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비록 첫 시작이 삐끗거렸지만 진행 자체는 무난했다. 조별 과제의 주제가 나에게 안성맞춤인 부분도 있고, 아이라와 갈등을 벌였던 레오나도 이후로는 군말없이 따라줬다.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질 뻔했던 벤자민는 레오나에게서 책을 받음으로서 과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토론은 금요일의 모든 수업이 끝난 저녁부터 진행되었다.
"아, 아이라 씨는 언제 올까?"
"나도 몰라. 언젠가는 오겠지."
금요일 당일이 되어 약속 장소로 잡았던 식당 앞.
나와 벤자민은 도통 모습을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는 아이라의 행방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의 서 있는 레오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나 원래부터 딱딱했던 표정이 더욱더 굳어졌다.
여기는 스마트폰은커녕 전화기조차 없으니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답답할 따름이었다.
"분명 군사학 강의에서 본인이 모이라고 말했는데..."
벤자민의 의문처럼 우리 조원은 전부 다 군사학 강의를 듣는다. 그래서 강의가 모두 끝난 뒤에 아이라가 우리 모두를 불러놓고 약속 시간까지 반드시 모이라고 강조했다.
심지어 약속 시각에 늦으면 경고를 하겠다고 언질까지 했는데 정작 본인이 약속 시간을 어겨버렸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이대로 안 오시면 어쩌지? 그러면 안 되는데..."
벤자민이 초조한 기색으로 중얼거리자 그를 힐끔 쳐다봤다. 아이라가 오지 않는 게 불안했는지 버릇처럼 손톱을 잘근잘근 깨무는 중이다.
아무래도 안심시켜줘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별일 아니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겠지. 만약 10분이 지나도 아이라가 오지 않으면 우리끼리라도 토론하자."
"그, 그래도 될까?"
"왜 안 돼? 아이라 씨가 없다고 이대로 해산하기에는 너무 아깝잖아."
"하지만 아이라 님은 조장인데... 나중에 우리끼리 했다고 혼날 수도 있잖아."
벤자민의 대답에 순간 이게 무슨 개소리지? 라며 어리둥절했다. 마치 아이라를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벤자민은 평민이고 아이라는 후작의 딸이다.
신분 차이가 어마어마하니 벤자민은 자연스레 아이라를 높으신 분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신분 제도의 병폐인지라 무어라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었다.
괜스레 속마음을 꺼냈다가 되려 이상한 눈초리를 받을 수도 있다.
'이건 내가 이상한 거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 중인 레킬리스 가문의 마리조차도 평민에게 존댓말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녀와 말을 놓을 수 있던 것도 내가 일단은 귀족이기 때문이다.
또한 평민이 귀족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고 반말을 한다는 건 엄연히 '권위'를 해치는 일이다. 레킬리스 가문도 권력을 이용해 행패를 부리지 않을지언정 권위에 접근하는 건 칼같이 막고 있다.
대신 권위와 권위주의는 명백하게 구분해놓아야 한다. 권위가 단지 정당성을 가진 거라면 권위주의는 그 정당성을 이용하여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물론 한 때 권위주의가 심해져서 전생의 프랑스 혁명과 유사한 사건, 제이로스 혁명이 발발했다. 그 영향으로 나라를 불문하고 권위주의가 옅어졌으나 권위만큼은 건재했다.
'그렇다고 다시 존댓말을 하라고 할 수는 없지.'
벤자민이라면 묵묵히 따르겠지만 기분은 더러울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기분 나쁜 것이 줬다 뺐는 행위니까.
'그나저나 우리 작고 아담한 조장님은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본인이 시간까지 정했으면서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으니 점점 화가 나려고 한다. 이럴 거면 왜 조장을 하기로 자처했는지 이해 가 가지 않았다.
"나,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한동안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 하던 벤자민이 그리 말하고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배를 붙잡고 뛰는 모양새를 보아 튀는 게 아니고 정말로 배가 아픈 모양이다.
아무튼 벤자민이 자리를 비움으로서 나와 레오나만 덩그러니 식당 입구 쪽에 남게 되었다. 금요일이라 복도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직 고요한 침묵만이 가라앉아 어색함을 꽃피웠을뿐.
나는 삽시간에 어색하진 상황 속에서 레오나를 힐끔 쳐다봤다. 우연인지 레오나도 나를 곁눈질로 쳐다 보고 있었다.
"... ..."
