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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41화 (42/763)

< 41화 >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 건드려서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가족이다.

어지간한 대인배도 가족을 건드리게 되면 화를 내는데 그럼에도 참는다? 그 사람은 대인배가 아니라 그냥 호구다.

거기다 나는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가 좀 강한 사람이다. 전생에서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셔서 순식간에 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도 없어서 가족 간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단절되었다.

물론 아이라가 내가 환생자라는 걸 알리는 없겠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최소한의 개념이 있다면 저딴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도 군사 가문의 딸이라는 사람이.

"...뭐, 뭐? 너 지금 뭐라고..."

내 입에서 터져나온 시원한 욕설 한 방에 아이라가 말을 더듬거렸다. 눈을 화등잔만하게 떠지고 입 또한 벌어진 것이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나는 아이라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가는 모습을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모두 알다시피 나는 웬만해서 욕을 잘 안 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이라는 내 입에서 걸쭉한 욕설일 나오게 만들었다. 모임 당시 잭슨은 어이가 없어서 황당한 마음에 나온 거라면 지금은 화가 나서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는 차이가 있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하는 아이라를 정확히 직시하며 하고픈 말을 꺼냈다.

"왜? 못 들었어? 쌍년이라고 다시 해줄까?"

"너, 너...! 감히 네 까짓 게...! 내가 좋게 봐주니까 만만해보여?!"

아이라는 나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격노했다. 얼굴이 실시간으로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걸 보아 그녀도 정말 화가 난 모양이다.

허나 그녀보다 더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다. 아이라는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을 건드렸다.

나는 활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삭히면서 입을 열었다.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려 했으나 목소리만큼은 낮게 깔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좋게 봐줬다고? 개소리도 작작해야 개소리지. 네가 하는 말은 그냥 지랄하는 것밖에 안 돼.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고, 그것도 안 되니까 가족을 들먹여? 그것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국경에서 일하는 군인을?"

"겨, 겨우 그런 걸로 심한 욕을 한 게 더 큰 잘못이지! 그리고 지휘관이 아닌 기사나 병사들은 단지 집 지키는 개에 불과하다고! 어째서 편한 일을 놔두고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군인이 되려는 건데? 오히려 그 부분이 더 이해가 안 되잖아?"

"와... 진짜..."

씨발. 감탄만 나오네. 대한민국에서 듣던 걸 환생한 이후에도 듣게 된다니.

도대체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군사 가문의 딸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정도면 분명히 심각한 수준일 게 뻔하다. 아니면 집은 멀쩡한데 본인 성격이 글러먹어서 이상하게 받아 들였다던가.

나는 씩씩거리는 아이라를 보면서 숨을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쉬었다.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너 진짜 마티우스 후작가 영애가 맞아? 국경을 담당하는 변경백의 딸?"

"내가 거짓말을 왜 하겠어? 귀족 사칭은 범죄인 거 몰라? 멍청하기는..."

"멍청한 건 군인을 모욕한 너를 말하는 거고, 군사 가문의 딸이 군인을 모욕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참 재미있겠다. 그치?"

전생으로 치자면 4성 장군의 딸이 휘화 군인을 싸잡아 모욕한 격이다. 당연히 그 얘기가 군인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신뢰가 흔들리다 못해 박살 날 공산이 크다.

"그게 뭐 어때서? 어차피 다 내 밑에 있는 사람인데?"

"부모님이나 형제자매가 부하들을 아끼라고 알려주지 않던?"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밑의 사람들을 잘 통솔해야 한다고만 배웠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하..."

저러니까 인식이 씹창나지. 나는 그녀가 꺼낸 말을 듣고 답이 없음을 깨달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현재 아이라의 사고방식은 매우 심각했다.

후작 가문으로 태어나 자연스레 깔려 있는 선민사상과 그녀가 말했듯이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방법. 이 두 가지가 정말 아름다운 시너지를 이루었다.

여기에 더해서 17살이라는 나이까지. 스스로 조장을 역할을 맡은 이유도 본인이 잘 컨트롤할 거라고 굳게 믿은 것으로 보였다.

