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영원할 것 같던 시간은 언젠가 끝을 보는 법이다. 이건 신조차 어찌할 수 없는 진리이며 불변의 법칙이다.
나와 마리의 따스한 애정 행각 또한 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몇 시간 내내 포옹을 하고 싶었지만 우리 둘 모두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헤어질 때도 서로 아쉬움을 담아 가볍게 키스하는 건 잊지 않았다. 놀라운 건 내가 아니라 마리가 먼저 고개를 내밀었다는 걸까. 나는 그저 호응을 해준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충치가 날 정도로 달콤한 시간은 끝이 났지만 혀에 감도는 아릿함은 다음 날에도 쭈욱 이어졌다.
"히히히."
"이러다 누가 보면 어떡해?"
"보라고 해. 어차피 숨길 필요도 없는데."
강의 시간에 아무도 모르게 서로 손을 붙잡는다던가.
"오늘은 저기로 가자! 저기 티라미수가 그렇게 맛있데!"
"다른 건?"
"다른 것도 많아. 일단 뭐가 있냐면..."
수업이 끝나면 무조건적으로 붙어다니면서 아카데미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던가.
"아앙."
"악! 왜 깨물어?"
"그냥 깨물고 싶어서. 가끔 몇몇 사람들이 애인 얼굴 뜯어먹고 산다던데 왜 그러는지 알 거 같아."
뜬금없이 내 뺨을 살짝 깨문다던가 등등.
연애 초기라고 상상하지 못 할 정도로 진도가 상당히 빨랐다. 애시당초 첫 시작부터 손을 잡는 걸 넘어 키스까지 했으니 이정도야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가끔가다가 내 뺨을 깨무는 행위만큼은 지양했으면 좋겠다. 딴에는 장난 같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 정말 아프다.
"그럼 목을 물어야지. 앙!"
"으악!"
그래도 하루하루가 즐거운 건 변함이 없다. 숙소에서 원고를 작성할 때도 마리의 해맑은 미소가 생각나고, 길을 걷다가도 생각나고, 밥을 먹을 때도 생각난다.
전생에서 연애를 안 한 건 아니었으나 이런 기분은 나에게 활력소가 되어줬다. 그덕분인지 몰라도 원고를 작성하는 속도가 무시무시하게 빨라졌다.
주변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 조금 신경쓰이긴 해도 상관없었다. 마리는 우리 둘의 연애 사실을 들켜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고, 나 또한 꿇릴 게 전혀 없어서 당당한 태도를 고수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공작가 딸과 일개 남작가의 아들이 연애하는, 정말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자세한 내막을 들여다보면 180도 다르니까. 만약 그런 시선을 보낸다면 우리 둘 모두 속으로 조소를 흘릴 것이다.
"...자악."
"... ..."
"아이자악?"
"네?"
나는 누군가의 부름에 다급히 정신을 차렸다. 마리에 대해 생각하느라 실수로 잠깐 상념에 빠져버렸다.
정신을 차려 앞을 바라보니 진한 다크서클에 동태처럼 썩은 눈을 가진 엘프, 신디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녀는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고 특유의 흐물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또 멍 때리는 거 같아서어... 무슨 생각해애?"
"아... 잠깐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요."
"이상한 거 아니지이?"
"어..."
나는 신디의 질문에 시선을 피하며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마리와 키스했던 기억이 떠올랐다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오늘은 마리가 본인의 오빠와 할 일이 있다면서 먼저 가버렸다. 이 기회에 최근 너무 바빠서 오지 못 했던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로 와서 신디에게 작문법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머릿속에서 마리가 떠올랐다. 이게 중증이라는 거겠지.
다른 사람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만큼 실례인 것도 없으니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상한 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으음..."
신디는 내 대답에 생기없는 눈동자로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린 쪽에는 노트 한 장이 놓여있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면 된다고오?"
"늘 말했지만 작문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을 전달하느냐에요. 특히 신디가 작성하려는 논문은 이 부분이 더 심화되는 편인데..."
엘레나 교수에게 제안을 받은지 거의 세 달이 지나가지만, 정작 연구실에 방문한 횟수는 현저히 적었다. 제안을 받고나서부터 다양한 사건사고가 덮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날로 먹는 것 같기도 하고, 시간적 여유가 나자 오늘은 연구실에 방문한 것이다. 또한 제논 일대기의 전개를 위해 신디에게 물어볼 정보도 있었다.
