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마리와 알콩달콩한 연애를 시작한지 어언 2주일 가량이 흘렀다. 2주일이는 시간이 흐른만큼 많은 것들이 변화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건 학생들이 나와 마리를 보는 시선이다.
그전까지는 긴가민가했다면 이제는 확신에 찬 눈초리다. 나와 마리가 사귀고 있구나라고. 공공연한 비밀도 아니라 이제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럽다는 눈길을 보냈지만 개중에는 불편한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특히 그 시선은 나보다 마리에게 집중되었는데 아무래도 마리는 레킬리스 공작가 출신이고 나는 일개 남작가의 아들이다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물론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저들이 뭐라 하던 간에 서로 좋아 죽는데다가 내가 마리에게 꿇릴 것도 없다. 오히려 마리는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다만 부작용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가끔씩 여학생들이 마리에게 찾아가 나에 대한 걸 묻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짜증나 죽겠어! 대체 어디가 좋아서 사귀는 거라니, 혹시 약점 잡힌 게 없냐니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냥 잘생기고 귀여워서 사귀는 건데!"
"응? 마리?"
나는 마지막 말에 식사를 하다 말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마리를 쳐다봤다. 전부 상관없는데 뒷말이 왠지 거슬렸다.
한편 음식을 입에 담은 채 불만을 토로하던 마리는 내 부름을 듣고 아차하더니 베시시 웃었다. 소녀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라기보다는 능청스러움에 가깝다.
"앗. 미안. 나도 모르게 본심이 나와버렸네. 헤헷."
"... ..."
"꿀꺽.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거짓말은 아니잖아?"
내가 황당해하던 말던 마리는 입 안에 든 음식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진심인 듯한 그녀의 표정에 차마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수치사를 하고도 남을 법한 발언이었지만, 다행히 우리 둘만 단란히 식사를 하고 있다는 점이 위안이다. 참고로 지난 번 마리에게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와 같은 식당이다.
알고보니 우리가 직원에게 배정받았던 공간은 연인 전용 코스였다. 그걸 듣고나서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그 말은 즉슨, 지난 번에도 우리를 연인으로 착각하고 이 방으로 분류했다는 의미니까.
그때 당시는 아무것도 몰라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초장부터 어색했을 것이다. 물론 공식적으로 연인이 되고나서는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다.
"아이작은 나처럼 짜증나는 일은 없었어? 나는 공작가 영애라서 망정이지, 너는 나보다 더 심할 수도 있잖아. 특히 잭슨인가 뭔가 하는 놈이 너를 싫어하는 거 같은데?"
"음..."
나는 마리의 질문을 듣고 최근 있었던 일에 대해 떠올렸다. 마리와 연인이 되고나서 이렇다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제일 가까운 지인들인 리나와 세실리도 대놓고 묻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의 사이를 확신하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인지 마리가 내 곁을 떡하니 지키고 있는 이상 함부로 다가올 입장이 못 됐다.
특히 리나는 몰라도 세실리와 함께 있는 빈도가 꽤 많이 줄어들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마리가 짜잔! 하고 나타나서 나를 데려가버린다.
어제도 그랬다. 어제 마지막 강의는 원래 마리가 듣지 않는 강의였지만 수업이 끝나자마자 문 밖에서 기다리던 마리와 마주쳤다. 그리고 내 팔을 붙잡더니 같이 밥 먹자며 질질 끌고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걸 본 세실리가 팔을 뻗어 우리를 불렀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마리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은... 그래. 분명 질투에 휩싸인 여인의 눈빛이었다.
그것 외에는...
"딱히 없는데?"
"정말로?"
"응. 네 말한 잭슨도 뭐라고 하지는 않았어. 대신 뭐랄까... 측은지심?"
"엥? 측은지심?"
나는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시켜줬다. 거짓말이 아니라 요즘 잭슨이 나를 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이전까지는 흔히 벌레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면 지금은 위로를 해준다고 할까. 도대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조별과제 이후부터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확연히 변했다.
"응. 대신 시선 자체는 조별과제 이후부터 변했어. 도대체 조별과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 조금... 불쌍했지? 리나가 이것저것 다 시켰거든."
"너는?"
"난 미안해서라도 도와주긴 했는데...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내가 한소리하기 전까지 그 새끼가 계속 치근덕거렸잖아? 도와주긴해도 거기까지였어."
권위높은 백작가 아들을 '그 새끼'라 칭하는 우리 여친님이다.
나는 새삼스레 그녀가 황제 다음으로 권위가 드높은 공작가 출신이라는 걸 실감했다.
