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4화 (35/763)

< 34화 >

에딘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행사라고 해봤자 사회자가 단상에 올라서서 짧게 진행을 하고, 마음편히 즐기라는 멘트를 끝으로 악단이 나와 음악을 연주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행사 이후로 대강당 내부의 분위기는 한층 더 무르익어갔다. 행사 전까지는 웅성거리기만 해서 약간 난잡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악단이 음악을 연주한 이후부터 달라졌다.

하지만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과 그들이 사용하는 악기에 관심을 가진 것도 잠깐이었지, 나는 에딘과 신나게 떠들기 바빴다.

"아이작 씨도 책을 많이 읽으셨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아뇨. 에딘 씨가 더 대단하죠. 저는 문학이라 여유 시간이 많지만 에딘 씨는 아니잖아요."

"칭찬 감사합니다. 혹시 탐험가 알렉시스의 자서전도 읽어보셨어요?"

"물론 읽어봤죠. 특히 애벌레를 먹고 구토맛이 난다는 부분이 재미있었어요."

"오. 그 부분을 기억하시네요. 그러면..."

에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책벌레라는 것이다. 게다가 좋아하는 장르가 자서전, 그러니까 탐험가의 이야기여서 막힘없이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다보니 자연스레 와인도 몇 잔이나 마시게 되었다. 에딘이 한 잔을 다 마시는 동안 나는 대략 다섯 잔 정도 마신 것 같다.

"에딘 너는 몬스터랑 싸운 적이 있어?"

"옛날에 아버지를 따라서 사냥에 나간 적이 있어. 그때 오크가 갑자기 나타나서 조금 놀랐지. 그래도 그리 어렵진 않은 상대였어."

"오... 그럼 오우거는? 오우거가 정말 강하다고 들었는데?"

"글쎄? 난 딱 한 번 만난데다가 그때는 다른 기사 분들이랑 협동해서 토벌했거든."

이렇다 보니 시간이 흘러 어느새 말까지 놓게 되었다. 그는 잭슨과 달리 개념이 꽉 잡혀있는 데다가 성격도 시원시원한 편이어서 내가 편히 대할 수 있었다.

에딘도 서슴없이 다가온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차가운 인상이 무색하게 이따금씩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거 참... 아, 그렇지. 아이작? 하나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물어봐도 돼?"

"물어봐. 무슨 질문인데?"

와인을 좀 많이 마셔서 그럴까. 평소였다면 약간의 경계심을 담았겠지만 알딸딸한 기분이 머리를 지배하여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와인이 쓰지 않고 단맛이 더 강하여 너무 많이 마셨던 탓이다.

그사이 에딘은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어서 우리 근처에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속삭이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아까 레킬리스 영애랑 세실리 공주님이 널 두고 싸웠잖아."

"어..."

"그때 왜 싸웠는지 알려줄 수 있어?"

약간 몽롱했던 머릿속이 확- 트이는 기분이다. 나는 질문을 듣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가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악의라고는 하나도 묻지 않은,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표정이다. 얼굴 인상이 워낙 차가워서 표정을 분간하기 힘들지만 이정도는 알 수 있다.

이에 나는 콧등을 손가락을 꾹- 꾹- 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냥... 세실리 누나가 장난친 거야. 마리는 그걸 보고 손 떼라고 한 거고. 너도 알다시피 팔짱을 끼는 건 연인들끼리나 하는 행위잖아? 그런데 마족은 좀 다르더라고. 마리도 그걸 걱정해서 떼라고 한 거야."

"세실리 누나? 너 설마 세실리 공주님을 친근하게 누나라고 부르는 거야?"

"아..."

또 말실수했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묻는 에딘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나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나는 여전히 몽롱한 정신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응. 몇 번 얘기를 나눴다가 친해졌거든. 그래서인지 장난도 잘 치고 그래."

"흠... 그래? 그나저나 너 와인 몇 잔 정도 마셨어? 얼굴이 머리색이랑 똑같아졌는데."

"글쎄? 아마..."

에딘의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맨 처음에 한 번.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한 번. 그 후로는... 그냥 와인잔이 비어있을 때마다 마신 걸로 기억했다.

"모르겠는데?"

"모르겠다고?"

"응. 맛있어서 잔이 빌 때마다 마셨어."

"... ..."

