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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42화 (43/763)

< 42화 >

아이라가 조에서 탈주한 이후로 조별 과제는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만큼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원래 미꾸라지가 물을 흐리는 법이라고, 그 미꾸라지가 사라지니 흐려졌던 물 또한 자연스레 깨끗해졌다.

늘 말했지만 과제 자체는 나 혼자 해도 충분했으나 이건 엄연히 조별 과제였기에 열심히 임해줬다. 벤자민과 레오나가 그럴듯한 가설을 내놓는다면 내가 반박하거나 살을 붙여줬다.

덕분에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 물론 나는 그들이 정리한 가설에 살만 붙여줬기에 스스로 발표를 담당했다.

"근데 넌 제논 일대기 재미없다고 하지 않았어? 보니까 심도있게 읽은 것 같던데?"

"다, 닥쳐! 단지 다음 내용이 궁금했을 뿐이야!"

벤자민이 자리를 비웠을 때는 레오나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가 말만 저렇게 하지 제논 일대기를 즐겁게 읽는 독자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흥분할 때마다 머리 위에서 움찔거리는 귀가 약간 거슬리긴 했지만 레오나는 나랑 있을 때만 본모습을 보이니 큰 문제는 없었다.

"정말로 발표 잘할 수 있겠냐? 힘들다면 내가 해줄 수도 있는데."

잠깐 흥분을 가라앉힌 레오나가 특유의 시니컬한 음색으로 나에게 물었다. 팔짱을 끼며 새침하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 속에는 걱정과 우려가 섞여있었다.

나를 믿지 못 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발표까지 담당하게 되어서 미안한 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레오나 성격상 후자로 추정된다.

"잘할 수 있어. 한 번 믿어봐. 아니면 네가 해볼래?"

"됐어. 내일이 발표날인데 지금 뭘 하겠다고. 아무튼 난 간다. 내일 보자."

"그래. 내일 봐."

레오나가 손을 흔들며 떠나가자 나 또한 손을 흔들며 배웅해줬다. 방금 전까지 나와 레오나가 있던 곳은 인적이 드문 장소라서 원없이 대화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나는 레오나의 모습이 사라진 걸 보고 걸음을 옮겼다. 최종점검도 했겠다, 남는 시간에는 편히 쉬면서 글이나 쓸 예정이다.

'빨리 3학년이 됐으면 좋겠네. 그때라면 시간도 널널할테니까."

숙소로 돌아오고 침대로 몸을 던지면서 미래를 생각한다. 첫 수업당시 비루스 교수가 설명했던 것처럼 2학년까지는 특정 점수 이상을 받아야 다음 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다.

하지만 3학년이 되어서는 자기가 집중하고 싶은 전공을 선택하고 그 전공만 집중적으로 파고들면 끝이다. 지난 주 월요일에 비루스 교수를 따로 찾아가 아이라의 실태를 고발했을 때 겸사겸사 알게 된 정보다.

2학년까지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합쳤다면, 3학년부터는 한 과목만 파는 대학생이다. 학점 그딴 거 다 필요없고 오로지 그 전공만 집중적으로 파서 좋은 점수를 얻는 방식.

'나는 뭐...'

당연히 역사학이 목표다. 이 세상에서 역사만큼 흥미가 가는 전공도 없다.

어서 빨리 3학년이 되어 제논 일대기를 빠르게 집필하고 차기작도 쓰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는 판타지로 취급받을 현대물을.

그대신 비극적인 전쟁사를 다루는거라 제논 일대기처럼 영웅적인 행적은 없을 예정이다.

'아냐. 아냐. 차기작을 생각하기보다는 지금은 제논 일대기에 집중하자.'

괜히 한 번 손 대었다간은 자칫하다가 문어발이 될 수도 있다. 그랬다간 작품의 질도 떨어질 우려가 있으니 당장은 제논 일대기에 몰두하는 편이 이롭다.

물론 완결까지 2권까지 남으면 천천히 설정을 정립할 계획이다. 그때라면 괜찮겠지.

'...이런 생각을 할 때 써야지.'

이렇게 빈둥빈둥거리는 시간조차 아깝다. 최근에는 아이라의 문제도 그렇고 신경써야할 부분들이 한 두 곳이 아니어서 조금 피곤했으나 참을만하다.

무엇보다 지금 눈을 붙였다간 내일 아침에 일어날 것 같다. 최소한 한 파트는 마무리하고 자는 게 좋지 않을까.

그에 노곤한 몸을 이끌며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숙소 밖으로 나가기 직전까지 집필하다 말았던 원고지가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그 사람들은 괜찮게 하고 있을까?'

마법필에 마나를 주입시키다가 문득 대환장 파티가 떠올랐다. 첫 날은 나름 좋아 보였으나 시간이 가면 갈 수록 균열이 일어나는 게 똑똑히 보였다.

언제나 여유만만한 표정을 짓던 리나는 무표정으로 변했고 나를 볼 때마다 밝았던 세실리의 표정 또한 급격히 어두워졌다. 마리야 뭐, 반쯤 포기했는지 가끔 가다 실소를 흘렸고.

