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49화 (50/763)

< 49화 >

'신'은 신도들에게 있어서 그 누구보다 의지가 되는 영적인 존재다. 직접적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더라도 실존한다고 굳게 믿으며 신들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려 세상을 이롭게 만든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지구'의 이야기고, 이 세상은 정말로 신이 존재하기에 결코 신을 부정할 수 없다. 신을 정면으로 부정하게 되는 순간 천벌이 내려지며 '신성력'이라는 특수한 힘을 통해 본인들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신을 부정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신학'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학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족을 불문하고 매우 중요한 학문이니 성직자라면 반드시 배워야하는 것들 중 하나다.

하지만 신학이 발달되었다하더라도 여러모로 부족한 점은 있었다. 신이 내린 신탁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은지, 또한 역사에서 신이 신도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지에 대해 다루는 편이다.

중구난방이라고 할 수 있고, '틀'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학자 및 현자들이 이 '틀'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거의 다 포기했다.

신들이 사람과 함께 한 역사는 상상 그 이상으로 길었고, 그 역사동안 받은 가르침들이 워낙 많아서 정립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신학 또한 일종의 역사라고 볼 수 있지만 많은 성직자들은 언젠가 학문을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단순히 신이 사람들과 함께 한 역사가 아닌, 진정한 '신학'을 말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결실이 이제 막 맺으려는 중이다.

"단순히 이 죄악들을 갖고 있는 게 정말로 죄인건가? 나는 아니라고 보오. 실제로 루미너스 님께서도 한때 모라 님을 질투하신 적이 있었소. 하지만 직접적으로 죄를 저지르진 않았지."

"그 죄악을 가지고 행동을 저질러야 그 죄악이 성립한다는 것이오?"

"그렇소. 하지만 일시적인 건 괜찮으나 계속 그 죄악을 갖고 있다면 그것 또한 죄가 되겠지."

전체적으로 하얀 배경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열띈 토론을 나누는 중이었다. 대부분 흰머리가 성성하고 주름이 진 노인들이었으며, 그들의 입고 있는 옷에는 교단을 상징하는 문양이 금빛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큰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루미너스 교단의 신도들이었으나 단순한 신도가 아니다. 교단 내에서도 영향력이 강한 대주교들이었으며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이기도하다.

이들이 한 곳에 모여 토론을 하는 건 그닥 이상하지 않지만, 이전과 달리 열정을 갖고 의견을 주고받는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본래 일정 주기마다 한 곳에 모여 토론을 하는 대주교들이나 형식적인 절차만 오고 갈 뿐, 실제로 득이 되는 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전혀 달랐다. 꽉 막혀있던 댐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처럼 다양한 의견이 오고 갔으며 그에 따른 반박도 수도 없이 쏟아져나왔다.

"특히 교만의 죄는 눈 여겨 보아야 하오. 그대들도 아시다시피 예로부터 교만한 자들은 반드시 몰락했지. 멀리 가지 않아도 엘프를 보시면 될 것 같소. 이 작가도 그걸 알기에 교만을 담당하는 악마를 엘프로 넣었더군."

"교만이라... 다른 건 연구해봐야 알겠지만 교만의 죄는 부정할 수 없겠군. 루미너스 님께서도 오만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라는 가르침을 내리셨으니."

"교만은 그렇다치고 다른 죄악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 것 같소?"

대주교들이 한 곳에 모여서 토론을 나누는 이유는 다름아닌 이번에 언급된 제논 일대기 속 내용 때문이다. 최근에 발간된 제논 일대기 속에는 악마측 간부들이 등장했는데, 아이작은 이들을 '칠죄종'의 설정을 투입했다.

지구였다면 흔하디 흔한 설정 중 하나였기에 아무 생각없이 넘겼겠지만 이곳은 사뭇 달랐다. 칠죄종이라는 개념은 성직자들에게 큰 충격을 선사하기 충분했다.

죄악을 7가지로 딱딱 나누는 것도 놀라운데 문제는 그 죄악들이 인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종족에게 통용되기 때문이다.

칠죄종이라는 개념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성직자들에게 일종의 틀, 즉 패러다임을 제시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여태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이 다양한 이론을 선보였으나 칠죄종만큼 모두가 납득할만한 개념은 없었다.