내 대답에 에딘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현재 내가 얼마나 취했는지 살펴보는 듯한 시선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나는 멀쩡하다. 정신이 좀 몽롱하고 혀가 살짝 꼬이기는 해도 정상적인 사고는 가능했다.

어디까지나 내 주관으로는.

"...오늘은 거기까지만 마셔. 그러다가 나중에 실수하겠다."

"이렇게 맛있는 걸 그만 마시라고? 어림도 없지."

"아이작. 와인은 맛있어서 마시는 게 아니야. 입가심 용이라고."

"그럼 딱 한 잔만 마실게."

"한 잔 정도라면야..."

에딘은 내 마지막 제안을 듣고 마지못해 승낙했다. 그래도 영 못 믿음직스럽지 못 하다는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와인이 4분의 1정도 남아있던 와인을 모두 입에 털어넣었다. 처음에는 쓴맛이 느껴졌으나 이다음으로 단맛과 신맛이 두루섞인 오묘한 맛이 입 안을 지배했다.

전생에서는 맥주조차 쓰다며 잘 마시지 않던 나에게 정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이거라면 몇 병은 거뜬하게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후아! 역시 맛있네. 이 와인 이름이 뭐라고 했어?"

"알키오네.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 중 하나야. 몇 년을 숙성했는지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로 달라져. 내가 알기로는 모임에 지급된 와인은 10년 정도 숙성했을 거야."

"엄청 비싸겠네."

"그렇게 비싸진 않아. 유명한만큼 제조하기 쉽거든. 그래서 평민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와인이야."

에딘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지만 지금 내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 마신 와인이 기점이 되었는지 전보다 머리가 더 헤롱헤롱거렸으니까.

제아무리 달다고 해도 역시 술은 술이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몽롱한 정신은 변함없었다.

에딘도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는지 염려하는 목소리로 나에게 권유했다.

"...제대로 취했나 보네. 이제 그만 마셔."

"딱 한 잔만 더 마실게."

"술에 취하면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세 잔이 되는 법이야. 이제 그만..."

에딘이 나를 제지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작?"

익숙한 목소리가 어지러운 정신을 뚫고 내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감미로운 여인의 목소리에 눈을 끔뻑거렸다가 고개를 돌렸다.

세실리, 그녀가 한 손에 와인잔을 든 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나의 곁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아무래도 대충 일이 끝난 모양이다.

그사이 에딘은 세실리가 등장하자 눈을 살짝 크게 뜨면서 조용히 물었다.

"...세실리 공주님?"

"아."

그제서야 세실리도 에딘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정식으로 인사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이라고 해요. 편히게 세실리라고 불러주세요 "

"시, 시그너 백작 가문의 장남, 에딘 마비 시그너라고 합니다. 헬리움의 후계자와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에딘은 그녀의 정중한 인사에 순간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예법에 따라 인사했다. 저거 분명 가슴 쪽으로 시선이 간 것이 틀림없다. 말까지 더듬거리는 걸 보면 확실하다.

역시 너도 남자였구나. 솔직히 지금 세실리의 모습을 본다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시선을 끌었을 것이다.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그나저나..."

서로 통성명을 나눈 세실리는 나에게 시선을 두더니 에딘에게 물었다.

"아이작이 왜 이렇게 됐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 그게... 와인 좀 많이 마셨습니다."

"나 별루 안 마셨다니까 그르네..."

발음이 살짝 꼬였다. 그래도 걱정 마라. 머리가 약간 어지러울 뿐이지 멀쩡하다.

아마도.

"흐응."

세실리는 내 상태를 체크하더니 미묘한 비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시야가 흐릿했지만 그녀의 장난기가 발동될 때마다 나오는 미소가 확실했다. 그 미소에 약간 불안해진 건 덤이고.

내가 그 미소를 보자마자 자동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을 때였다. 세실리는 내가 뒤로 물러나기도 전 잽싸게 손목을 붙잡더니 에딘에게 부탁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아이작을 좀 데려가도 될까요?"

"네?"

"괜찮죠?"

안 괜찮다고 해. 이놈아. 하지만 에딘은 그런 내 기대를 배반했다.

그는 나와 세실리를 번갈아 보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락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그 대신 더 이상 와인을 마시지 못하게 해주세요. 이러다가 큰일 날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가자, 아이작."

"으어우어..."

결국 세실리의 손길에 이끌려 발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실수로 와인잔을 놓칠까봐 남아있던 신경을 그쪽에 쏟아부었다.

