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마이샬 남매와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난 이후였다. 아이작과 니콜이 먼저 자리를 떠나도 황족 남매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신 자리 배치는 약간 달라졌는데 본래 레오르트의 옆에 앉아있던 리나였으나 지금은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다. 니콜이 앉았던 그 자리 말이다.
리나는 맞은편 자리에 한가롭게 차를 마시는 레오르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자리잡혀있어 한폭의 모델 같은 모습이었다.
"오라버니."
"응?"
레오르트는 리나의 부름을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한 쪽 눈썹을 치켜뜬 채 왜 불렀냐는 표정이다.
리나는 이 방에 아무도 없겠다, 포커페이스 따위는 저 멀리 던져버리며 못 마땅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잔뜩 투덜거렸다.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어째서 사실을 그대로 알려준 거예요? 솔직히 그냥 숨겼어도 됐잖아요."
그녀의 말마따나 남매에게 이 정보를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도리어 알려주지 않고 꽁꽁 숨기는 편이 서로에게 윈윈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오르트는 그러지 않았다. 확인성을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지만 되려 의심만 한가득 품게 만들어버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리나조차 레오르트의 꿍꿍이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어요? 권위를 이용해 겁박하는 사람들로 보이겠죠. 이러다가 마이샬 경이 화나서 연재를 중단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아. 그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니콜이랑 아이작은 몰라도 마이샬 경은 우리 황실을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라서."
리나의 걱정과 달리 레오르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에 리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붉은 사자라며 명성이 자자했던 호크에 대해서는 들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그래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으나 자세한 건 모르고 있다.
하지만 레오르트는 자신보다 호크를 더 잘 알고 있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다음 대 차기 황제가 될 재목이라서 더 많은 사실이라도 아는 걸까.
리나가 그런 의문을 지니고 있을 때 레오르트는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한 입을 열었다.
"너는 마이샬 경이 일찍 은퇴한 이유를 알고 있어?"
"대충은요. 후유증 때문에 일찍 은퇴했다 들었어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PTSD라고, 죽음을 넘나드는 전선에 자주 나서는 군인들이 곧잘 겪는 후유증이다. 호크도 '대외적으로'는 그 후유증이 심각해진 탓에 일찍 은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아무리 드래곤을 때려잡았냐니, 국경을 침범하던 수인 세력을 모두 몰아내었느니 해도 결국 사람에 불과하다. 기사 생활을 하는동안 너무나도 많은 동료의 죽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데다가 본인의 손에 피도 묻혔으니 괴로워하는 게 정상이다.
하물며 너무 유명해졌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수많은 압박을 받았다. 때마침 평민 출신이겠다, 무례한 귀족들 몇몇이 호크를 압박하여 못 살게 굴기도했다.
황실에서도, 그리고 군부 내에서도 그의 은퇴를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호크는 한사코 거부했다. 실제로 증상이 완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한 번씩 신전에 방문했으니 그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다.
"너는 그렇게 알고 있겠지. 하지만 실상은 달라. 큰 사건이 하나 터졌었거든."
"사건이요?"
"그래. 마이샬 경이 국경지대에서 살던 수인을 모두 몰아냈다고 생각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지. 도망친 수인들 중에는 제국으로 스며들기도 했어."
"설마... 그 말은..."
레오르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챈 리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부디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결과가 아니기를 빌었다.
뒤이어 레오르트는 손을 살살 내저으며 리나의 불안을 잠재웠다.
"다행히 네가 우려하는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어. 미수에 그쳤거든. 어떤 한 수인이 마이샬 경의 부인을 급습했다가 도리어 역으로 당했어. 마이샬 경이 부탁해서 우리 황실측이 그녀의 곁에 호위기사를 붙였기 때문이지."
"그래서 은퇴한 거예요? 그때처럼 자신의 가족이 위험해질까봐?"
"맞아. 은퇴 당시 마이샬 경이 이렇게 말했어. 일신의 무력이 남들보다 강해도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내 예상이지만 아마 아스카날 당시 친우를 잃었을 때부터 회의감을 느낀 것 같아."
레오르트는 리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리나는 처음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후유증 때문에 본인의 공적을 알리는 걸 자제하는 줄 알았는데 저런 내막이 숨겨져 있다니. 두 남매가 호크의 업적을 잘 모르는 이유가 있었다.
자기가 너무 유명해지면 그 반대급부로 애꿎은 가족을 노리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날테니까. 실제로 그 일을 한 번 겪었으니 방지 차원에서 업적을 알리는 걸 꺼려했을 것이다.
