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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51화 (52/763)

< 51화 >

"흐흐흥~ 흥~"

백발의 미소녀, 마리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길을 걷고 있었다. 항상 품위를 지켜야 하는 귀족의 모습과 한참 동떨어진 위풍당당한 걸음걸이였다.

또한 그녀는 품에 책 한 권을 소중히 감싸는 중이었는데 새로 발간된 제논 일대기 9권이었다.

'진짜 운이 좋았어.'

제논 일대기는 신작이 나왔다하면 한 시간도 안 되어 품절되는 경이로운 인기를 자랑한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출판사에서 제논 일대기가 나온다는 소식을 뿌리면 그때부터 전쟁이라고.

사람을 고용해서 서점 앞에 하루종일 대기시키는 건 물론이고, 사재기와 더불어 사기까지 발생하는 등.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들이 속속 등장했다.

다행히 각각 나라에서 심각성을 알아차려 엄벌에 처하자 그런 해프닝은 사라졌지만 서점 앞에서 대기하는 사람들은 그대로였다. 이 부분은 불법도 아니었던지라 막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한 사람이 두 권 이상 구매하는 것도 철저하게 막았다. 그 하나를 막기 위해 신원 조회를 위한 마법 기술까지 발명됐다. 만약 이 사실을 아이작이 듣게 된다면 어이없어 하겠지만 현재 그는 아무런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제논 일대기는 속속 품절되기 일쑤였다. 레킬리스 가문의 딸, 마리조차 사람을 시키거나 가족에게 부탁하지 않는 이상 제논 일대기를 직접 구매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이번에는 아빠한테 부탁할 일도 없겠네.'

하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달랐다. 제논 일대기가 상상 그 이상으로 엄청난 판매량을 자랑하자 출판사 측에서 작정했기 때문이다.

원래도 모든 인쇄소를 갈아넣어 공장마냥 제논 일대기를 찍어냈지만 그것마저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아예 새로운 대형 인쇄소를 하나 신설하고 새로운 기술까지 도입시켰다.

그덕분에 귀족조차 구매하기 어려웠던 제논 일대기를 평민조차 쉽게 얻을 수 있었으며, 설령 당일날 모두 매진되었더라도 사흘 후면 다시 재고가 쌓여있었다.

'딱 한 권만 남았던 걸 구입하다니. 이런 행운도 없을거야.'

마리는 제논 일대기를 품에 꼭 껴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발매 첫 날에는 실수를 한 바람에 구매하지 못 했지만, 사흘 후 서점에 방문하니 딱 한 권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때는 너무 떨려서 하마터면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뻔했으나 간신히 선수쳐서 구매했다. 경쟁하던 대상이 분하다는 눈길을 보냈지만 마리는 개의치 않았다.

이후로 지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과제와 시험도 중요하지만 머리를 식히기 위해 제논 일대기부터 읽을 계획이다.

'아이작은 샀으려나?'

마리는 행복한 마음으로 길을 걷다가 문득 아이작이 생각났다. 요즘들어 아이작의 얼굴이 머릿속에 자주 떠오른다.

게다가 같이 수업을 들을 때도 그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경우가 늘어났다. 아이작이 그 시선을 눈치채서 고개를 돌린다면 시선을 회피하는 일이 다반사고.

본래는 단순히 호감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점점 더 명확해졌다. 마리는 품 속의 제논 일대기를 더욱 강하게 껴안으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 모임에서도 언급한 거지만, 아이작은 비밀을 숨길지언정 남을 대하는데 솔직하다. 그거 하나만으로 마리의 호감을 사기에는 충분했으며 점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친구 정도에 불과했으나 아이작과 대화하는 게 제일 편하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어떠한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고나서 아이작과 얘기하면 눈 녹듯이 사라졌으며, 그전에 아이작이 자신의 표정을 캐치해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물어본다.

'그런데 요즘 리나의 행동이 심상치 않던데...'

허나 그런 행복한 생각도 얼마 가지 않았다. 최근 리나가 아이작에게 선보이는 행동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리나에게 아이작은 흥미로운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나 세실리처럼 아이작에게 장난을 치거나 친근하게 대하는 경우는 여태까지 잘 없었다.

그러나 최근 한 달 간 아이작에게 접근하는 빈도가 잦아졌다. 마리로서는 신경 안 쓸래야 쓰이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리나의 태도였는데 리나는 흔히 '가면'을 쓰며 사람을 대하는 편이다. 황녀라는 직위상 어쩔 수 없다지만 한 번 크게 데인 적이 있는 마리로서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그 가면도 점점 없어지고 있어.'

