 낼 거임.]
독자들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지는 걸 넘어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난의 화살이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이 뻔하다. 당연하게도 세상이 한동안 뒤숭숭해지겠지.
물론 아이작 입장에서는 학업에 집중하고 싶어서 이렇게 적은거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자를 현자로 추측하는 중이다. 한 술 더 떠서 지난 번에는 코피를 흘렸다고 건강을 우려하는 소식까지 신문에 실렸다.
이렇다보니 정말로 저자가 위험한 건 아닐까? 라는 불안감을 독자들에게 심어줄 가능성이 높다. 제논 일대기를 영영 못 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 ..."
사장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작가의 말을 재차 완독했다. 그리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빨리 소집해."
"네?"
"긴급회의 할테니까 당장 직원들을 소집하라고! 어서!"
"네, 네! 알겠습니다!"
매튜가 반문하자 사장은 전에 없던 노호성을 터뜨렸다. 이윽고 매튜가 문 밖으로 줄행랑을 치자 사장은 씩씩거린 것도 잠시, 곧바로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염병할 귀족 새끼들... 하여간 도움되는 건 돈밖에 없는 새끼들..."
사장과 더불어 출판사가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우리 아이작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히히힝."
"좋아?"
"응! 응!"
"그냥 껴안고 있는데도?"
"응!"
세상이 어떻게 돌아길지 전혀 상상조차 못 한 채 마리랑 행복한 데이트를 즐기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