"앗. 방금 전에 들은 건 못 들은 척 해줘. 갑자기 짜증나는 기억이 떠올라서 그만."
그러다 마리는 손을 내저으며 조신한 말투로 나에게 부탁했다. 방금 전까지 털털했던 면모와 전혀 다른 행동이요, 말투다.
이에 나는 피식거릴 수밖에 없었다. 일부로 저러는 게 확실하다.
"그거 내숭떠는 거지?"
"안 어울려?"
"귀엽긴 해도 안 어울려."
"나쁜 놈. 그래도 귀엽다니까 봐줄게."
마리는 키득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나 또한 빙긋 웃어주는 걸로 화답해줬다.
이렇듯 마리와 단 둘이 있다면 시시한 이야기조차 즐겁게 느껴진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한다는 시간 자체가 더욱 중요했다.
"아. 그러고보니 글은 어디까지 썼어? 저번에 거의 다 썼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 원고만 제출하면 그만이야. 시험이 끝나서인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써지더라고."
"제논의 스승과 엘프 여왕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했지?"
이미 마리에게도 제논 일대기 10권의 대한 스토리는 조금이나마 알려준 참이다.
물론, 스승과 엘프 여왕의 비극적인 서사는 알려주지 않았다. 참고로 그 이야기는 10권에 나오지 않고 빠르면 11권, 늦어도 13권에 나올 예정이다.
그때까지 스승과 엘프 여왕과의 관계는 직간접적으로 묘사하면서 독자들의 마음을 애태울 생각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스승이 데드 플래그를 똭! 하고 꽂아넣는거다.
예를 들어 '내가 돌아온다면...' 이라던지 '돌아오면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라던지 등등. 이 말을 통해 독자들의 마음 속에 불길함이라는 감정이 싹 틔울 것이며 훗날 그 불길함은 적중한다.
하필이면 오랜 시간 고뇌에 고뇌를 거쳤던 엘프 여왕도 마음을 다잡았던지라 그 애틋함과 비통함은 배가 될 것이다.
물론 슬픈 일만 발생하는 건 아니다. 그걸 지켜본 제논도 스승의 슬픔에 한층 더 성장하게 되며 메리와의 관계도 한층 더 진척되는 결과를 맞이한다.
지난 번 모임에서 에딘이 예측했던 것처럼, 메리의 정체는 엘프이며 인간인 제논에게 마음이 있다. 허나 본인이 엘프인 탓에 마음을 표현하고 못 하는 중이다.
'어쩌다 보니 로맨스 파트가 되버리겠네. 뭐, 상관없지.'
로맨스 파트라면 여성 독자들이 꽤 많이 좋아할 것이다. 거기다 사람들이 잘 다루지 않았던 엘프와 인간의 사랑이었으니 더욱 자극적일터.
엘프 쪽에서 말이 나와도 상관없다. 칠죄종 중 교만을 담당하는 악마측 간부가 엘프라는 설정을 추가했는데도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신디가 내부적으로 회의를 하고 있을거라고 했으나 그닥 신경쓰이진 않았다.
"엘프와 인간의 사랑이라. 솔직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제논 일대기니까 괜찮겠지. 이번에는 엘프 쪽에서 반응하는 거 아니야?"
"글쎄. 그건 모르겠지. 그리고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데, 진이랑 릴리의 예시를 보면 돼. 수명 차이를 극복한 케이스잖아."
"어? 듣고보니 그렇네? 진이 마족이라 이때까지 못 알아차렸구나."
실제로 사람들은 진이 마족이라는 사실 자체에 집중하고 있지, 인간보다 오래 사는 종족이라는 건 인지하지 못 하고 있다. 중간중간 수명에 관한 것도 진이 언급하긴했어도 독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지나쳤다.
하지만 엘프의 경우는 사람들 머릿속에 장수하는 종족이라는 인식이 꽉 박혀있다. 그와 반대로 인간은 수인과 더불어 수명이 짧다는 인식이 꽉 박혀있는 상태다.
"게다가 엘프는 마족보다 오래 사는데다가 고귀하고 오만한 종족이라고 알려져 있어. 신디한테 들으니 엘프 사이에는 다른 종족을 경시하는 풍습이 있다더라고."
"신디? 그 사람은 누구야?"
"응?"
"설마 여자야?"
마리가 눈초리를 매섭게 뜨며 노려보자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오는 게 상당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저번에 엘레나 교수님이 나 보고 말했잖아. 잠깐 연구실에 올 수 있냐고. 그때 가서 만난 엘프야."
"그것 뿐이지?"
"그럼 여기서 더 있을까봐? 넌 모르겠지만 신디를 본다면 그 생각이 송두리째 바뀔 걸?"