물론 가기 전에 에딘에게 인사를 하는 건 잊지 않았다. 발음이 약간 뭉개졌지만 내 의사는 전달되었는지 에딘도 적당히 마시라며 걱정해줬다. 나 안 취했다니까 그러네.

이어서 세실리에게 이끌려 도착한 장소는 다양한 먹거리가 놓여있는 테이블이었다. 세실리는 테이블에 도착하자마자 와인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웨이터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탁했다.

"저희한테 와인을 더 줄 수 있겠어요?"

"물론이죠. 아름다운 레이디."

"그럼 아이작 너부터 받아."

"네에..."

세실리의 말에 따라 와인잔을 내미니 웨이터가 정갈한 자세로 와인을 따라줬다. 보라색이 아니라 진한 붉은색에 가까운 와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마셨던 와인과 다르다는 걸 알아채고 웨이터에게 물었다. 발음이 베베 꼬이다 못해 연체동물마냥 흐물거렸다.

"이건 무스은 와인이에여어?"

"레드칼리입니다. 알키오네와 달리 신맛이 더욱 강하죠."

"한 번 마셔봐. 맛있어. 그전에..."

세실리는 남아있던 와인을 한 입에 마시고는 웨이터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에 웨이터는 아무런 말도 없이 비어있는 잔에 와인을 부어줬다.

지금 보니까 와인의 색깔과 세실리가 입은 드레스의 색이 서로 비슷했다. 눈이 부실듯한 미인이 본인의 드레스색과 비슷한 와인을 한 손에 들고 있는 모습. 이렇게 보니 정말로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내가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감상하는 동안 세실리는 빙긋 웃더니 나에게 말했다. 고혹적인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인간 세상에서는 마시기 전에 서로 잔을 부딪히는 문화가 있다더라고. 건배라고 했나?"

"그거 원래에 드어프들이 먼저 한 거예여..."

전생에서는 어쩌다 보니 생겨난 문화이지만, 여기서는 인간이 드워프들을 따라해서 생겨난 문화다. 다양한 역사책을 읽다 보니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건배를 인간의 문화로 착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인간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을 뿐 더러 드워프들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난 전혀 모르고 있었네."

"마족은... 건배 문하가 있어여?"

"비슷한 게 있어. 잔을 위로 살짝 들어올리는 거지. 슬픈 운명을 맞이한 동족을 기리는 헌사 같은 개념이지. 그래서 이렇게 즐거운 날에는 잘 안 해."

"그렇군요오..."

나는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며 끄덕였다.

이처럼 세실리와 대화하다보면 책으로도 알 수 없던 마족의 특징을 알게 된다.

지난번에 마족의 뿔을 쓰다듬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도 알았고, 특정 주기마다 내면의 악이 더 심화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런 세세한 부분도...

"...저그면 좋겠지..."

술에 취해서 그럴까. 마음속으로 생각하던 것이 그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다행히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작게 웅얼거리는 식이어서 세실리가 들을 일은...

"적는다라... 아이작?"

없구나. 나는 당황도 잠시 고개를 들어올리며 그녀와 마주했다.

"...네에?"

"우리 건배할까?"

세실리가 싱긋 웃더니 와인잔을 내밀며 나에게 권유했다. 와인잔에 담긴 붉은 액체가 찰랑이는 모습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더이상 마시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지 몰라도 에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더 마시고 싶다.

땅-

서로 잔을 부딪히자 맑고 쾌청한 소리가 들렀다. 세실리는 건배를 하자마자 빙긋 웃더니 잔을 입에다 갖다 대었다.

나 또한 와인을 마시기 위해 입으로 갖다 대었다. 이어서 붉은빛을 띄는 액체가 점점 내 입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으으..."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웨이터의 설명대로 알키오네와 달리 단맛보다는 신맛이 강했다.

신맛이 덜한 레몬맛?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이작."

내가 입 안을 가득 채운 신맛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쯤, 세실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필름이 끊길 듯 말 듯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네에... 누나아..."

"내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물어봐도 되겠니?"

"그게 뭔데여어...?"

이제는 시야가 흐릿한 정도가 아니라 뿌옇게 변했다. 또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악단의 연주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메아리처럼 울렁거렸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세실리의 질문만큼은 귀에 생생하게 들어왔다.

"너 혹시 글 쓰는 거 좋아해?"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