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연달아 발생하여 혼란을 겪었으나 숙소로 돌아오고 잘 무마할 수 있었다. 침대에 몸을 던져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니 뜨거웠던 머리가 서서히 식은 덕분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머릿속이 뒤죽박죽 얽혀있는 건 여전했다. 오늘 세실리가 나에게 보인 행동도 그렇고, 마리가 우리를 뒤따라온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복잡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하루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 안일했나...'
추궁에 가까운 분위기를 형성했던 황족 남매와 달리 세실리는 내가 직접 비밀을 밝히기를 유도했다. 협박이 아니라 엄연히 내 입장을 존중해주는 태도다.
여기에 더해서 세실리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 즉 나에게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되어있다고 스스로 밝혔다. 장난이 아니라 결의와 진정성이 담겨있었으며 진심어린 본인의 의지였다.
다만 내 손을 억지로 이끌어 가슴을 만지게 하고, 더 나아가 내 손가락을 입에 문 행위는 여러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다. 세실리에게 직접 말을 들어봐야 알겠지만 다른 사람(특히 마리)에게는 자기 몸을 빌미로 유혹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다.
그때 당시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버려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안일했던 부분이 있다.
물론 세실리가 그런 의도로 유혹을 한 것인지는 파악할 수 없다. 이건 다음 날에 따로 만나서 확인을 구할 생각이다.
'확실히 머리를 많이 비우고 살긴 했어.'
나는 현실 감각이 뒤떨어진다고 할 수 있고,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전생에서는 대학교 생활을 하다가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셔서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지금은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집에서만 지냈다.
이로인해 물 흘러가듯이 인생을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변수에 확실한 대처를 못 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레오르트와 리나도 그렇고, 세실리도 그렇고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의 가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그게 어느 정도인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헬리움의 공주가 스스로 몸을 바칠거라 말할 정도이니 비범한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 건 확실하다.
'다행히 황족과 세실리라서 망정이지, 이러다가 나중에 진짜 큰 사단이 나버릴 거야. 아버지도 못 막을 수 있어.'
아버지라는 든든한 빽이 있다지만 그것조차도 '국가'라는 거대한 세력 앞에서는 힘없이 무너질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능력이 아닌 내 힘으로 타파할 능력을 키워야 옳다.
아버지와 더불어 가족들은 언제든지 나를 도와주겠다고 말했지만 매사에 기댈 수 없는 법이다. 이게 응석받이가 아니면 대체 뭐겠나.
그러니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 상황에 알맞게 대처하되,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가족의 힘을 빌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가족들도 이런 내 의견을 존중할테고.
이런 생각을 거치다보니 그동안 내가 너무 멍청했나 싶다. 생각없이 지내는 것보다는 타산적인 면모가 존재해야 앞날이 편해질 것 같다.
'그리고 마리는...'
오늘로서 확신을 내릴 수 있었다. 마리는 나에게 '썸'을 넘어선 연애 감정을 품고 있다.
나와 세실리의 뒤를 밟은데다가 직접 방문을 두드린 걸 보면 제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정도는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내 반응은...
'...우선 손부터 잡아야하나?'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진 것부터 시작되었다. 나 또한 평소 마리에게 사람 대 사람을 넘어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품고 있다.
첫 만남은 그리 좋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같이 지내면 지낼 수록 자연스레 그런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얼굴이 아름다운 것도 있지만 권위의식과 한참 동떨어진 성격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마리는 내가 제논 일대기 저자라는 걸 전혀 예상조차 못 하고 있다. 세실리와 달리 그녀는 나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한다고 봐야한다.
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그녀의 배경이다. 마리의 가문은 나처럼 일개 남작가도 아니고 무려 황실 다음 가는 권력을 지닌 레킬리스 공작이다.
황제와 공작의 사이는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좋은 편도 아니다. 서로 치열하게 경쟁과 견제를 하여 미네르바 제국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자칫 삐긋하기라도 한다면 제국이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다.