헌데 그 가면을 벗으며 아이작을 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큰 문제다. 본래 리나는 세실리와 이야기할 때만 가면을 벗어던졌으나 최근 아이작과 대화할 때도 벗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릴 때부터 가면을 쓰고 지내던 그녀가 왜 갑자기 그런 행동을 보이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마리로서는 절대 달가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아이작은 여전히 리나를 꺼려하지만 사람 일은 그 누구도 모르는 법이다.

'갑자기 그 녀석이 왜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단 말이야. 내가 모르는 무언가라도 알고 있는건가?'

마리가 석연찮은 기분을 느끼며 숙소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불현듯 아주 익숙한 색상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시야에 잡혔다.

시간대 상으로 모든 수업이 끝나는 시간대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선홍색이라 눈에 확 띄였다. 마리는 그 색깔을 보자마자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붉은색 머리카락이라고함은 현재로서는 한 명밖에 없다.

"아이...!"

이에 그녀가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 붉은 머리카락의 학생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고 입을 급히 다물었다.

이 세상에서 검은 머리카락은 드문 편이 아니나 칠흑처럼 진한 색상은 드물다. 또한 검은색 머리카락만이 특징이 아니었다.

마족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머리의 양옆에 우뚝 솟아있는 뿔.

아이작의 곁에 있는 여자는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였다.

"... ..."

마리는 아이작과 세실리가 나란히 걷는 걸 보며 눈 밑을 꿈틀거렸다. 지난 번 모임에서도 느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이작이 세실리랑 단란히 붙어있는 걸 보면 심기가 급격히 불편해진다.

무엇보다 세실리는 아이작에게 짓궂은 장난을 곧잘 치는 편이라 고운 시선을 보낼 수 없었다.

'둘 다 어디로 가는거지?'

마리는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서둘러 파악했다. 마음 같아서는 불쑥 끼어들고 싶었지만 우선 뒤를 밟을 생각이다.

아이작의 선홍빛 머리카락처럼 자신의 흰색 머리카락도 꽤 눈에 띄는 편이니 조심조심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왠지 미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실제로 미행이 맞다. 마리는 혹여 그들에게 들킬까봐 매사에 신중을 기울였다.

이윽고 그들이 들어간 곳은 다름아닌...

'...카페?'

카페였다. 그것도 비밀스러운 담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카페.

마리는 아이작과 세실리가 들어간 카페를 멍하니 바라봤다. 자신도 오빠에게 가문의 상황을 주고받을 때나 방문하지, 그 외에는 이 카페 발을 디딜 일이 아예 없다.

조금 비싸긴 해도 방마다 방음이 될 뿐더러 보통 '연인'들이 방문하는 것으로 유명한 카페다.

'...아니겠지?'

마리의 푸른색 눈동자가 불안감으로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

카페에 들어선 나와 세실리는 우선적으로 방을 배정받았다. 카페 종업원이 세실리를 보고나서 살짝 흠칫한 해프닝이 있었으나 무난하게 넘어갔다.

잠시 후, 우리는 방음이 철저한 방으로 배정받아 안으로 들어왔다. 비좁지도 넓지도 않은 곳이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카페는 보통 연인들이 오는 곳이라던데."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인 세실리가 은근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처음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에요? 전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진짜로 몰랐다. 내가 이 카페를 아는 이유는 단순히 니콜이 한 번 데려와서다.

세실리는 내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몰랐어? 하긴, 몰랐으니까 여기로 온 거겠지. 그래도 이상한 소문은 안 날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연인이 자주 방문하는 곳이지 진짜 그런 곳은 아니니까."

"그런 곳이 대체 뭐예요?"

"음... 그런 게 있어. 어린애는 몰라도 돼."

내 물음에 세실리는 요망한 미소를 짓더니 검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덕분에 연인들이 이 카페에 와서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대충 알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

아무리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에 왔다지만 괜히 온 듯한 느낌이다. 나는 무안함에 뒷목을 매만졌다.

"...아니면 자리를 바꿀까요?"

"아냐. 괜찮아. 아이작이 나한테 이상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밀담이잖아?"

"제가 아니라 누나가 저한테 이상한 짓을 할 것 같은데요?"

"농담도 참."

세실리는 손을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도 농담으로 말한 거라 웃어넘기려고 했다.