우리 둘은 곁눈질로 서로를 보다가 아예 고개까지 돌려버렸다. 고개를 돌리니 레오나의 무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예상외로 레오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야. 펭귄."
컨셉을 유지할 때와 달라도 너무 다른 말투. 나는 시크한 그녀의 부름에 흠칫한 것도 잠시, 레오나가 입 밖으로 꺼낸 펭귄이라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펭귄이라 부르다니,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참고로 이 세상에도 펭귄이라는 동물이 있다. 남극이나 북극처럼 빙하가 생성될 정도로 추운 지역에서 살고 있으며 외형도 도감에 실린 걸 보자면 똑같았다.
하지만 여기는 판타지 세상답게 빙하 지대가 아닌 용암지대에서 살아가는 종이 있다. 그것들은 동물이 아니라 사람을 해치는 몬스터다.
어쨌거나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레오나에게 대답하는 것부터가 우선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나를 펭귄이라 지칭한 이유를 모르겠다.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왜 펭귄이라 부르는 거야?"
"그냥 넌 펭귄 닮았어."
주변에 사람이 없자 컨셉을 풀었는지 낄낄 웃으며 놀리는 레오나. 나는 순간 황당해졌다가 곧바로 반격을 날려줬다.
"넌 개 같아."
"...죽을래? 개가 아니라 사자거든?"
레오나가 인상을 팍 찌루피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욕보다는 개로 취급했다는 부분에서 화가 난 모양이다.
이에 나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다른 질문을 꺼냈다. 수인은 개 아니면 고양이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럼 고양이?"
"겨우 묘족 따위랑 비교하지 말아줄래? 나 같이 위대한 사족(獅族)에게는 매우 실례되는 말이거든."
"너는 인간보고 펭귄이라 했으면서."
"... ..."
그 점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는지 머리를 긁적거리는 레오나다. 이내 머쓱해져서 고개를 돌리더니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불렀어? 할 말이라도 있어?"
"너는 그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나 싶어서."
그 여자라고하면 아이라를 말 하는 건가. 분명 그럴 것이다.
나는 레오나의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조별 과제를 할 때마다 하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살다 보니 아이라 정도면 감지덕지다.
하물며 구관이 명관이라고, 대환장 파티를 떠올릴 때마다 그나마 낫지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만약 아이라가 아니라 잭슨이었다면 조별 과제는 그대로 개박살 났을 것이다.
"글쎄? 적극적이니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냥 자기 할 일만 했으면 좋겠는 스타일? 딱 그 정도야. 너는?"
"난 마음에 안 들어. 남들은 다 고생하고 있는데 자기 혼자 놀고먹으려 하잖아. 꼴에 귀족이라고.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년이."
첫 인상부터 박살 나서 그런지 혹평이 이어졌다. 맞는 말이라 부정할 수도 없다.
나는 그녀가 툴툴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그녀에게 물었다.
"애니머즈에는 귀족이 없어?"
애니머즈는 300년 전에 세워진 수인들의 나라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수인들을 한데 모아 규합한 뒤, 그들만의 문명을 건설했다.
레오나는 내 질문을 듣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걸 보고 애니머즈에는 귀족이 없구나, 라고 생각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인간 세상처럼 후작이나 뭐니 하는 건 없지만 개인의 무력에 따라 행할 수 있는 권한이 달라져.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수인은 무력을 숭상하는 풍토가 짙게 깔려 있거든."
"그럼 계급이 따로 있는 거야?"
"당연히 있지. 알려줘?"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평소 수인의 생태에 대해 알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운이 좋았다.
레오나는 내가 끄덕거리자 피식 웃더니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잠깐 설명을 정리하는 듯했다.
"어디 보자. 우선은..."
"얘들아~!"
레오나가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 왔다. 발랄하면서 변성기가 채 오지 않은 소녀의 목소리다.
그에 레오나가 열었던 입을 다물었고, 나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모두가 예상한 대로 약속 시간에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우리의 조장, 아이라가 세상 밝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늦었으면서 저리 웃는 꼴을 보니 뻔뻔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뒤이어 아이라는 우리 앞에 서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벤자민이 없고 우리 둘밖에 없어서 그런 듯했다.
"응? 왜 두 명밖에 없어? 곱슬머리는?"
통성명까지 했는데 벤자민을 곱슬머리라고 칭한 아이라. 평민인 벤자민을 자기 아래로 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나는 그녀가 정확히 나를 직시하며 묻자 입을 열어 대답을 꺼냈다. 설마 화장실 간 것 가지고 뭐라 그러겠어. 본인이 늦었는데.