'마리는 딱히 신경쓰지 않겠지만...'
마리는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알아도 놀라기만 할 뿐, 그이상의 반응은 없을 것이다. 그녀와 붙어다닌 적이 많았기에 이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다는 거지, 그녀의 가문이 과연 나를 가만 놔둘지는 의문이다. 그러니 마리와 교제를 한다더라도 그녀가 눈치채기 전까지는 직접 말하기 애매하다.
'일단 내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해.'
신문에서는 소설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니, 마족의 숙원을 이루어준 은인이라니, 신학을 재정립했다니 등등.
다양한 평가들이 세간에 떠돌았으나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지피지기라고, 내 가치를 좀 더 똑바로 알아놓아야 참사가 발생하는 걸 막을 수 있다.
'진짜 글 하나로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냐...'
나는 속으로 갑갑한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현실 감각이 좀 부족한 편이다. 그러나 다양한 사건을 겪고나니 마음가짐을 바꿔먹을 필요성을 느꼈다.
그 생각을 하면서 책상에 앉아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서랍을 여니 두툼한 원고지가 한가득 쌓여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평범한 원고지는 아니다. 여태까지 내가 정성스레 쓴 원고들, 그러니까 제논 일대기의 초판본이다.
원래 출판사에서 초판을 맡기고 있었지만 제논 일대기가 예상을 한참 웃돈 히트를 쳐버리자 다시 돌려줬다. 출판사 입장에서도 이런 걸 계속 지니고 있다간 큰일날테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반송할 수밖에 없다.
'과연 이게 얼마나 큰 가치를 갖고 있을지...'
겉보기에는 볼품없는 원고지로만 보인다. 하지만 높으신 분들 눈에는 어떻게 비추어질지 궁금했다.
내 몸값도 몸값이겠지만 초판의 가치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특히 문화강국이라 불리는 테이로스 왕국에게는 그야말로 보물이지 않을까.
그러나 방금 전에도 말했듯이 내가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는지부터 아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물어보기에 적합한 사람은...
'레오르트와 리나, 그리고 마리... 정도인가?'
세실리는 마족의 입장을 대변했으니 패스하고, 관계가 제일 복잡한 건 역시 인간들이다. 제논 일대기의 주인공이 인간이다보니 가장 열광하고 있는 종족도 인간이었으며, 또 나를 찾으려고 벼르는 종족도 인간이다.
그러니 인간측의 높으신 분들은 초판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 나는 머릿속에서 세 사람을 떠올리다가 미간을 살짝 구겼다.
'역시 이중에는 마리가 가장 신뢰가 가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리만큼은 특정 목적을 품은 채 접근하는 건 좀 꺼림칙하다. 그녀와는 늘 그랬듯이 웃고 떠들고 평범한 생활을 즐기고 싶다.
일종의 안식처라고 해야할까. 내 안일함으로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적어도 그녀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는 편이 좋을 듯했다.
물론 마리는 내가 어떤 사람이던 간에 기쁜 마음으로 받아줄테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조심히 대해야한다. 이미 그녀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 알게 된 이상 해를 끼치고 싶진 않다.
'지금 당장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는 게 좋겠지. 내 마음가짐부터 아버지에게 피력한 후부터 행동에 나서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에 나는 초판본을 다시 서랍에 넣어두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스스로 행동하겠다하면 적잖이 당황하실테니 사정을 설명드려야겠지.
'더이상 아무 일도 없다고 생각하면 안 돼.'
이미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했고,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본디 비밀은 혼자만 알고 있어야 비밀인 법.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대비할 수 있도록 하자.'
나는 진지한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보낼 편지를 차근차근 써내리기 시작했다.
*****
빛 한 점조차 들어오지 않는 방 안.