하물며 제논 일대기가 그저 그런 소설이었다면 모를까, 세상에 끼치는 파급력이 어마어마하다보니 이목이 끌릴 수밖에 없다.

"헌데 정말로 소설에 나온 이야기를 차용해도 될지 모르겠다만... 이 저자가 신학에 대해 얼마나 소양이 깊은지 알 수 없잖소?"

물론 긍정적인 의견만 있는 게 아니라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다. 소설에 등장한 개념을 그대로 학문에 적용시키는 것이 옳은가? 라는 정론이었다.

실제로 그들의 의견은 일리가 있었지만...

"그럼 한스 대주교는 칠죄종만큼 확실한 개념을 제시할 수 있겠소?"

"...그건 아니오."

"우리도 한스 대주교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소. 실제로 이 저자는 성직자가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심도있는 연구를 한 건 분명하오. 그게 아니라면 칠죄종을 선보이지도 않았겠지."

거의 다 반박당했다.

제논 일대기의 영향력이 강한 것도 있지만 개념 자체가 워낙 신선했기에 본인들이 착각해버린 것이다. 제논 일대기의 저자는 경험이 많은만큼 신학에도 능통하다고.

여기에 더해서 사람들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나이 많은 현자로 추정하고 있다. 아이작처럼 20살도 되지 않은 새파란 애송이가 아니라.

아이작 입장에서는 전생에서 요긴하게 쓰이던 설정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나 이들에게는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설정이 신학을 뒤흔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칠죄종이라는 개념은 우리 루미너스 교단만 국한된 것이 아니오. 신학이라는 개념 자체에 적용시켜야 옳겠지."

"그럼 다른 교단과 합동 연구를 해야한다는 소리오?"

대주교 중 한 명이 얼굴을 찌푸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루미너스 교단은 세력이 가장 넓은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처럼 다른 교단을 싫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다른 교단과의 사이가 좋은 편이다. 루미너스 교단의 세력이 가장 큰 것이지, 다른 교단의 힘이 약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노인은 한 대주교가 불만을 표시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지금은 우리 교단에서만 연구하는 것이 좋겠소. 모라와 히르트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고 있으니."

"흠... 알겠소. 그러면 이 저자를 찾는 건 어떻게 할 생각이오?"

대주교는 제논 일대기의 작가, 아이작을 찾을거냐고 물었다. 그에 대주교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비록 착각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토록 제시하기 어려웠던 틀을 제시한 아이작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찾아서 칠죄종의 개념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된다. 신문에서 보았던 그의 건강 상태 때문이다.

"당장은 안 되오. 듣자하니 건강도 좋지 않다고 했으니 괜히 찾아갔다간 부담을 줄 수도 있소."

"아. 원고에 묻었다는 피 말이오? 단순히 코피라고 했잖소."

이번에 제시된 칠죄종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긴 했으나 사람들은 그보다 출판사가 알려준 아이작의 건강 상태를 걱정했다.

제출된 원고에는 피가 묻어있었는데 단순한 코피였으나 작가의 건강 상태가 우려된다고.

어찌 보면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제논 일대기의 작가이다보니 걱정할래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본디 예술가들은 자기 몸을 관리하지 않고 과로하는 게 일상이오. 사흘밤낮 그림을 그리거나 소설을 쓰다가 과로로 쓰러진 예술가들이 한 둘이 아니지."

"그렇소? 난 예술가가 아니라 잘 모르겠군."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자기 일에 몰두하다가 건강을 해치는 일이 허다하다. 밤낮이 바뀌는 건 물론이고 운동을 등한시하는 바람에 체력도 낮아진다.

아이작은 어디까지나 '취미'로 글을 쓰는 것이었기에 다소 자유로운 입장이었지만 최근에는 부담감 때문에 무리를 한 경향이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가족의 위로를 받아 나아진 편이다.

"아무튼 간에 칠죄종에 관한 이야기가 더 나오기 전까지는 학문을 재정립하는 것이 좋겠소. 작가와 직접 만나지 않는 이상 더 정확한 이론을 들을 수도 없을테니까."

"알겠소. 그런데 엘프의 반응은 어떤지 알고 있소? 교만의 죄가 엘프였으니 반응이 나올만도한데."

대주교의 물음에 토론을 지도하던 노인이 피식거리며 입을 열었다.