아스카날 사건에서도 호크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건 아마 황실에서 조치를 취한 것일터. 귀족과 군부 내에서 호크는 그야말로 '영웅'의 이름이었으니 윗선에서도 기꺼이 부탁을 들어줬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윗쪽에서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가던 호크의 입지를 약간이나마 줄일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윈윈이었을 것이다.
"...잠깐만요."
리나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머지않아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호크가 그런 이유 때문에 모든 명예와 명성을 뿌리치고 은퇴한 것이라면, 더 하지 말았어야하지 않았나.
그의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도 있는데 레오르트가 남매에게 한 행동은 호크를 심기를 거슬리게 만드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거라면 더 하지 말았어야죠. 안 그래도 후유증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
"아까도 말했지만 마이샬 경은 우리 황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야. 본인은 그냥 생색낸다고 귀찮아할걸? 어쩌면 이야기나 좀 하자고 저택에 초청할 수도 있겠지."
공작이나 후작도 아니고 일개 남작가가 황족을 초대한다는 게 말이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호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평민이 귀족의 신분을 받는 것조차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하는데 심지어 호크는 백작의 작위까지 받을 뻔했다. 신분만 낮지 위상은 결코 고위급 귀족에 뒤지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다.
리나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레오르트는 무언가 거슬리는 게 있는 듯, 턱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그래도 조금 미심쩍은 부분은 있어."
"그게 뭐죠?"
"잡아떼면 그만인데 니콜이 순순히 인정했다는 걸까? 뭔가 마이샬 경을 방패로 삼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내가 아는 그녀라면 절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거라서."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겠죠. 두 사람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의심할 걸요?"
"부정할 수 없다는 게 마음아프네."
레오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작과 니콜을 불러 자리를 마련한 것도 제 딴에는 확실한 확인을 위해서다.
그러나 위치가 위치이다보니 두 남매에게는 협박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황족이나 되는 사람들이 따로 부르면 이 놈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 거지? 라며 잔뜩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레오르트는 다소 아쉽다는 뉘앙스로 본인의 심정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근차근 접근하는 건데 조금 성급했나 싶어. 흥분을 좀처럼 자제할 수 없었다는 게 뼈아프네. 다른 것도 아니고 제논 일대기라서."
"그것도 있지만... 오라버니는 정말로 마이샬 경이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고 생각하시나요?"
레오르트가 아쉬운 소리를 하자 리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레오르트는 반신반의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한 쪽 눈을 치켜뜨며 되려 의문을 드러냈다.
"당연하지. 그가 아니면 대체 누구라고?"
"...아니에요."
확신하는 레오르트의 말에 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흠?"
레오르트는 그녀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황족 남매와 이야기가 끝나고 니콜과 함께 바깥으로 나온 뒤였다. 우리 남매는 후식을 먹을 겸 적당한 카페에 들어서서 방을 잡아 서로를 마주보며 앉았다.
혹시 몰라 방음이 확실하게 되는 방을 잡는 건 당연했다. 조금 비싸긴 해도 둘이서 단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연중할까?"
"... ..."
내가 꺼낸 한 마디에 니콜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황금색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진 것이 꽤나 놀란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이내 착잡하게 변했는데, 아무래도 나를 안쓰럽게 생각한 모양이다. 그동안 나는 주문한 커피를 티스푼으로 휘적거리며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아버지를 방패로 삼을 필요가 있나 싶어. 그냥 마음편히 밝히면 안 될까? 어차피 다 들통난 마당에 숨길 필요도 없잖아."
"아이작.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돼. 레오르트 님이 솔직하지 못 하셔서 그렇지, 황실에서도 딱히 터치하지 않을거야."
왠지 레오르트를 변호하는 듯한 말에 고개를 슬쩍 들어올렸다. 니콜은 여전히 안쓰럽다는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에 나는 어째서냐는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누나는 레오르트 님을 잘 알고 있어?"
"어느 정도는. 그 분은 자기 본심을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어. 나도 딱 한 번 봤고."
"언제?"
"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내 기습 질문에 니콜이 대답을 회피했다. 그 반응에 약간 의심이 들었으나 그녀의 말마따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 가볍게 넘겼다.