붉은 눈의 마족, 세실리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는 중이었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색 눈동자와 침대 위에 흐뜨러진 검은색 머리카락으로 하여금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
그녀는 천장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수 십년간 단련하여 굳은살이 박힌 자신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 ..."
세실리는 손을 바라보면서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그와 동시에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골똘히 떠올렸다.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 일상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특별했다. 왜냐하면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제논 일대기의 저자이자 마족의 은인을 만나게 되었으니까.
물론 그가 정말로 제논 일대기의 저자인지는 증거가 나와야 알겠지만 세실리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붉은 머리의 소년, 아이작은 자기가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던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확실하다고.
그가 직접 비밀을 말할 때까지 살살 유도한 거지만 아이작이 정말로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고 하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노년의 현자라 추측하는 중이었으니까.
아이작처럼 20살도 되지 않은 파릇파릇한 영계... 아니, 애송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작...'
세실리는 그동안 마족이 받아왔던 핍박을 떠올렸다. 100년이라는 세월은 마족에게도 상당히 긴 시절이다.
그 시절동안 마족은 다른 종족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 했다. 아니, 그걸 넘어서 혐오와 경멸의 시선을 받았다.
자신은 헬리움의 공주였기에 다행히 그런 시선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지만, 다른 마족들은 아니다. 바깥 사회로 향한 마족들은 하나같이 좋지 못한 비극을 맞이했으니.
이로인해 헬리움은 외교적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갔으며 반강제적으로 폐쇄적인 입장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최근 헬리움이 테이로스 왕국과 외교를 시작했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업적이다.
'이 모든 게 다...'
붉은 머리의 소년, 아이작 덕분이다. 세실리는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천장으로 뻗었던 손을 가슴에 대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고장난 것처럼 거칠게 두근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잔뜩 흥분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요동치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진정하려고 노력했으나 쉽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인지하는 순간 심장이 더욱 크게 날뛰었다.
이 감정은 과연 사랑인 것일까, 아니면 존경인 것일까. 태어나면서 이런 감정은 생소했기에 세실리로서는 쉽게 감을 잡지 못 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은인...'
이 감정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 아이작을 향하는 중이라고.
"하아..."
세실리는 달뜬 숨소리를 내면서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리고 오늘 마리가 자신에게 해줬던 말을 기억했다.
마리는 아이작을 좋아하는 이유가 비밀 때문이 아니라고 발언했다. 그냥 단지 아이작이라는 존재 자체가 좋다고, 세실리와 달리 그깟 비밀 따위는 상관없다고.
이 말은 세실리에게 큰 충격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그녀 덕분에 본인의 실책을 좀 더 일찍 깨닫게 되었으니까.
'큰일날 뻔했어.'
하마터면 '은인'에게 엄청난 결례를 저지를 뻔했다. 자신은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다는 의미로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이나 지금 곰곰이 생각하니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과연 '은인'에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을까? 절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이런 생각들을 거치니 새삼 아이작을 다르게 볼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단지 귀여운 동생으로만 보였지만, 지금은 마족의 숙원을 이루어준 은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귀여운 동생과 마족의 은인. 그때 당시는 이 두 가지가 합쳐진 바람에 실수를 범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아아..."
정말로 감사하고, 또 정말로 사랑스러운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할까.
경모? 그래. 어쩌면 경모라고 할 수 있다.
그 생각을 들자 세실리는 두 손을 꼭 맞잡으며 몸을 베베 꼬았다. 당장 그에게 달려가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부터 올리고 싶고, 또 자신은 언제라도 준비가 되어있으니 말만 하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실수를 저질렀으니 지금은 조심스럽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의 옆에는 흰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으니.
겉으로는 평상시처럼 행동할 것이지만... 단 둘이 있을 때는 본심을 드러낼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은인이시여...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몸을 뒤틀면서 중얼거리던 그녀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으로 향해 의자에 앉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우선 편지부터... 그런데 남학생용 숙소로 어떻게 보내지? 혹시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세실리는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글을 써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