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모임에서 현생 최초로 흑역사를 생성하긴 해도 내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다. 비록 주말 내내 숙취로 고생했지만 글을 쓰는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화장실을 좀 많이 들락날락했을 뿐이지. 와인은 다른 주류보다 숙취가 심하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사실을 처절하게 느꼈다.
아무튼 간에 다소 문제가 있긴해도 글은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차질없이 쓸 수 있었다. 신디에게 작문법을 가르쳐 주면서 배운 역사 지식과 세실리가 알려준 마족의 생태가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집에 있을 때보다 여유 시간이 반절 이상 줄어들어 진척도가 느린 건 어쩔 수 없다. 집에 있을 때는 하루 일과를 집필에만 집중했으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확실히... 다음 권은 빨라도 2달은 걸리겠어.'
집에서는 빠르면 보름, 늦어도 한 달마다 원고를 제출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그러기가 매우 힘들었다. 사실 2달도 잡은 것도 대단히 빠른 수준이다.
이렇다보니 가끔 타자기 같은 기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종종 생각한다. 신문이 나올만큼 제지 기술과 인쇄술이 발달된 세상인데 어째서 기계에는 한없이 약한 걸까.
'뭐 어쩌겠어. 시대가 아직 중세인데.'
이 세상은 산업 학명은커녕 '기계'라고 할만한 물건조차 제대로 등장하지 않아 '공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숙소의 냉장고, 온도 조절 기능, 마지막으로 내가 쓰는 마법필 모두 공학이 아니라 '마법학'이다.
아마 산업 혁명에 도달해도 전생처럼 완전한 기계가 아니라 약간의 마법이 포함돼 있지 않을까. 나는 8권에 적었던 증기 기관차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거기까지는 내가 신경 쓸 게 아니지.'
나는 내 할 일이나 하면 그만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선물받은 마법필로 글을 쓰다가 우뚝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부터 조별 과제가 있던가?'
조별 과제하니 미간이 절로 좁혀진다. 전생에서는 조별 과제를 하면서 좋았던 기억이 하나도 없다.
무슨 종점의 기적도 아니고 조별 과제 기간에 부모님이 아프다시거나, 장례식에 가야한다거나, 휴대폰이 고장나 연락을 할 수 없다는 등등.
다양한 사유로 불참하는 일이 다반사요, 개중에는 아예 군대로 런한 새끼도 있었다.
그중 가장 빡쳤던 건 나 혼자 다 했는데 교수가 C를 줬을 때다. 조장이 리더십을 발휘해서 조원을 이끌어 나가야하는데 왜 혼자서 했냐며 혼냈던 기억이 아직까지 뇌리에 남아있다.
다 좋으니까 부디 그런 현상만 없었으면 좋겠다. 못 하겠다고 하면 내가 다 해줄테니 그냥 참석만 잘 해주면 여한이 없다.
'내가 씨발 작가인데 그 정도도 못 하겠어?'
조별 과제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각나서 그런지 욕이 나와버렸다. 그만큼 조별 과제에 좋지 않은 감정밖에 없었다.
몇몇 사람은 여기는 아예 세상이니 다르지 않겠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간'의 본질은 어딜 가나 달라지지 않는 법이다. 더군다나 계급이 존재하니 더 심해질 수도 있다.
'근데 여기는 ppt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그림이라도 그려야 하나?'
시각 효과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엄청 크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백 번 말해봤자 한 번 보는 것보다 못 하다는 법이다.
이건 나중에 교수에게 묻는 것이 현명할 듯했다. 가능하다면 그림을 대충 그려서라도 발표하고 싶다. 학점은 높게 받을 수록 좋은거니까.
'주제도 선정해야 하고... 생각보다 힘들긴 하겠네.'
물론 나에게는 아니지만. 나는 조별 과제에 관한 일은 뒤로 미루고 지금은 집필에 집중했다. 지금은 칠죄종에 관한 설정을 쓰는 것이 우선이다.
'색욕은 마족으로 하자. 그리고 외모는...'
나는 마법필을 놀리던 손을 우뚝 멈추었다. 색욕을 관장하는 마족이라하니 세실리가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그것도 모임에서 입었던 드레스 차림으로.
