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6화 (37/763)

< 36화 >

"...나."

"... ..."

"어나...!"

"...어나!"

"으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귓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메아리 치듯이 울렸다.

나는 귓가에서 윙- 윙- 울리는 정체모를 소리에 신음했다. 머리는 어질어질하고 속은 불을 달군 것처럼 화끈거렸다.

이대로 눈을 감고 다시 잠에 들고 싶을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일어나!"

"으응...?"

그러나 이번에는 귀에 생생하게 들렀다. 누군가 나에게 일어나라고 외치는 소리가 맞다.

그 소리에 도통 떠질 생각을 하지 않던 눈꺼풀을 부르르 떨면서 간신히 열었다. 강렬한 빛무리가 눈을 찔러들어 익숙해질 때까지 몇 번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이윽고 침침해진 시야가 차차 밝아지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백색 머리카락과 파란색 눈동자. 그리고 어딘간 불만스러운 표정까지.

어질어질한 머리 때문에 판단이 살짝 늦었지만 마리, 그녀가 확실했다.

"이제 정신이 들어?"

"으으..."

마리의 불만 가득한 물음에도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자마자 두통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겨우겨우 입을 때었다. 물을 마신지 오래 되어 상당히 메마른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긴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대강당이지."

아, 그렇지 참. 필름이 끊기기 직전 세실리가 나를 이곳에다 데려놓은 것까지는 기억난다. 그 과정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모른다.

분명 중요한 말을 나눈 것 같은데 이상하리만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 취했으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이후로는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얌전히 잠에 들지 않았을까. 버릇은 쉽게 고칠 수 없다고, 나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골아떨어지는 편이다.

"그나저나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서 퍼질러 자고 있네. 도대체 와인을 몇 잔이나 마신거야?"

마리가 한심하다는 말투로 말하는 것이 귀에 쏙쏙 박혔다. 질책까지 섞여있어 그녀의 진심이 우러러 나왔다.

나는 콧등을 꾹-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갈라진 목소리였다.

"...몰라."

"그래. 모르겠지. 자."

"응?"

내가 콧등을 누르고 있을 때 마리가 나에게 무언가를 건내줬다. 와인잔과 달리 평범한 유리컵이었으며, 그 안에는 맑고 투명한 액체와 구(球) 형태의 얼음이 담겨있다.

와인만 마시다보니 유리컵이 있을 줄은 몰랐다. 물론 있어도 와인만 마셨을 것이다.

"평범한 냉수야. 이상한 거 안 넣었으니까 잔말말고 마시기나 해."

어질어질한 정신 때문에 한동안 멍하니 유리컵을 바라보고 있을 즈음, 마리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컵에 담긴 액체가 무엇인지 알려줬다.

나는 그제서야 아, 하며 유리컵을 조심스럽게 건내받았다. 얼음이 있어서 그런지 받자마자 시원한 냉기가 두 손을 타고 전해졌다.

이어서 얼음이 담긴 유리컵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혹여 놓칠새라 두 손으로 꽉 잡고 입에 갖다 대었다.

꿀꺽- 꿀꺽- 꿀꺽-

"후아!"

냉수를 반 정도 마시니 진심어린 탄성이 저절로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장작을 피운 것마냥 가슴이 뜨거웠는데 냉수 덕분에 살 것 같다. 사막처럼 메말랐던 목 또한 원래대로 되돌아온 느낌이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마리가 내 반응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어지러웠던 머리가 점차 호전되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덕분에. 이거 어디서 난 거야?"

"테이블 위에 있었지. 와인만 있는 게 아니라 칵테일도 있거든."

와인만 있던 게 아닌 모양이다. 하긴 와인이 너무 맛있어서 와인만 주구장창 마셨으니 모를만도 하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 살펴보니 단상 위에 올라가 연주를 하던 악단도 보이질 않았고, 강당 내부의 사람 숫자도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의자에 앉아 골아떨어져 있는 동안 시간이 많이 지난 듯했다. 나는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면서 마리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 혹시..."