"당장 찾으려고 하겠지. 안 그래도 종족전쟁 당시 본인들의 교만 때문에 전쟁을 대차게 말아먹는데 그걸 콕 집었으니까."

*****

9권이 세상에 등장하고 칠죄종이니 뭐니 하면서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신학의 연구 진척도를 더욱 높였다니, 이토록 상세하게 구분한 적이 없다니 등등.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전생에 자주 쓰였던 칠죄종을 그대로 가져온 건데 황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이없는 건 출판사에서 내 건강 상태를 걱정하는 기사를 올렸다는 거다. 원고에 묻었던 코피를 보고 내 건강 상태가 심히 걱정스럽다나 뭐라나.

거기다 예술가들은 자기 몸을 해치면서까지 작품을 완성하려는 경향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다양한 가설들이 오고 갔지만 그 중 압권이었던 건 바로 내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독자들은 나를 나이 지긋하게 드신 현자로 추측하는 중인데, 그것과 맞물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다.

앞날이 창창한 17세를 시한부 인생으로 둔갑시킨 그들의 착각에 경탄할만한 했지만 지금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아이작.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왜 그래요? 저 정말 팔팔하다니까요."

나는 입 안에 든 음식을 목구멍 너머로 넘기면서 맞은편에 앉아있는 세실리를 바라봤다. 걱정과 불안이 한가득 담겨있는 세실리의 예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찌라시 아닌 찌라시가 나오고나서 세실리가 나를 걱정하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는 거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 때는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단 둘이 있게 된 지금은 아예 대놓고 물었다.

현재 우리 둘은 식당에서 학식을 먹는 중이었는데, 리나는 바쁘다는 이유로 먼저 떠났고 마리는 수업을 같이 듣지 않았다.

'진짜 의심하고 있나보네.'

지난 번에는 어디까지나 예상이었으나 현재 세실리의 반응을 보고나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제논 일대기의 저자로 추측하고 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 건강 상태를 우려하는 기사가 나오자마자 저런 질문을 하니 확신할 수밖에 없다. 나는 차마 걱정을 숨기지 못 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특유의 무뚝뚝한 음성으로 얘기했다.

"제 어디가 아파보인다는 거예요? 이렇게 멀쩡한데."

"그냥 혹시나 해서. 최근에 코피가 난 적이 있어?"

"없는데요."

아예 대놓고 묻지 그래. 나는 헛웃음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억눌렀다.

그래도 세실리처럼 아름다운 미녀가 손수 걱정해주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내 건강을 신경쓰고 있구나 생각해서 마음이 편해질 정도다.

다만 이 주제가 이어지는 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이에 나는 잠깐 식기를 내려놓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세실리 누나는 이번에 나온 9권은 읽어보셨어요? 이번에는 아예 대량으로 풀어서 그나마 낫다는데."

"물론 읽었지. 서점에 한 권만 남아있던 걸 내가 샀는걸? 아이작은?"

"전 누나가 사준 걸 읽었어요."

원래 제논 일대기는 신권이 나올 때마다 하루도 안 되어 매진당한다. 특히 지난 번에는 반나절도 안 되어 매진당하는 신기록(?)을 경신했다.

그리고 출판사도 그 부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대량으로 풀어버렸다. 듣자하니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다는데 그게 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덕분에 제논 일대기 9권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설령 그 날 모두 매진되었더라도 이틀 후에 다시 책들이 쌓이니 인내만 충분하다면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럼 칠죄종에 대한 것도 알겠네?"

세실리는 내 대답에 어두운 표정을 지우고 밝게 말했다. 역시 그녀는 밝은 표정이 잘 어울린다.

"당연히 알고 있죠."

"색욕을 담당하는 간부도 알고 있지?"

세실리가 붉은눈을 반짝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에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 행위 하나만으로도 은은한 색기가 흘러나와 분위기가 삽시간에 묘해졌다.

뒤이어 세실리는 매력적인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건강을 걱정해줬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그녀만의 고혹스러운 목소리였다.

"이름이 릴리스였지? 서큐버스의 후예이자 악마가 된 마족."

"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과 붉은 눈동자. 목소리에는 색기가 가득하다는 묘사가 있었지. 몸매도 육감적이고 말이야. 근데..."

세실리는 잠깐 말을 흐리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툭- 내뱉듯이 말했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 묘사를 볼 때마다 왠지 내가 떠오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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