입학식 때 들은 소문에 따르자면 서큐버스의 후예라고 했던가. 하는 행동이나 고혹적인 분위기만 본다면 신빙성이 아주 높다.
'...이런 걸 적으면 의심받을테니까 다르게 묘사하자. 마족이었던 자신을 차별없이 대해줬던 인간 남자에게 배신당했다는 설정을 추가하면 되겠지. 마지막으로 이름은...'
당연하게도 릴리스다. 애당초 분노를 맡고 있는 수인의 이름이 사탄인데 뭐가 문제라고.
'수인의 이름이 사탄이라니. 그거참...'
나는 속으로 키득거리며 막힘없이 스토리를 써내려갔다.
****"
조별 과제에는 이런 속설이 있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본래라면 정확히 반대가 되어야 맞는 속담이지만 조별 과제는 아니다. 애초에 한 명이면 족할 일을 두 명, 세 명이 달라붙어서 하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일의 효율은 급감한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조별 과제를 하면서 꼭 나쁜 일만 발생하는 건 절대 아니다. 우연히 친해져서 인맥을 쌓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다.
난 조별 과제를 할 때마다 개똥거지 같은 팀원을 만나서 문제지만. 덕분에 인간을 혐오하게 되는 과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말이 길어졌는데, 조별 과제를 '약간이나마'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적은 인원을 배치해야 한다. 이건 무조건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산다는 속담처럼, 4명까지는 괜찮지만 5명이 되는 순간부터 문제가 발생하더라. 나 혼자 정도는 괜찮겠지~ 라며 나 몰라라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 새끼들은 교수한테 다 꼰지를 계획이다.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오늘은 임의로 조를 짠 뒤 과제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주제는 제논 일대기의 전개를 예측하는 것. 그 가설이 어째서 나왔는지, 그리고 그 가설을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있는지 설명해주시면 됩니다."
월요일이 다가오고, 인문학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교수가 조별 과제에 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늘 그렇듯이 앞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그의 말을 듣고나서 속으로 피식거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던 전생에서도 조별 과제는 인간 불신에 걸리기 딱 좋았는데 여기는 어떨지 정말 궁금해졌다.
그동안 교수는 강의실 내에 있는 학생의 수를 하나하나 세더니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재 제 강의를 듣는 학생의 수는 정확히 46명. 4명당 1조씩 나누고 나머지 2명은 무작위로 넣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종이를 나눠드릴테니 그곳에다 본인의 이름을 적어주시고 상자에 넣으시면 됩니다."
비루스 교수는 그 말을 끝으로 맨 앞의 학생에게 작은 종이 뭉치를 나누어줬다. 나는 그 종이 뭉치에서 한 장을 분류하고 나머지는 뒤로 전달했다.
"되도록이면 너랑 같은 조가 됐으면 좋겠네. 네가 그나마 가장 편하니까."
이름을 적은 종이를 네모반듯하게 접고 있을 때 옆에 앉은 마리가 입을 열었다. 그 마음은 나도 전적으로 동의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면이 없는 것보다야 혼자 할지언정 마음편히 아는 사람과 같은 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도 아이작이랑 같은 조가 됐으면 좋겠어. 아이작이라면 제논 일대기의 전개를 다 예상하고 있을 것 같거든."
마리의 말을 들었는지 뒤에 앉아있던 세실리가 특유의 장난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세실리가 꺼낸 말을 듣자마자 살짝 흠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저런 말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나에게 좋은 현상은 아니다. 거기다 왠지 모르게 뼈가 실려있는 말이기도 하고.
"세실리. 그 말은 아이작에게 도움만 받고 너는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거야?"
세실리의 옆에 착석해있던 리나가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세실리는 태연자약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글쎄? 리나 너는? 리나는 이 나라의 황녀니까 다른 사람이 알아서 다 해줄 것 같은데?"
"그러면 고맙겠지만 나도 양심은 있어. 도와주기는 해야지."
리나가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마리의 안색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마리는 뒤를 돌아보며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짓씹듯이 중얼거리며 불편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양심은 무슨. 마음에도 없는 말 하네."
"... ..."
나는 일부러 못 들은 척 해줬다. 마리가 리나에게 불쾌함을 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이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을 수 있다.