무엇보다 그 중 가장 압권이었던 사람은 단연코 잭슨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든 연을 맺기 위해 질척거리던 잭슨이 점점 그들을 껄그러워하는 중이다.

더 나아가 간혹 나를 향해 부럽다는(!) 눈길을 보내더라. 대충 얼마나 심각한지 예측할 수 있다.

아무래도 조별 과제를 하면서 크게 데인 것이 아닐까. 애초에 물과 기름처럼 섞일래야 섞일 수 없는 조합이다.

'조금 불쌍하긴 하네. 우리는 한 명만...'

주륵-

생각을 하다 말고 코에서 액체가 흘렀다.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인중에 손을 갖자 대었다. 살짝 끈적한 느낌이 들었다.

이에 설마하는 심정으로 손을 떼니 새빨간 피가 손에 묻어나왔다. 코피였다.

오늘따라 노곤하다했더니 기어코 몸에서 경고를 보낸 듯했다.

뚝- 뚝-

손에 묻은 코피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때 원고지에 피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다급히 원고지를 치워버렸다.

다행히 중앙 부분이 아닌 가장자리에 묻어있어 원고를 다시 쓰는 대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그래도 어서 빨리 코를 막을 필요가 있다.

"휴, 휴지..."

아무래도 오늘 하루 집필은 쉬어야 할 듯했다.

*****

시간이 흘러 발표 당일날이 되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조별 과제의 끝이 다가왔다는 의미다.

"야. 너희 설마 다 준비했어?"

"다 했는데."

"흥. 그래? 알았어. 난 조장이니까 네가 사과한다면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

"좆까."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 아이라가 불쑥 찾아와 뻔뻔하게 굴었지만 다시 한 번 욕을 강하게 박아줬다.

내가 욕을 하자 옆에 앉은 마리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자기 혼자 밥상을 뒤엎은 주제에 어디서 남의 밥상에 숟가락을 올리려고. 아이라의 상상을 초월한 뻔뻔함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욕을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너...! 너 진짜 두고봐! 진짜 아빠한테 편지 보낼거니까!"

"마음대로 해."

아무튼 그 후로 아이라는 후회할 거라는 말만 남겨둔 채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짧은 두 다리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글러먹어야 저런 식으로 나올 수 있는 걸까. 다른 의미로 잭슨보다 더 대단한 여자다.

"너 쟤랑 싸웠어?"

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옆자리의 마리가 질문을 꺼냈다. 그 질문 속에 의문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이에 나는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뻔뻔함에 화가 치솟았다.

"싸웠지. 쟤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거든."

"뭘 어떻게 말했길래?"

"몇 주 전에 우리 형이 네이비 기사단에 입단했어. 그리고 쟤는 마티우스 후작가의 딸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대충 알 것 같네."

내가 거기까지 말해도 마리는 이해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기야 워낙 유명한 가문이니 마리가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다.

나는 그녀가 끄덕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혹시나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도 아이라처럼 군인을 천대하는 건지 걱정이 되었다.

"마리. 넌 군인을 어떻게 생각해?"

"응? 그건 왜?"

"내가 아이라랑 싸운 이유가 내 형제 문제도 있지만 군인을 집 지키는 개 정도로 취급했거든. 설마 모든 귀족이 그런 건가 싶어서."

물론 마리가 그런 마인드를 가졌을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리 개인이 아닌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렇게 생각할까봐 우려가 되었다.

당장 군사 가문의 딸이 저런 막말을 할 정도인데 다른 귀족들은 어떨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그리고 마리는 눈쌀을 와락 찌푸리며 진심이냐는 투로 얘기했다.

"...미쳤어? 그런 말을 했다간 강제로 입대시킬텐데?"

"강제로 입대시킨다고?"

"응. 우리 귀족들 사이에 유명한 벌들 중 하나야. 귀족의 자식이 군인을 모독하면 그 부모가 강제로 병사로 입대시켜. 한 달을 못 버티고 질질 짜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2년 동안 의무적으로 복무해야하지. 법으로 규정된 거라 귀족이라 해도 의미가 없어."

그거 참 신박하면서도 효과적인 벌이네. 군필이라면 마리가 언급한 벌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집이라는 보금자리가 얼마나 따스한지, 가족과 사회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마지막으로 군대가 얼마나 좆 같은 곳인지 처절하게 알게 될테니까.

또한 이 세상은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도 없어서 부조리가 장난 아니게 많을 것이다. 온실 속 화초로 자란 귀족가 자식들에게는 이만큼 효율적인 벌도 없다.

"자식이 아니라 그 부모가 군인을 모욕한다면 어떻게 돼?"

"그런 경우는 거의 없기는한데 아마 좋은 꼴은 못 보겠지. 그리고 정말 마티우스 가문의 딸이 군인을 모욕했다면 그 파장이 어마어마할 거야. 일단 입대는 확정이고 최악의 경우 가문에서 쫒겨날 수도 있어."

