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5화 (36/763)

< 35화 >

세상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서적, 제논 일대기.

겉보기에는 평범한 영웅의 일화이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이야기는 매우 심오하다. 평소 악마로 취급받던 마족을 불운한 존재들로 묘사하거나 귀족들의 명과 암을 단편적으로 드러내는 등등.

여태까지 소설이라함은 문장이 이리저리 꼬여있고, 단어마저 복잡하기 그지없는 서적밖에 없었으나 제논 일대기는 정반대의 노선을 타고 있다. 머릿속에 재생이 되는 듯한 문장력과 묘사, 그리고 여운을 남기는 명장면과 메시지들.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던 한 평민이 '기연'을 만나 재능을 개화하고, 더 나아가 세상을 구하는 영웅으로 성장하는 일대기. 거기다 매력적인 여주인공과 조연들.

이렇듯 평민들도 쉽게 읽고 재미있어하는만큼 제논 일대기는 대중적인 서적으로 자리잡았다. 남녀노소, 종족불문 않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

그리고 독자들은 제논 일대기의 다음 신권과 더불어 가장 궁금한 부분이 있다.

과연 제논 일대기의 저자는 누구일까? 누구이길래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것일까.

수많은 평론가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했으나 그중 제일 신빙성이 가는 가설은 바로 나이를 지긋하게 드신 현자라는 것. 특히 과거에 온 세상을 누비고 다녀 다양한 경험을 쌓은 탐험가라는 가설에 힘이 쏠렸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10대, 그리고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한 20대는 당연히 논외로 쳤다. 그도 그럴 것이 제논 일대기는 풍부한 경험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장면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오지 않는 이상.

"...그건 왜 물어여?"

눈이 반즈음 풀려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 아이작이 흐물거리는 목소리로 세실리에게 물었다. 호박처럼 빛나던 금색 눈동자는 빛을 잃어 탁해졌고, 무뚝뚝하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얼굴 또한 머리카락처럼 붉어진 것이, 누가 봐도 취했다는 걸 알 수 있는 모습.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귀엽네.'

세실리는 그 모습을 보며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평소 의심스러웠던 정황을 상기했다. 우선적으로 리나가 언급했던 중지 손가락의 굳은살 즉, 펜혹.

오랜 시간 검을 쥔 기사의 손바닥이 딱딱한 것처럼, 그의 중지 손가락에 박혀있는 굳은살도 오랜 시간 동안 펜을 쥐어야 가질 수 있는 증표다. 그것도 고작 한 두 달 정도가 아니라 최소 1년의 넘어야 할 정도로 심한 굳은살이다.

물론 평소 노트에 기록하는 습관을 가진 아이작이니, 굳은살 정도야 충분히 가질 수 있다. 거기다 공부를 좋아한다고 직접 말했으니 여기까지는 넘길만하다.

두 번째는 평소 제논 일대기에 시큰둥했던 아이작의 태도. 분명 다른 사람들처럼 제논 일대기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열광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딱 취미로 읽는 정도랄까.

하지만 아까 전 몰래 들었던 잭슨과의 이야기도 그렇고, 여태까지의 태도를 종합했을 때 제논 일대기에 관한 이야기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스토리를 거의 다 꿰차고 있을 정도면 열정적이라는 의미인데 아이작은 이상하리만치 무심한 편이었다.

마지막으로 지난 번, 아이작이 언급했던 마족의 정체성이다.

'제논이 진에게 했던 말과 비슷해. 이게 정말로 우연일까?'

또 다른 주인공, 진은 사크란이 희생하는 모습을 보며 마족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그 고민을 제논이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장면이 존재한다. 인간을 포함한 다른 종족들은 그저 제논이 격려해주는 건가 싶겠지만 세실리에게는 쉬이 넘길 수 없는 문맥이다.

아이작은 마족을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인간이 되길 위해 간절히 소망하는, 가장 인간적 존재'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제논이 진에게 말했던 문장은 이렇다.

[걱정 마. 네가 걱정하는 것과 달리 마족은 악마가 되어도 인간처럼 죽을 수 있어. 사크란을 봐. 태생적인 부분은 신조차 어쩔 수 없지만 그렇기에 마족이 더욱 인간다운 거야.]

제논의 격언은 아이작이 그녀에게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정말로 아이작이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면? 놀라울만치 위의 증거들이 모두 부합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 한다.

무엇보다 아이작은 현재 17살, 인간으로 치자면 이제 막 성인에 접한 상황이다. 지식이 풍부할지언정 경험은 결코 풍부할 수가 없다.

또한 아이작은 여태까지 집에서 생활하고 밖에 나갔던 적이 거의 없다고 본인이 스스로 밝혔다. 하물며 제논 일대기에는 경험이 많거나 그 경험을 직접 눈으로 봐야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가득 채워져 있다 .

이런 결정적인 증거 때문에 '아이작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다'라는 증명이 성립되지 않았다. 세실리는 아이작의 질문을 듣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궁금해서 물은거야. 아이작은 독서랑 무언가를 쓰는 걸 좋아하잖아? 어쩌면 너도 책을 쓰고 있지 않나, 싶었거든."

"...아니에여. 저 책 안써여어..."

"그러니?"

세실리는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안에 담긴 와인이 출렁이는 모습을 보다가 아이작에게 시선을 두었다.

술에 취해서 그럴까. 평소였다면 얼굴에 모든 생각이 드러나는 아이작이나 지금은 분간하기가 힘들다.