"벤자민은 잠깐 화장실에 갔어요. 곧 돌아올 겁니다."
"뭐? 화장실?"
화장실에 갔다는 내 대답에 아이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금 장난하냐는 심정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중이다.
뒤이어 그녀는 팔짱을 끼더니 혹시나하는 목소리로 나에게 확인을 구했다.
"도망친 건 아니지?"
"아니에요."
"화장실은 언제 갔어?"
"약 5분 전쯤에 갔습니다."
"그런데 아직 안 온 걸 보면..."
"큰 걸 보러 간 거니까 의심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이라가 쓸데없는 의심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쳤다. 그녀가 조장이 되면서 권위주의적인 면모를 보인 적이 많았는데 지금도 그럴까 봐 염려 가 되었다.
본래 조장은 '책임자'에 가깝지만 이 세상은 신분 제도가 합쳐지니 권위로 변질되었다. 지난번에 아이라가 레오나에게 경고를 줬던 걸 보면 얼추 알 수 있다.
아이라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 보다가 이윽고 피식 웃었다. 같잖다는 표정이다.
뒤이어 그녀는 두 손을 허리에 척 얹더니 상쾌하기 그지없는 음색으로 말했다.
"우리가 굳이 그 애를 기다려줄 필요가 있어?"
"...네?"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일까. 내로남불을 넘어 양심이 터진 듯한 발언이다.
그 사이 아이라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척 얹으며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꺼냈다. 뭘 믿고 있는지 몰라도 얼굴에 철판을 깔아놓은 것 같다.
"나는 조장이라서 무조건 기다려야하지만 걔는 아니잖아? 거기다 내가 많이 늦은 것도 아니고 그 시간을 못 참은 그녀석이 잘못 한거지."
"... ..."
"그러니까 그 곱슬머리는 놔두고 우리끼리 가자. 나중에 어디 갔냐고 물어도 적당히 변명하면 될 거야."
진짜 양심을 어디에 두고 왔길래 저딴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충격을 받아 어안이 벙벙해져 있을 때 아이라가 은근슬쩍 내 팔을 붙잡고 살살 잡아 당겼다.
누가 봐도 나를 데려가려는 듯한 행동이다. 나는 그 느낌에 화들짝 놀라 잽싸게 팔을 빼내었다.
"...뭐 하는 거야?"
내가 팔을 빼내자 아이라의 목소리가 급속도로 낮아졌다. 얼굴 또한 구겨진 것이 내가 팔을 내빼자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의 기분이 나빠지던 말던 할 말은 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역정을 내고 싶었지만 후작가 영애니 한 번은 참아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아이라 씨. 대체 뭐 하는 거예요?"
"나는 그저 빨리 가고 싶었을뿐인데? 뭐가 문제야? 아! 설마 평민이 한 명 없다고 토론이 안 될까 봐 걱정하는 거야? 그건 걱정 마. 고작 평민 한 명이 빠졌다고 문제가 될 건 하나도 없으니까. 우리만 있어도 충분해."
우리에서 레오나는 포함되지 않는걸까. 아이라는 싱글싱글 웃으면서도 레오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아이라의 정신세계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귀족들의 마인드가 이런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각하다.
"아이라 님.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조원은 끝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 이로울 거라고요. 벤자민 씨를 두고 가신다면 조장이신 아이라 님에게 불이익이 갈 겁니다."
결국 듣다못 한 레오나가 아이라에게 충고했다. 컨셉대로 특유의 딱딱하디 딱딱한 말투였으나 그 속에는 미약한 분노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아이라는 귀족도 아닌 '평민'인 레오나가 충고를 해서일까. 아까 전보다 표정이 더욱더 험악해졌다.
인형처럼 단아한 외모임에도 살벌한 기운이 풀풀 풍겼다.
"지금 우리 둘이 얘기하고 있잖아. 왜 끼어드니?"
"전 단지 아이라 님에게 위해가 갈까 봐 걱정한 겁니다."
"고작 이런 걸로 위해가 간다고? 너무 순진한 거 아니니? 오라버니한테 들었는데 한 명 정도 빠졌다고 점수가 깎인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어. 오히려 비루스 교수님은 그 한 명에게 0점을 줬지."
마음 같아서는 머리 뚜껑을 열어 뇌 속을 들여다 보고 싶다.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이런 마인드가 탑재돼 있는 건지 궁금하다.