입대라... 그거 참 재미있을 것 같다. 조만간 아이라도 훈련소 두 번째 날 심정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까.

나는 어서 빨리 그 순간이 오기를 좋겠다며 키득거렸다. 한 번 고생해봐야 정신차리겠지.

"아무튼 너네 조는 다 준비했어?"

내가 실실 웃는 동안 마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듣고 살살 눈치를 보는 마리에게 답했다.

"모두 끝냈지. 너희들은?"

"...굳이 대답할 필요를 못 느끼겠는데?"

허탈하다는 듯이 웃는 걸 보아 예상대로 시원하게 말아먹은 모양이다.

그래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했다.

"일단 참여는 했어?"

"참여만 했지, 실질적으로 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냥 모여서 수다만 떨다가 끝났거든. 그것도 딱 두 번이었고."

"그럼 자료 조사랑 발표는?"

"넌 누가 다 했을거라 생각해? 참고로 난 아무것도 안 했다?"

"... ..."

마리가 역으로 묻자 도리어 할 말이 없어졌다.

어쩐지 잭슨의 표정이 어둡더라니 그때문이었구나. 나는 왠지 공감되는지라 동정심이 일었다.

"사실 조 배정이 그딴 식으로 된 순간부터 포기했어. 점수가 좀 뼈아프긴 하겠지만 심하지는 않을테니까. 정 안 되면 다른 전공에 집중해야지."

"전공이라... 넌 3학년이 되면 무슨 전공에 들 거야?"

갑자기 궁금해져서 묻게 되었다. 나는 역사학이라는 확실한 전공을 택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물론 1학기조차 끝나지 않은 지금 묻기에는 조금 이르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염두에 둔 건 있지 않을까.

마리는 내 질문을 듣고 턱을 괴며 곰곰이 떠올리다가 조용히 말했다.

"전공이라... 글쎄? 마음 같아서는 정치학에 들어가고 싶지만 리나가 있을테니 패스. 지금으로서는 딱히 생각나는 건 없어. 난 졸업만 하면 그만이거든. 너는?"

"난 당연히 역사학."

내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하자 리나가 별 해괴한 걸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사가 그렇게도 재밌어? 이해할 수가 없네."

"넌 그러겠지만 난 아니야. 역사가 얼마나 재미있는데?"

"알았어. 알았어. 이러니까 역사에 빠삭한 거겠지. 아예 책을 쓰지 그래? 너 저번에 엘레나 교수님한테도 글 잘 쓴다고 칭찬받았잖아."

"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한 방에 잠깐 말이 멈추었다. 본인 딴에는 농담삼아 말한 거겠지만 당사자에게는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리는 내 얼굴을 관찰하다가 기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그 표정은? 진짜 쓰고 있어?"

"아니?"

"흐음..."

내가 부정하자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마리의 시선은 정확하게 펜혹이 자리잡혀있는 오른손을 향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손을 숨길 뻔했지만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간신히 억눌렀다. 마리도 이이상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인지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뭐... 네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겠지. 그래도 진짜로 책 쓰면 좀 보여주라. 궁금하긴하네."

"안 쓴다니까 그러네."

"누가 뭐래니? 아, 물론 내가 아빠한테 부탁해서 후원 정도는 해줄 수 있어."

"아. 좀."

내가 그만하라는 듯이 투덜거려도 마리는 키득키득 웃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진담이 아니라 장난으로 한 말인 듯했다.

하지만 간담이 서늘한 건 마찬가지였다.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훅 치고 들어오니 대응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언제까지 마음 졸이면서 생활해야하지?'

마음 같아서는 확 밝히고 싶지만 후폭풍이 무서웠다. 거기다 내 정체를 숨기기 위해 고생 중인 아버지를 봐서라도 인내해야한다.

아무튼 간에 수업이 시작되고 조별 과제의 꽃인 발표가 시작되었다. 내 예상대로 마리 조의 발표자는 잭슨이었으며 피곤에 쩔어든 모습으로 나타나 측은함을 불러일으켰다.

'너도 참 고생이다.'

아마 이후로 집적대는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나는 힘없이 자리로 돌아가는 그를 짠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런 내 시선이라도 느낀 걸까. 나와 시선이 마주친 잭슨도 헛웃음을 흘릴 뿐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여차저차 모든 발표가 끝나고 인문학 수업이 종료되었고, 다른 수업도 별 일없이 평범하게 진행되었다.

이후로 모든 수업이 끝난 후에는 조원들과 함께 식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음?"

숙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 바닥에 웬 편지 봉투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슬쩍 집어드니 집에서 온 편지였다. 최근 부모님에게 발송했던 우편이 없었는지라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시지?'

이에 나는 침대에 앉아 봉투를 뜯어내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그 편지의 정체는...

[꼬리가 밟혔다. 당분간 조심하거라.]

아버지의 필체로 쓰여진 경고문이었다.

"... ..."

나는 그 경고문을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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