"들켰나?"

"...네?"

그녀가 작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전까지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여서 진심인지 장난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세실리는 내가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묻자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못 들은 척 해줘. 내가 너한테 이상한 짓을 할 리가 없잖니?"

"어... 네. 그렇... 겠죠."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들었지만 착각이라 치부했다. 세실리가 무력적으로 나보다 훨씬 강한 건 맞지만 그녀의 성격상 그런 행동은 하지 않을테니까.

잠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갈 뻔했으나 다행히 직원이 주문을 요청하면서 풀어졌다. 세실리는 아메리카노를, 나는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뒤이어 직원이 물러나고 우리 둘만 남게 된 상황이 돌아왔다. 세실리는 직원이 돌아가자마자 두 손으로 턱을 받치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시선에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내 비밀을 밝히려 이곳에 왔으니 꿇릴 건 전혀 없었다.

"아이작."

"네. 누나."

"아이작은 글을 쓰는 걸 좋아해?"

직접적으로 묻기보다는 간접적으로 돌려서 묻는 세실리.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좋아해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세실리는 내 대답을 듣고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려는 모양이다.

어차피 모든 비밀을 알려줄 생각이었기에 긴장은 거의 하지 않았다.

"...아이작."

"네."

"혹시 2달 전에 네가 나에게 해줬던 이야기를 기억해? 마족이 어떤 존재인지 네가 알려줬잖아."

기억나다마다. 그 후로 원고를 부랴부랴 수정했던 것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세실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때 있었던 일을 입 밖으로 하나하나 꺼냈다.

"그때 너는 우리 마족을 이렇게 표현했지.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 누구보다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존재라고."

"... ..."

"그 이야기는 평생동안 잊지 못할 거야. 그런데 제논 일대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지. 사크란이 사망하고나서 진이 고민하고 있을 때 제논이 말해줬던 거야. 알고 있니?"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세실리에게 해줬던 말을 제논 일대기에 적으려고 했지만 곧바로 수정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의미를 전달해야했기에 비슷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세실리는 그 부분을 보고 눈치를 챈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그 부분을 보자마자 네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르더라. 정말로 우연에 우연일 수도 있지만 여러모로 의심되는 정황이 많거든."

"예를 들면요?"

"우선 중지 손가락에 난 펜혹."

세실리는 손가락으로 내 펜혹을 가리켰다.

"그 펜혹은 오랜 시간동안 펜을 잡아야 나는 거라며?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증거가 안 되지. 아이작은 노트에 기록을 하는 습관이 있으니까."

"... ..."

"두 번째로는 제논 일대기에 시큰둥한 너의 태도. 지난 번 모임에서 잭슨과 주고받았던 이야기를 엿들었어. 시큰둥한 태도치고는 스토리를 거의 다 꿰차고 있더라고. 보통 그정도면 열정적이어야 정상인데 너는 제논 일대기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무심했어."

모임에서 잭슨과 나눴던 대화를 들은 건가. 그때 세실리는 멀리 떨어져 있던 걸로 아는데 어떻게 들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마력으로 청력을 키운 것일 수도 있겠지. 아카데미에서 마법은 금지이지만 감각을 키우는 것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세실리는 마지막 증거를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네가 나에게 말해줬던 마족의 정체성. 악마로 취급받던 우리 마족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비록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지극히 드물겠지. 아무리 제논 일대기를 읽었다하나 그런 생각을 가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과거에 우리 마족이 받았던 차별을 고려하면 더더욱."

"... ..."

"위의 세 가지만 종합해도 충분히 의심할만해. 거기다 방금 전에 네가 글을 쓰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지? 이 모든 단서를 종합하자면 한 가지 결론이 나와."

한 번도 쉬지 않고 다양한 말을 꺼낸 세실리는 내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나 또한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와 마주했다.

아무래도 여기서는 내가 먼저 입을 여는 게 좋을 듯했다. 나는 콧숨을 길게 내쉰 뒤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제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데 물어봐도 될까요?"

"괜찮아."

"누나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찾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여기가 갈림길이다. 만약 세실리가 솔직담백하게 대답해준다면 기꺼이 밝히고, 그렇지 않다고 다음으로 미룰 생각이다.

물론 미뤄봤자 비밀이 감춰지는 건 아니겠지만 확인해야하는 건 확인해야한다. 멀리 가지 않아도 리나의 예시가 있으니까.