"우선 신디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같은 기본적인 건 괜찮아요. 문법이 엉망진창이라서 그렇지."
"미안해애."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문법은 가장 단순한만큼 파고들면 파고들 수록 복잡한 거라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일상에서의 대화를 떠올리면 편해요. 신디의 고향에는 아카데미 같은 교육기관이 없어요?"
"있지이... 애초에 아카데미라는 교육 기관이 우리 엘프가 최초로 세운 거니까아."
하기야 인간은 엘프가 이룩한 문명을 모방했으니 교육 기관도 따라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나에게는 새로운 지식이나 다름없어서 살짝 놀라운 건 마찬가지였다.
간혹 신디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엘프가 어째서 인간을 그대로 방치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들한테는 안 된다는 자신감 때문인걸까.
실제로 인간 기사가 떼거지로 덤벼도 엘프 전사 한 명을 이기기란 매우 힘들다. 기초적인 스펙부터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버리니 엘프도 신경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종족 전쟁 당시에도 밀렸다는 기록이 한 번도 없었고.'
종족 전쟁이 끝난 결정적 이유는 한 쪽이 패배한 게 아니라 엘프 쪽에 자멸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수뇌부 쪽에서 삽질을 쉬지 않고 반복했다.
어딜 가나 꼰대가 문제라고, 특히 꼰대가 높으신 분들이면 그 밑의 사람들이 고생하는 법이다. 이후로 세대 교체가 일어났다지만 그 영향력은 무시무시하다.
'확실히 인간은 세대 교체가 자주 일어나니까 물갈이가 빨리 되겠지.'
아무튼 각설하고-
"아니. 이거 또 이러시네. 제 설명이 어려운 건 아니죠? 신디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적으시면 된다니까요? 신디가 저랑 얘기 나눌 때를 생각해봐요."
"우음... 알았어어..."
신디의 배움은 실로 파멸적이라 할 수 있었다. 같은 설명을 여러번 반복해야 간신히 이해할 정도다.
입으로 잘게잘게 씹어서 억지로 넘겨줘야 받아들이는 수준이라고 해야할까. 인간에 비해서 다른 종족은 배움이 느리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하물며 엘레나 교수의 언급에 따르자면 신디는 다른 엘프보다 머리가 둔한 편이라 했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성질내서 죄송해요. 제가 좀 더 자주 왔어야 했는데..."
"아니야아... 너는 몰라도 나는 엘프라서 이것도 빨리 온 거야아..."
내가 마른세수를 하며 한탄하자 신디는 정말 미안하다는 기색으로 쩔쩔매었다. 나는 그걸 보며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직전이었던 화가 점차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본인이 아예 의지가 없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둔해서 저런 건데 화를 낸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자칫하면 괜히 그녀의 의지를 꺾어버릴 수도 있다.
'아직 시간은 많아. 3학년이 되면 수시로 연구실에 방문할테니 그때까지 참으면 돼.'
엘프의 시간 관념은 절대 인간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엘프에게 1년이라는 기간은 인간에게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나는 펜으로 노트에다가 글을 끄적이는 중인 신디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신디에게 작문을 가르치는 건 천천히 해도 된다.
"신디."
"으응?"
"지난 번에 제가 말했던 책은 읽어보셨어요?"
"제논 일대기이? 읽어봤지이... 엄청 재미있더라아...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됐어어..."
도움이 많이 된 게 이정도 수준이라... 재미있게 읽었다니 기분은 좋지만 왠지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쨌거나 내가 왜 제논 일대기를 언급했냐면, 앞으로 제논 일대기에 중요한 위치를 맡을 엘프에 관해서다.
또한 '칠죄종'에서 '교만'을 담당하는 중인 악마측 간부가 엘프다. 엘레나 교수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려니 시간이 나지 않아 신디에게 반응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전에 9권까지 읽어봤는지 확인해야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한 신디에게 다음 질문을 했다.
"몇 권까지 읽으셨어요?"
"전부 다 읽었어어... 교수님에게 말씀드리니까 흔쾌히 빌려주시더라고오..."
"그럼 칠죄종 중에 엘프가 교만을 맡고 있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으음..."