"아무튼 레오르트는 님은 정말로 확인을 위해 자리를 마련한 가능성이 커. 솔직하지 못 하신만큼 행동으로 드러내는 편이거든. 무엇보다 레오르트 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잖아? 자기들쪽에서 압박하다가 연재를 중지한다면 욕을 먹는 건 자기들이라고. 사실상 서로에게 무기가 있는거야."
"제논 일대기의 인기가 떨어지면 우리 쪽이 더 안 좋은 거 아니야?"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래도 아니야. 인기가 떨어진다면 우리에게 향하는 관심도 줄어들겠지. 정 못 믿겠으면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아버지도 기꺼이 너를 위해 도와줄 걸?"
너무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니콜은 내가 침울해할까봐 어떻게든 위로를 해주는 거라고.
덕분에 기운을 약간이나마 되찾을 수 있으나 마음이 싱숭생숭한 건 여전했다. 나 하나 잘 살겠다고 가족이 고생하는 게 과연 옳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귀족들은 자기가 손해를 보는 걸 정말로 싫어해. 특히 손해 하나 하나가 치명적인 고위급 귀족이라면 더더욱. 그러니 황실에서도 너를 직접적으로 터치하는 일은 없을거야. 이건 정말이야."
"...그래?"
"응. 어쩌면 황실에서 추적하기 힘들도록 도와줄 수도 있어. 너에게 든든한 뒷배가 생기는 셈이지."
니콜의 말을 듣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어 사정을 설명하는 건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나 저래나 오늘따라 기력이 쪽- 쪽- 빨리니 힘이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 집필은 생략해야할 듯싶다.
"...아이작."
"응."
"너무 힘들면 의무적으로 연재할 필요는 없어. 글은 네가 좋아서 쓰는거니까. 너는 잘 모르겠지만 취미가 의무로 변하는 순간 열정이 식어버리거든. 누나는 그 열정이 식을까봐 걱정 돼."
니콜이 진심이 담긴 이야기를 꺼내자 나는 고개를 슬며시 들어올렸다. 걱정과 우려가 한데 섞여있는 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뒤이어 그녀는 손을 천천히 뻗더니 내 오른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오랜 세월동안 검을 쥐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살결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 누나는 네가 처음으로 글을 보여줬을 때가 기억나. 이거 한 번 보라며, 자기가 쓴 글이라며 기대된다는 눈빛으로 원고를 줬었지. 내가 진짜 재미있다고 했을 때 네 표정이 어땠는지 아니? 세상을 전부 다 가진 듯한 표정이었어. 그때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 네 얼굴을 봤었지."
"... ..."
"그런데 지금은 그 웃음이 점점 없어지는 게 눈에 보이더라. 세상이 네 글을 사랑하면 사랑할 수록 네 어깨에 얹어지는 부담감이 너를 짓누르는 거겠지. 그리고 누나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들은 그 부담을 덜어주고 싶어해."
아카데미에 향하기 전, 아버지가 내 중지 손가락에 난 펜혹을 어루만져주시며 말했었다.
아빠는 네가 자랑스럽다고.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스스로 얻어낸 명예라며, 자부심을 가지라고.
니콜의 진심어린 위로는 그때와 비슷한 감정이 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원망할 필요는 없어. 정말로 안 되겠다 싶으면 네 말대로 한동안 휴식하면 돼. 너에게 소설이란 행복한 취미지, 고통스러운 의무가 절대 아니니까. 알겠니?"
"...알았어."
속이 조금나마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가족이라서 그럴까, 현재 내 느끼고 있는 심정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다.
덕분에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가족이라는 존재는 나에게 그 무엇보다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니콜의 말대로 소설을 의무적으로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에 더 쓰고 싶었다.
내가 명예와 명성을 위해서 글을 쓴 것도 아니고, 단지 취미로 쓴 것에 불과했다. 어느순간부터 인기가 미친듯이 치솟아져서 연재에 대한 부담감이 생겼을 뿐이지.
나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니콜을 바라봤다. 니콜도 내 표정을 보고 안심이 되었는지 전보다 표정이 풀어진 모습이었다.
"그럼 10권까지만 빠르게 쓰고..."
확실히 여유가 사라지니까 무언가 쫒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한 니콜의 위로를 듣고 굳게 결심할 수 있었다.
"3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휴재해야겠다."
나도 이제 슬슬 여유를 가져야겠다고. 부담감을 지울 겸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적당한 시간이다.
니콜은 내 결심을 듣자마자 몸을 흠칫거리더니 이윽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래. 네가 그렇다면 뭐..."
대답과 달리 아쉬움이 듬뿍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