잠시 후, 비루스 교수가 이름이 적힌 종이를 하나하나 회수하여 박스에 넣었다. 그리고 종이가 골고루 섞이도록 만들기 위해 상자를 요란하게 흔들거나 안에 손을 넣어 휘저었다. 무슨 비빔밥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골고루 섞으신다.
"자. 그럼 뽑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뽑힌 사람은..."
교수가 곱게 접힌 종이를 펴자마자 눈에 이채가 서리며 정확히 나를 쳐다봤다. 네모반듯하게 접힌 종이를 보자마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진짜인 모양이다.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비루스 교수는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콧수염을 살살 잡아당기더니 이름을 호명했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학생. 그리고 이 다음은..."
제발 아는 사람이 나와라. 아, 물론 잭슨은 빼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있을 때 교수가 상자 안에서 종이를 빼냈다. 그리고 아까 전처럼 힘 있는 목소리로 이름을 호명했다.
"아이라 벤 마티우스."
"네!"
이름을 호명하자마자 뒷쪽에서 힘찬 외침이 들렀다. 이름도 그렇게 귀에 들어온 목소리로 보아하건데 여자인 듯했다.
이에 내 조원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갈색 머리카락에 귀여운 외모를 가진 여학생이 손을 들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얼굴도 익히지 않은 사람이다. 미들네임이 있는 걸 보면 귀족가 영애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다음으로는 벤자민 블랭크."
"네, 네!"
그닥 멀지 않은 곳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고개를 쭈욱 내밀어 소리가 들린 옆쪽을 쳐다봤다.
탁한 금발에다가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왜인지 모르지만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와 아이라라는 여학생과 달리 미들네임이 없는걸 보아 평민인 것 같다. 평민이 헤일로 아카데미에, 그것도 무학이 아닌 문학에 입학하려면 매우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으로 안다.
전생과 비교하자면 중학교 과정만 걸어온 학생이 정시로 서울대학교에 합격해야하는 수준이다. 머리가 천재 수준으로 뛰어나지 않는 이상 입학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단 말은 적어도 무능하지는 않다는 소리. 나는 그나마 다행히라 여겼다.
"마지막으로... 레오나 라이언즈."
잠깐만. 뭐라고?
나는 교수가 호명한 이름을 듣자마자 눈을 깜빡거렸다. 성은 처음 듣지만 이름이 정말로 익숙하다.
뒤이어 내가 아는 얼굴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가 한 여자와 딱 마주치게 되었다. 평소 무표정에 가까웠던 표정에 당황이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자기가 수인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들킨 수인 여성, 레오나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모르겠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레오나와 얼굴을 마주치게 된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고민하다가 손을 살살 흔들어줬다.
그에 레오나도 당황한 표정을 다급히 지우고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인사를 씹힌 것 같아 마음이 상했지만 그녀의 입장이 입장이니 이해해줬다.
"이렇게 4명이서 한 조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잭슨 미렐 케리손."
조원이 정해지자 바로 다음으로 내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인물, 잭슨이 호명되었다. 어차피 잭슨이랑 같은 조원이 아니라 신경끄려던 참이었다.
"마리 하우젠 레킬리스."
놀랍게도 잭슨과 마리가 한 조가 되었다. 이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인 걸까.
나는 교수가 마리의 풀네임을 부르자마자 그녀의 반응을 확인했다.
"하필이면 그 놈이랑..."
마리는 인상을 와락 구긴 채 똥씹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기야 잭슨이 리나와 세실리에게 추파를 던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이런 반응을 지을만도 하다.
참고로 설명하자면 잭슨은 마리에게 한 번 집적대고 그 다음부터는 하지 않았다. 마리가 대놓고 꺼지라고 욕부터 박았으니 그럴만도하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리나 우르미 크리스틴."
"흐음?"
마리가 그토록 싫어하던 리나까지 한 조가 되었다. 슬쩍 뒤를 바라보니 리나도 예상치 못 했는지 한쪽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문제가 많은데 화룡점정은 이 바로 다음에 나타났다.
"... ..."
리나를 뽑을 때까지만 해도 덤덤했던 비루스 교수는 다음 번에 고른 종이를 확인하자마자 멈칫거렸다. 뒤이어 얼떨떨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걸 보며 속으로 설마하면서도 그의 입이 열리기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
극의 극 확률을 뚫고 대환장 파티가 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