사람은 술에 취하게 되면 실수를 하길 마련인데 아이작은 오히려 더 꽁꽁 숨기는 중이다. 그래서 더 의심이 간다. 본래 한 번 피어난 의심을 싹은 꺾이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게 되는 법이니.

'마음 같아서는 마법이라도 쓰고 싶지만... 그러면 절대 안 되겠지.'

마법의 활용성은 무궁무진하다. 생활에 용이하게 쓸 수 있는 마법도 있고 정신을 조작해 본심을 토해내게 만드는 마법도 있다.

인간이었다면 손도 대지 못할 만큼 복잡한 마법이지만, 자신은 마법의 대가라고 불리는 마족. 약간의 수고를 들인다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마법은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특정 지역을 제외하면 사용이 불가능 할 뿐 더러 정신계 마법은 위험 요소와 후유증이 적지 않다. 괜히 확신을 가진답시고 호감이 있는 상대의 머릿속을 헤집을 수는 없는 법이다.

생판 모르는 남이었다면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겠지만 아이작이니까. 아이작은 그녀에게도 특별한 존재이니 소중하게 대해줘야 옳다.

'인간들은 수가 많아. 만에 하나, 정말로 우연히 겹치는 경우가 있겠지.'

제 나이에 맞지 않게 배려심과 생각이 깊다고한들, 그래봤자 17살이다. 거기다 인간의 숫자는 다른 종족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많으니 아이작을 콕 집을 필요는 없다.

'그래도 의심은 유지할 필요가 있겠지.'

아이작이 작가일 확률은 현저히 적지만, 연관된 사람이라면 약간이나마 상승한다. 세실리는 그의 주변에 누가 있는지 곰곰이 파악하는 것도 잠시, 아이작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이작은 거의 인사불성이 되기 직전이었는데, 이러다가는 쓰러져 그대로 잠이 들 것 같다. 아무래도 의자에 앉히거나 조치를 해야 할 듯했다.

"아이작. 너 괜찮은 거 맞지?"

"...네에."

"전혀 안 괜찮아 보이네. 저기 앉아서 쉬고 있자."

세실리는 대강당 구석진 부분에 배치된 의자를 가리켰다. 벽도 있으니 기대어 휴식을 취하기는 딱 좋은 곳이다.

아이작도 그녀가 가르킨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이내 비척비척 발걸음을 옮겼다. 한 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있어 약간 웃긴 모양새였으나 그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혹시라도 넘어질까봐 같이 걷고 있다지만 그래도 영 불안하다. 갓 태어난 새끼 펭귄이 부모를 따라 아장아장 걷는 듯했다.

"술이... 좀... 맛있네여... 헤헤."

이제는 헤실헤실 웃기까지 한다. 세실리는 아이작의 웃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가끔 가다 장난을 쳐야 표정이 변하는 아이작이지만, 도통 웃는 경우는 잘 없었다. 웃어봤자 피식거리는 정도일 뿐, 지금처럼 바보같이 웃지는 않았다.

'웃으니까 더 귀엽네.'

보면 볼 수록 새끼 펭귄 같은 이미지다. 체구가 그렇게 작은 것도 아닌데 작게 느껴지고, 특색이 강한 외모도 귀엽게만 느껴졌다. 나이가 자신보다 한참 어려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앞으로 과도한 음주는 금지시켜야할 듯했다. 이런 모임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소문은 아이작에게도 좋지 않다. 주변에 무심한 그가 신경쓸지는 의문이지만 자신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술이 깰 때까지 여기서 좀 쉬고 있어. 알겠지?"

"네에..."

"그나저나 아이작. 정말로 글 쓰기가 취미인 건 아니지?"

은글슬쩍 취미라고 말을 바꾸며 질문한 세실리. 술에 취해 사고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아이작이니 최대한 증거를 토해내게 만들 심산이었다.

아이작은 질문을 듣고 세실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해맑게 대답했다.

"전 그런 거 몰라여어..."

"... ..."

세실리는 아이마냥 밝게 대답한 아이작을 보며 미약한 웃음을 흘렸다.

평소에는 어른스러운 면모가 강했는데 지금은 어린아이 같다. 술에 취하면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다던데 이게 아이작의 본성인 걸까. 참으로 바람직한 본성이다.

이에 세실리는 아이작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 특유의 장난기가 발동한 순간이었다.

"그래. 누나는 갈테니까 여기 얌전히 있어. 아이작은 착한 아이니 누나 말 잘 들을 거지?"

"네에..."

"그래. 그래. 아이작은 역시 착한 아이네."

머리 위에 얹은 손을 살살 쓰다듬어줬다. 따로 관리라도 했는지 몰라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동안 아이작은 세실리가 쓰다듬어주자 아까처럼 헤실거리며 웃었다. 기분이 좋다는 감정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그럼 이제 갈게. 누나 말대로 여기 꼭 있어야 해. 알겠지?"

"네!"

세실리는 아이작의 힘찬 대답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혹시하며 아이작을 확인하는 건 잊지 않았다.

아이작은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로 오뚜기 인형마냥 좌우로 왔다 갔다하는 중이다. 그걸 보고 살짝 불안해진 세실리였으나 괜찮겠지, 라며 넘어갔다.

그 후로 세실리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고 불과 3분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쿠우..."

아이작의 눈이 서서히 감기더니 결국 골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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