"네가 언제부터 잤는지는 나도 몰라. 나도 이제 막 여유가 생긴 참이었거든. 일단 너랑 나랑 헤어지고나서 4시간 정도 지났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마리가 먼저 선수쳤다. 팔짱을 끼며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은 건 덤이다.

하기야 그녀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바빴을텐데 이런 질문은 실례가 될 수도 있었다. 이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같이 다녀도 되겠네? 떨어지기 전에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어? 그, 그렇지. 그런데 너 괜찮겠어?"

내 물음에 마리는 당황하는 것도 잠깐이었지 곧바로 내 상태를 걱정해줬다. 골아떨어지기 전까지 거의 만취 수준이었으니 그녀가 걱정할만했다.

하지만 한 번 잠에 빠져들었다가 깨어나서 그런지 술기운이 어느 정도 달아났다. 더군다나 마리가 전해준 냉수가 일종의 해소제 역할을 해주어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했다.

물론 두통과 메스꺼움은 여전했다. 와인은 특히 숙취가 심하다고 얼핏 들은 적이 있는 것같다.

"움직일 정도는 돼. 그리고 아버지에게 들은 게 있어. 숙취가 있을 때마다 마나를 순환시키면 해소될 거라고."

"아, 그거? 나도 오빠한테 들은 적이 있어."

"읏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체내의 마나를 순환시켰다. 내가 아무리 무예에 재능이 없더라도 마나를 가동시키는 것까지는 가능하다.

이어서 정신을 약간 집중하자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던 체내의 마나가 세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나를 돌릴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이 시원하면서 청량한 느낌은 언제 봐도 생소했다.

'이걸 이용해 싸운다는 것도 신기하고...'

내가 그 생각을 하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마리는 마나를 순환시켜서 숙취를 해소한다는 내 방법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두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번쩍 떠오른 모양이다.

이윽고 그녀는 다급한 표정으로 내 팔을 붙잡더니 버럭 외쳤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묻어나오는 표정이 압권이다.

"야! 야! 당장 멈춰! 지금 마나 돌리면 안 돼!"

"응? 왜? 점점 나아지는..."

띠잉-

내 말이 모두 끝나기도 전이었다.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차마 형언할 수 없는 두통이 밀려들어왔다.

느닷없이 엄습한 그 두통에 비틀거리며 내가 앉았던 자리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냉수로 차분히 가라앉혔던 속이 뒤집혔는지 메스꺼움마저 느껴졌다.

"마나를 운용하면 숙취가 더 심해진단 말이야! 숙취가 느껴지는 시간을 줄이는 대신 그걸 전부 앞당기는 식이라고!"

"으으..."

"정말이지... 알고 있는 건 제대로 알고 있던가 이게 뭐 하는 짓이니?"

쓴소리가 연이어 이어져도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겨우 진정되었던 두통과 메스꺼움이 한꺼번에 몰아쳐서 정신이 없다.

"나참... 무슨 코미디도 아니고."

마리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투덜거리고 내 옆자리에 있던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내가 회복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니 그때까지 기다리려는 듯했다. 괜스레 미안해져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 이럴 줄은 전혀 몰랐네."

"시끄럽고 물이나 마시기나 해."

그러고 보니 반즈음 남아있던 냉수가 아직까지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남은 냉수를 한꺼번에 들이켰다.

얼음 덕분에 냉기는 여전하여 목구멍 너머로 시원한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뒤집혔던 속이 진정되는 듯하여 약간이나마 살만해졌다.

하지만 속이 울렁거리는 건 똑같았다. 마나를 순환시키자마자 바로 종료해서 망정이지, 그 이상 유지했다면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으으..."

"힘들면 내가 사람 불러서 숙소로 데려가게 해줄게. 보통 이런 행사에는 너처럼 술에 취한 사람들이 많아서 웨이터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거든."

내 상태가 보기보다 영 좋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마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권유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배려 속에 숨겨져 있던 실망감을 눈치챘다.

하긴 기껏 자유 시간을 얻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 누구라도 실망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상대방의 상태가 꽝이라 해도.