"...내가 충고 하나 해줄게. 너 계속 그러다가 언젠가 더 심할 일을 당할거야."

"그딴 말을 믿으라고? 네가 뭐라고?"

내가 진심어린 충고를 해줘도 아이라는 불신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상관 살해'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다.

더군다나 전선이나 국경 같이 위험한 장소는 상관 살해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대부분 지휘관이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았다가 역으로 부하들에게 목이 따이는 경우다.

과연 아이라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목숨이 왔다 갔다하는 사지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저런 막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어떻게 하면 저 철없는 꼬맹이를 참교육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말로 하는 건 포기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 간에 아이라는 절대 듣지 않을 것이다.

"믿기 싫으면 안 믿어도 돼. 노파심에 묻는데 설마 나중에 군 지휘관이 될 생각은 아니지?"

"당연한 거 아니야? 나는 마티우스 후작의 딸이라고. 아카데미의 군사학을 모두 이수하고나면 지휘관으로 임관하게 될 거야."

"그래? 축하해. 그 때는 지금 내가 너한테 욕을 박는 것보다 몇 배는 심할 거야."

마음 같아서는 그보다 더 심한 일을 당할 거라고 빈정거리고 싶다. 하지만 그건 선을 넘는 행위였기에 꾹 인내했다.

비록 그녀가 가족을 건드렸다지만 괜스레 건덕지를 줬다가 또 어떤 지랄을 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너 진짜...! 뭘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넌 이제 끝났어. 지금 당장 우리 아빠한테 이를 거야! 알겠어?!"

아이라는 내 직설적인 말에 발끈했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그에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말하던가 말던가. 아무튼 과제에 참여할 생각은 없지?"

"누가 너 따위랑 같이 한데?! 교수들한테 관심 받는다고 스스로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건 널 말하는 게 아닐까? 네가 뭐라고 우리보고 이래라 저래라야? 그리고 후작의 딸? 내 주위에는 너보다 훨씬 높은 사람도 있어."

누구인지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랑 친하다고한들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익...!"

아이라는 내가 팩트로 후둘겨패주자 이를 악 깨물며 부들부들 거렸다. 열불이 나는지 얼굴도 눈에 띌 정도로 붉어졌다.

뒤이어 그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는지 버럭 소리쳤다. 그래봤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됐어!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으니까 다 필요 없어! 제논 일대기의 전개를 예상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조장은? 설마 혼자서 조장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네가 하던 평민 두 명이 하던 알아서 해! 짜증나 죽겠어 정말!"

아이라는 자기 혼자 역정을 내다가 등을 홱- 돌려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작디작은 주먹을 꽉 쥔 걸 보아 화가 단단히 난 것 같다.

이대로 상황이 끝난 건가 싶어 착잡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아이라가 제자리에 서서 나를 홱 돌아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악에 받친 소리로 외쳤다.

"너 진짜 큰일난 거 알지?! 우리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 '철혈'이라고 철혈!"

"모르니까 어서 가기나 해. 시끄러워 죽겠네."

"씨이...! 나쁜 놈...!"

내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적거리자 아이라가 도망치듯이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한바탕 폭풍이 스쳐지나간 듯한 기분에 뒷목을 매만졌다.

솔직히 가족을 건드린 건 예상치 못 했으나 어느 정도 예견된 상황이긴했다. 급발진을 했을뿐이지.

'교수님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부디 비루스 교수에게 융퉁성이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단순한 불화 정도면 모를까 이건 아이라가 선을 넘었기에 발발한 사태다.

'정말 다른 귀족들도 아이라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군인은 결코 천대받아서 안 되는 직업이다. 나라의 자유를 위해 본인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는 영웅들이다.

전생의 대한민국조차 군인에 대한 위상은 낮을지언정 아이라처럼 대놓고 모욕한다면 사회적으로 뭇매를 맞는다. 군인을 영웅 수준으로 대우받는 미국에서는 아예 매장당하는 수준이고.

게다가 미네르바 제국은 영토가 워낙 넓어서 타국보다 군인의 전사 비율이 높은 편이다. 그래서 군인에 대한 위상도 따라 높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저딴 말을 지껄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전쟁을 쉽게 보는 건가?'