신디는 태생적으로 아름답긴 해도 진하게 내려온 다크서클과 관리는 하나도 하지 않은 외모로 인해 전혀 끌리지 않았다. 심지어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어린애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
그녀에게 수많은 지식을 받았지만 그것 뿐이지, 이성적인 호감은 전무한 수준이다. 그냥 동료다.
다만 마리는 여전히 믿지 못 하는 얼굴이다. 보아하니 신디가 엘프라서 약간 불안해하는 것 같은데, 적어도 내 눈에는 신디보다 마리가 훨씬 예쁘다.
"그리고 네가 훨씬 더 예뻐."
"읏..."
그래서 그 생각을 고스란히 꺼냈다. 그러자 마리의 얼굴이 삽시간에 노을처럼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재미가 없겠지. 나는 역공의 기회를 잡자마자 능글거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러고보니 너네 부모님의 얼굴도 궁금해지네. 어떻게 하면 엘프보다 더 예쁜 얼굴을 물려줄 수 있을..."
"그, 그만! 그만해! 더 말하지 마! 부끄러워 죽겠네, 진짜!"
내가 능청스럽게 굴자 마리가 빼액! 소리 질렀다. 그녀의 격한 반응에 낄낄거리는 웃음이 자동적으로 나왔다.
"왜 그렇게 싫어해? 엘프보다 예쁘다는 건 칭찬아닌가?"
"그, 그래도... 부끄럽단 말이야..."
"예쁜 건 맞잖아."
"하으으... 하지 마아아..."
마리는 연이은 공격에 버터내지 못 했는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나는 그녀가 이마를 테이블 위에 박자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뭐라고 말할까? 공주님?"
"... ..."
"우리 공주님. 거기 누워서 뭐 하세요? 식사는 안 하시고."
내가 하도 놀려대서 그럴까.
"아앙!"
"악! 미안! 미안! 다시는 안 그럴게! 미안!"
마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목을 꽉 깨물었다. 미안하다고 소리 질러도 앙심을 제대로 품었는지 한동안 놓지를 않았다.
"아이작."
"네?"
"목에 그거 뭐야? 맹수한테 물리기라도 했어?"
"... ..."
결국 다음 날, 내 옆자리에 앉은 세실리가 그리 물을 정도다. 하필이면 교복 와이셔츠로도 가려지지 않은 부위라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머쓱하게 웃으며 목을 쓰다듬었다. 지금은 마리가 없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세실리가 옆에 앉은 걸 보고 또다시 깨물었을지도 모른다.
"맹수는 아닌데, 그냥 강아지한테 물린거예요."
"강아지한테 물린 것치고는 치아 자국이 선명한데? 그거 마리가 문 거지?"
"...네."
"음... 그러고보니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어. 얼굴 뜯어먹고 산다고. 혹시 인간들은 가끔씩 애인의 살점을 뜯어먹는..."
"아뇨. 그건 절대 아니에요."
그랬으면 내가 진작에 마리의 얼굴을 뜯어먹고도 남았겠지. 세실리는 내 거센 부정에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너그럽게 넘어갔다.
"알았어. 난 또. 아이작이 잡아먹힐까봐 걱정했지."
"하하하... 마리가 자주 물기는 하죠."
"행복해?"
세실리는 노트를 정리하면서 툭- 내뱉듯이 나에게 질문했다. 왠지 날이 서 있는 듯한 질문이라 위화감이 들었다.
그에 나는 세실리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평소처럼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있어서 그녀의 속내를 예상하기 어려웠다.
"...네. 행복하죠."
"그렇구나. 하긴,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긴 하겠지. 마리가 조금 부럽긴하네."
그리고나서 세실리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더... 있는데..."
"...네?"
"아참. 아이작. 오늘 너한테 주고 싶은 게 있어."
내가 당황하던 말던 세실리는 노트 사이에 끼워져 있던 봉투를 나에게 전달했다. 가로폭이 좁고 세로가 긴 걸 보면 편지 봉투로 추정된다.
그 편지 봉투를 얼떨결에 받자 세실리가 방긋 웃었다. 붉은색의 눈동자가 요사스러운 빛을 발휘하여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무조건 숙소에 가서 혼자 읽어야 돼. 알겠지?"
"...이게 뭔데요?"
"별 거 아니야. 그냥..."
말을 흐리던 세실리는 진심어린 미소를 짓더니 얼굴이 가까이 대었다. 그에 내가 흠칫하고 있을 쯤, 그녀가 내 귓가에 입을 대며 소근거렸다.
"은인을 향한 내 진심 정도랄까?"
"... ..."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귀가 간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