거기다 내가 퍼질러자는 동안 그녀는 조금이라도 가문에 도움이 되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녔을 것이며, 그에 따라 피로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런데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에게 온 것이다.

그러니 실망감을 주는 건 가급적 사양하고 싶다. 나는 애써 괜찮은 척 입을 열어 마리를 안심시켜줬다.

"괜찮아. 머리가 좀 어지러울 뿐이지 네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그래? 그럼 다행히고."

"그래도 움직이는 건 힘들겠네. 그냥 여기서 얘기할까?"

"여기서?"

속이 울렁거리는 와중에 마리를 힐긋 바라보니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기력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마리는 고양이 같은 눈을 깜빡거렸다가 이윽고 못 말린다는 미소를 지었다.

"너는 다 좋은데 가끔 가다 보면 어리버리해지더라."

"지금은 와인 때문에 그래."

"그거참 설득력 높은 변명이네."

"너는 안 마셨어?"

"마셨긴 해도 너처럼 많이 마시진 않았어. 그리고 레킬리스 가문의 특징이 잘 안 취한다는 거야."

외모도 그렇고 축복받은 유전자를 이어받았구나. 나는 속으로 부럽다고 생각하다가 앞을 쳐다봤다.

이제 슬슬 정리하려는 모양인지 웨이터들이 하나둘 씩 테이블을 깨끗하게 치우기 시작했다. 모임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숫자도 전보다 더욱 줄어든 모습이다.

그럼에도 유독 한 사람만큼은 눈에 띄였는데, 당연하게도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세실리다. 그녀는 늘 그렇듯이 리나와 사이좋게 다니는 중이었다.

아마 그녀에게 가장 친한 친구를 꼽으라고 단연코 리나를 고르지 않을까. 항상 보면 그녀의 옆에는 십중팔구 리나가 있었다.

"... ..."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리나와 이야기하던 세실리가 정확히 이쪽을 바라보더니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줬다.

비록 움직일 기력도 없었으나 저쪽에서 먼저 인사해줬으니 반응은 해줘야겠지. 내가 힘없이 손을 흔들어주자 세실리가 쿡- 쿡- 웃음을 흘렸다.

"쟤 너 보고 있는 거 맞지?"

옆에서 마리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힘빠진 목소리로 대충 대답했다.

"아마도. 그나저나 세실리 누나는 볼 때마다 리나 님이랑 같이 있는 것 같네."

"...끼리끼리 만나는 거겠지, 뭐."

헤어지기 전의 일을 마음에 담고 있었는지 세실리의 평가가 상당히 박해졌다. 나는 그걸 듣고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마리는 열심히 관리한 손톱을 바라보다가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작."

"응."

"문득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넌 이상형이 어떻게 돼?"

"이상형?"

나는 생뚱맞게 들릴 법한 마리의 질문을 듣고 그녀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녀는 내 시선에 한 번 힐긋거렸다가 애꿎은 손톱만 만지작거리며 확인시켜줬다.

"응. 이상형."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딴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처럼 답한 마리였으나 그녀의 귀가 미미하게 붉어져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마리의 머리색이 눈처럼 새하얀 탓에 더욱 눈에 띄였다.

나는 왠지 남일 같지 않은 그 반응에 얼떨떨한 것도 잠시, 그녀가 질문한 이상형에 대해 턱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이상형이라..."

솔직히 말하자면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전생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내 주위에 미녀가 발이 채이도록 널려있기 때문이다.

마리를 포함해서 리나, 세실리, 레오나, 아델리아, 마지막으로 미의 화신이라 일컫는 엘프, 신디까지.

취향에 따라 갈리겠지만 이들은 결코 못 생겼다고 할만한 사람들이 절대 아니다. 만약 못 생겼다고하면 그 사람이 이상한 거겠지.

어쨋던 간에 당장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굳이 있다면 눈이 크다는 것 정도?

나는 그 생각이 들자 턱을 쓰다듬는 걸 멈추면서 입을 열었다.

"글쎄...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어. 난 눈이 크면 다 좋다고 생각하거든."

"그럼 세실리나 리나처럼 가슴 큰 여자는?"