세실리는 내 질문을 듣고 진한 미소를 짓더니 턱을 괴던 손을 아래로 내리며 서로 마주잡았다. 또한 부끄러웠던 건지 양볼에 홍조가 깃들었다.

내가 그 반응을 보고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을 때, 세실리는 요조숙녀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도 아시다시피 제논 일대기는 우리 마족의 숙원을 이루게 해준 은인이야. 내가 이곳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도 그 분 덕분이지."

"... ..."

"만약 그 분을 찾는다면... 기꺼이 내 모든 걸 바칠 거야. 그 사람이 남자던 여자던, 그리고 잘생기던 못 생기던, 나이가 많던 나이가 어리던 상관없어. 그분에게 입은 은혜에 비하면 이것조차 부족하지."

전혀 부족하지 않는데요. 나는 세실리의 대답을 듣고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헬리움에 초대하거나 보호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모든 걸 바친다니, 나로서는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답례다.

세실리가 누구인가. 헬리움의 공주이자 다음 대 차기 마왕으로 예정돼 있는 여인이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모든 걸 바치겠다고 하면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어..."

내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얽혀 아무런 생각조차 나지 않을 때였다. 세실리는 내 반응을 보고 빙긋 웃더니 내 손을 붙잡아 어디론가 천천히 이끌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끈 곳은...

물컹-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흉부 쪽, 즉 가슴이었다. 순간 손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감촉에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다.

아직 비밀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그녀가 이런 행동을 취하는 건지 혼란해하는 것도 잠시, 세실리가 색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어때?"

"... ..."

"더 만지고 싶지?"

두근- 두근- 두근-

가슴 너머로 느껴지는 세실리의 심장 소리와 내 심장이 동시에 요동쳤다. 나는 할 말도 잊은 채 세실리를 멀거니 쳐다봤다.

그녀도 이런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던 것인지 얼굴이 터질듯이 붉어져 있다. 그러나 나에 비하면 약과일 것이리라. 나는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았으니까.

그동안 세실리는 얼굴을 앞으로 쭈욱- 내밀며 내 얼굴에 가까이 접근했다. 뒤이어 귀를 살살 간지럽히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직접 비밀을 밝히고, 그 증거까지 보여주면 여기서 더 해줄 수도 있어. 나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거든."

"그..."

"설마 우리 아이작은 고자가 아니지?"

그럴리가 있나. 남성의 본능을 자극하는 목소리에 내 분신은 점점 힘을 충전하는 중이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힘을 주었다간 대참사가 일어날 것 같아 꾹- 억누르는 중이지, 이성의 끈이 조금이라도 끊어지는 순간 나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나조차도 모르겠다.

이에 내가 간신히 정신을 붙들어매면서 손을 회수하려던 찰나였다. 세실리는 내가 팔을 잡아당기자 오히려 힘을 더 강하게 주더니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냠..."

내 중지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뒤이어 정확히 내 펜혹이 자리잡혀있는 마디까지 입에 넣어버렸다. 실로 대담한 행동이지 않을 수 없다.

할짝-

여기까지라면 모를까, 세실리의 혀가 내 펜혹을 살살 건드리는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말랑거리는 혀의 감각이 손을 타고 전해져 뇌가 찌르르- 울렸다.

이로인해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이성이 완전히 끊겨버렸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에라이. 씹팔.'

여기서 물러난다면 남자라고 할 수 없다. 비밀을 밝히고 자시고 지금은 본능에 충실해야할 것 같다.

그에 눈을 질끈 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똑- 똑- 똑-

갑작스레 난입한 노크가 긴장된 분위기를 모조리 분산시켜버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문 쪽을 쳐다봤다.

그건 세실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멍한 눈초리로 문을 바라보더니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하필이면...!"

짓씹듯이 중얼거리는 세실리. 그 덕분에 끊겼던 이성이 복구되어 황급히 팔을 빼내었다. 세실리는 내가 팔을 빼내자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라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나는 민망해진 분위기 속에서 세실리를 한 번 힐긋거리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커피를 가지고 온 종업원으로 예상되었다.

만약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아마 사고를 치지 않았을까. 본능은 아쉽다고 소리치는 중이지만 이성은 다행이라 안도하는 중이다.

이윽고 커피를 가져온 종업원을 맞이하기 위해 문을 열고 난 후였다.

"...어?"

종업원이 아니라 아주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과 더불어 푸른색 눈동자. 그리고 아름다운 미모까지.

"...마리?"

마리가 불안과 분노가 한데 뒤섞인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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