전선에 나서는 군인들이 어떤 상황에 직면하는지 몰라서 저러는 것일 수도 있다. 본인은 직접 겪어본 적이 없으니 저리 말하는 거겠지.

실제로 종종 발생하는 현상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낭만'을 꿈꾸며 입대한 청년들이 참호전이라는 생지옥을 경험했다. 1900년대가 그랬는데 중세는 어땠을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멀리 가지 않아도 '붉은 사자'라며 명성이 높았던 우리 아버지조차 한때 술을 마시지 못하면 잠을 못 이루셨다. 이건 지난번에 니콜이 알려줬던 이야기다.

'전쟁이라...'

제논 일대기에도 전쟁 파트가 있다. 본래는 제논의 영웅적인 활약을 보여주는 장면이 될 예정이었나 아이라를 보고 나서 약간 고민되었다.

내가 쓴 묘사 때문에 사람들이 전쟁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을까? 이런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제논 일대기는 사람이 아니라 악마가 주적이다. 악마와의 전쟁은 몰라도 같은 사람끼리의 전쟁은 없을 예정이다.

'...이건 차기작에 반드시 묘사해야겠다.'

제논 일대기가 의도치 않은 히트를 치면서 계획이 틀어졌긴 했지만, 본래 차기작은 따로 구상해놓았다.

판타지 세상에서 판타지물을 쓰면 평범한 소설이지만 현대물을 쓰면 판타지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나온 작품이다.

제논 일대기가 완결되기 직전부터 슬금슬금 집필할 예정이다. 대략 1년 뒤부터 쓰지 않을까.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우리끼리라도 해?"

내가 잠깐 상념에 잠겨있는 동안 레오나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에 정신을 차리고 레오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팔짱을 끼며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나는 머쓱함에 뒷목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 솔직히 너도 좋지 않아?"

"좋긴 한데 좋은 점수를 받긴 힘들잖아. 그걸 덮기 위해서 어떻게든 발표를 잘해야 하는 데 자신 있어?"

레오나의 우려 섞인 질문에 나는 피식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물론이지."

내가 작가인데 그것도 못할까 봐.

레오나는 내 시원시원한 대답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길게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는 것 같다.

"자신만만하네? 어디 한 번 지켜보겠어."

"설마 너도 업히려고?"

"난 저 새끼처럼 양심을 팔아먹진 않아. 아, 그나저나..."

그녀는 능청스레 말하다 말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마치 관찰하는 듯한 시선에 고개를 갸우뚱거렸을 때 쯤, 레오나의 무겁게 닫혀있던 입이 열렸다.

"...너 성이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했었지?"

"응."

"혹시 아버지의 별칭이 '붉은 사자'야?"

우리 아버지가 꽤 유명하시긴 유명한 모양이다. 수인인 레오나가 알 정도면.

나는 그녀의 질문에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오나의 표정이 약간 묘해더니 들릴 듯 말 듯한 크기로 중얼거렸다.

"사자 밑에서 나온 펭귄이라... 호부견자라더니 세상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뭐라고?"

"아무 것도 아냐. 그런데 벤자민 이 녀석은 언제 오는 거야?"

"저 왔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레오나가 언급하자마자 벤자민이 돌아왔다. 팔을 붕붕 흔들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흡사 강아지 같았다.

이어서 벤자민은 화장실을 갔다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밖에 없는 걸 확인하고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이라 님은 아직 안 오셨어?"

"왔긴 왔는데, 다시 갔어. 앞으로 우리랑 같이 안 할 거야."

"뭐?!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일 있었어?"

"있었으니까 그렇지. 그래도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해줄게."

그 후로 조별과제는 무난하게 진행되었고.

"...해서 우리 3명만 토론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군인을, 그것도 국경에서 근무하는 형제를 건드리니 저도 참을 수 없어서요."

"음... 알겠습니다. 원래라면 전원 다 감점을 시켜야 평등하겠지만 이번 일은 특수한 경우이니 아이라 학생만 감점을 매기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다음 주 월요일에 비루스 교수를 따로 찾아가 아이라에게 아주 큰 엿을 먹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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