그거 너무 직설적인 질문인데. 내가 당황하던 말 건 마리는 정말로 진지했다. 나는 어느새 진지해진 그녀의 얼굴과 말없이 마주했다가 말없이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세실리처럼 파격적인 건 아니지만 마리의 드레스도 나름 과감한 편이라 가슴 부분이 약간이나마 노출돼 있다. 눈처럼 뽀얀 속살이 수많은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 같다.

아무튼 간에 마리의 가슴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었다. 세실리가 과할 정도로 큰 거지, 오히려 내 기준으로는 마리도 큰 편에 속했다.

'아니. 이게 아니지.'

술기운 때문에 이야기가 잠깐 샜으나 본론으로 돌아왔다. 나는 시선을 끌어올려 그녀의 얼굴과 재차 마주한 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크면 좋지.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남자도 비슷할거야. 본능이거든."

"그, 그래? 그렇구나..."

마리가 음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기 직전이었다. 나는 머릿속을 번쩍하며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급히 덧붙였다.

"아. 하나 있다. 취미가 같으면 좋겠네."

"취미?"

"응. 취미."

전생에서도 다른 걸 다 제쳐두고 취미가 맞다면 기본적으로 사이가 좋았다. 비록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나서 연락을 끊었다지만 한때 연애 직전까지 갔던 여사친도 있었다.

조금 전 에딘도 비슷한 케이스다. 와인을 마셔서 그런 걸 수도 있으나 취미가 같다는 걸 알자마자 봇물 터지듯이 말이 쏟아져나왔다. 심지어 초면인데도 말이다.

"취미가 같으면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들더라고. 무언가를 함께 알고, 함께 즐길 수 있다는 느낌? 난 그런 게 좋아."

"...의외로 평범하네?"

"그렇지. 너도 알다시피 내 취미가 독서잖아? 그런데 요즘에는 사람들이 제논 일대기밖에 안 읽더라고. 다른 책들도 좀 읽었으면 좋겠는데."

이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다양한 책을 읽었으나 제논 일대기가 나온 이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제논 일대기에 적응이 되어버린 나머지 다른 책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다. 약간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역사는?"

"응?"

"역사도 좋아하지 않아?"

마리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살짝 갸웃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하지. 왜?"

"생각나서 물어본 거야. 별 이유는 없어. 아, 그리고..."

마리는 말을 하다 말고 살짝 머뭇거렸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어쨌거나 이상형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

"응. 그럼 마리 너는?"

"나?"

내 역질문에 그녀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확인시켜줬다.

이어서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쭈욱 올렸다. 왠지 어디서 본 듯한, 장난기가 묻어나오는 미소였다.

"안 가르쳐 줄 건데?"

"뭐?"

"안 가르쳐 줄 거라고. 아이작은 의외로 순진하구나?"

"아니. 하..."

나는 탄식을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대답하지 않는 건데. 머리가 어지럽다보니 판단력이 흐려진 탓에 생긴 결과였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흘리고 있을 때, 마리가 흘러가듯이 중얼거렸다.

"언젠가..."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냐. 그나저나 머리는 이제 좀 괜찮아?"

"토할 거 같아."

"여기서 토하면 소문날... 아, 이미 나겠구나. 술에 잔뜩 취한 채 의자에서 퍼질러 잔 빨간 머리로. 정말 재밌겠다. 그지?"

"진심으로 한 대 때려도 되냐?"

"때리면 우리 아빠 부를거야."

상태가 나아지기까지는 약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나와 마리는 대강당 밖으로 나와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눈 후, 늦은 밤이 되자 서로 헤어졌다.

그리고 헤어지기 직전, 마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아 참. 아이작. 깜빡하고 말 안 한 게 있어."

"그게 뭔데?"

"너 자는 모습 귀엽더라."

"... ..."

"그럼 다음 주에 봐. 안녕~"

나는 해맑게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마리를 보면서도 웃을 수 없었다.

'다음부터는 술 마시지 말아야겠다.'

이번 모임은 적어도 나에게는 흑역사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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