내 질문에 신디는 노트에 끄적이던 펜을 멈추며 입술을 오므렸다. 아무래도 내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독특하게도 신디는 내가 질문하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착실히 대답해주는 편이다. 본인은 모르고 있겠지만 천성적으로 남들에게 무언가 설명하는 걸 좋아한다. 심지어 설명도 잘해준다.
비록 그 설명을 글로 옮겨적는 일이 매우 힘들다는 거지만. 만약 그것까지 완벽했다면 엘레나 교수가 탄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글쎄에... 고향을 떠난지 오래 되서 잘 모르겠지마안... 아마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을 거얼? 종족 전쟁 당시에도 우리 엘프는 외압이 아니라 교만 때문에 내부부터 무너졌으니까아... 마지못해 인정하겠지이..."
"그럼 반응이 없는 건..."
"반응이 없는 건 절대 아니야아... 세대 교체가 일어났더라도 내부적인 다툼은 여전해애... 다행히 여왕님이 온건한 편이셔서 아직까지는 문제는 없을 거야아..."
반대로 말하자면 엘프측에서도 나를 잡기 위해 벼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여왕의 성격이 온건하여 막고 있을 뿐, 만약 여기서 문제가 더 커진다면 말이 새어나오겠지.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앞으로의 전개를 상기했다. 9권이 칠죄종의 등장이라면 10권은 엘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룰 생각이다.
정확히는 엘프 여왕과 제논을 가르쳤던 '스승'의 이야기다. 본래라면 아무 생각없이 썼을테지만 마족과 칠죄종의 영향력을 떠올리자니 함부로 쓰기가 어려웠다.
"음... 신디."
"왜에?"
"신디는 엘프가 인간이랑 깊은 연을 맺는 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으응?"
신디가 내 질문을 듣고 나를 쳐다보다가 눈을 두어번 깜빡거렸다. 흐리멍텅한 표정 속에 의문이 자리잡혔다.
내가 어째서 이 얘기를 하는 거냐면, 엘프 여왕과 '스승'의 관계 때문이다. 장수종인 엘프와 단명종인 인간의 사랑 이야기. 이 얼마나 애절한 스토리란 말인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세상에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다른 로맨스 소설에서조차 엘프와 인간 사이의 러브 스토리는 전무했다.
엘프는 다른 종족과 사랑을 나누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따로 이유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다. 그래야만 훗날 발생할 수도 있는 사건을 방지할 수 있을테니까.
마족과 증기 기관차, 그리고 칠죄종까지 3연타를 쳐버리니 나로서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것도 파급력이 심하다 싶으면 과감하게 배제할 생각이다.
"그건 갑자기 왜에? 나한테 관심이라도 있는거야아?"
나를 조용히 응시하던 신디가 불현듯 그런 의문을 드러냈다. 식겁해질 수도 있는 말이라 곧바로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아뇨. 아뇨. 그건 아니에요. 평소 궁금했던 부분인데다가 전 이미 여자친구도 있어요."
"그래애? 흐음..."
신디는 의심의 눈초리로 거두고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한참동안 머리를 굴리는 것 같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우리가 인간과 연을 맺는다는 거언...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아... 엘프에 비해서 인간의 수명은 극도로 짧거드은..."
"그럼 인간이 아니라 다른 종족도요?"
"그을쎄... 너도 알다시피 우리 엘프는 다른 종족을 경시하는 편이라아... 세대가 교체되면서 그런 시선이 줄었들었다지만 아직까지 남아있거드은... 자기가 인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같은 취급을 잘 안 해줘어..."
역시나 교만의 종족 다웠다. 하지만 그 교만의 뿌리가 어디인지 고려하자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신디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추가로 덧붙였다.
"설사 연을 맺는다고한들 엘프 쪽에서 거부할거야아... 평생동안 사랑했던 사람을 가슴에 묻어두면서 사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잖아?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 바에야 차라리 거부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거야아...
"음... 확실히 수명이 가장 큰 문제이긴 하겠네요.
"그런데 그건 왜에? 설마 여자친구가 엘프인 거야아?"
"아뇨. 그건 아니지만..."
나는 신디의 물음에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줬다.
"엘프처럼 예쁘긴 하죠."
"...으엑."
그러자 신디는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