아니면...
'...레오나를 쫓아보내기 위해서인가?'
아이라는 벤자민이 아니라 레오나를 쫓아내려 일부로 저런 말을 꺼낸 것일 수도 있다. 첫 대면에서 아이라는 레오나가 할 말은 하는 성격이라는 걸 어느 정도 알아챘으니까.
그러니 벤자민은 핑계고 단순히 트집을 잡으려고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내놓았겠지.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저희도 아이라 님을 기다려줬으니 벤자민도 기다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너는 실컷 기다려서 둘이서 오붓하게 토론이나 해. 나는 얘랑 둘이서 할 테니까."
레오나의 첨언에 아이라는 이때다 싶어서 내 팔을 붙잡아 자기 가슴 쪽으로 잡아당겼다. 푹신했던 세실리와 달리 평평한 느낌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아무튼 당황스럽다는 건 둘 다 똑같다. 난데없는 스킨십에 크게 놀라며 어떻게든 빼내려 시도했지만 그녀가 힘을 강하게 주고 있어서 무산되었다.
결국 아이라에게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거 빨리 놓으세요."
"싫은데? 너는 나랑 같이 갈 거지?"
미쳤다고 너랑 단 둘이 있겠냐. 하지만 내 속내와 달리 아이라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윽하면서도 탐욕에 젖어있는 눈빛하며 미묘하게 올라간 입꼬리. 결코 먹잇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끈적한 집착이 묻어나오는 표정이다.
'내가 뭘 했다고?'
평소 연고도 없던 그녀가 어째서 이런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나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라 씨."
"응."
"지금은 레오나 씨가 하는 말이 옳아요. 그러니 이거 놓아주세요."
"... ..."
내가 레오나 편을 들어주자 올라갔던 아이라의 입꼬리가 수직낙하했다. 질척거렸던 눈빛도 순식간에 싸늘해졌으며 내 팔에 주었던 힘도 슬며시 풀렸다.
이에 내가 천천히 팔을 빼내었을 쯤, 아이라의 내려갔던 입꼬리가 도로 올라갔다. 눈빛 또한 어딘가 위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네 성이 듀커르 마이샬이랬지?"
"...네. 그렇죠."
갑자기 가문의 이름은 왜 꺼내는 것일까. 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불길함에 바싹 긴장했다.
그동안 아이라는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베베 꼬더니 능청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마티우스 후작 가문에는 아주 유명한 기사단이 소속돼 있지. 바로 네이비 기사단이야."
"... ..."
"그리고 며칠 전 오라버니에게 들었어. 최근 전대 기사단장의 아들이 입단했다고. 이름이 아마... 데이브였던가?"
꿈틀-
나는 데이브의 이름이 아이라의 입에서 거론되자 눈 밑을 꿈틀거렸다. 가족의 이야기가 남의 입에서 나오자 저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런 내 반응을 눈치채지 못 했는지 아이라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만만함을 넘어 오만했다.
"네이비 기사단은 주로 국경을 수호하면서 제국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 겉보기에는 명예로워 보이지만 내 눈에는 위험한 일에 스스로 나서는 미련한 사람들로밖에 안 보여."
저게 귀족이, 그것도 군사 가문의 딸이 할 소리인가. 하물며 네이비 기사단은 부족 생활을 하는 수인, 더 나아가 종종 엘프 정찰대와 맞닥뜨려 전투를 벌인다.
말로만 국경인 곳이지, 사실상 전선이나 다름없다. 네이비 기사단의 순직률이 다른 기사단에 비해 3배를 훌쩍 넘기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어림잡아 알 수 있다.
허나 아이라는 그런 기사들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있다. 자유를 포기하면서까지 나라를 수호하는 군인들에게 미련한 사람들이라니, 그녀는 적어도 군사 가문의 딸이 될 자격이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
아이라가 팔짱을 낀 채 턱을 살짝 젖혀들며 오연하게 말한다. 너는 절대 자신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다는, 일종의 협박에 가까운 메시지다.
그녀는 아마 내가 거절하는 순간 데이브를 어떻게 할 요령인 듯싶었다. 어쩌면 국경보다 더 심한 곳으로 보내버릴 수도 있겠지. 명망높은 군사 가문의 딸이니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러한 생각들에 나는 그녀의 협박성 질문을 듣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네. 잘 알겠네요."
이렇게 된 이상 하는 수 없다.
"쌍년아."
다 같이 뒤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