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커플링 가지고 의논을 나누는 것까지는 껄껄 웃어넘길 수 있다. 아마 몇몇은 잭슨이 말한 논리 대결의 주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비교하자면 이런 거다.
국어 시간에 문학 소설 등장인물의 관계를 해석하는 것처럼, 제논 일대기도 비슷한 형식이다. 또한 제논 일대기는 이 세상의 여느 소설처럼 베베 꼬아서 설명하지 않고 눈에 확 들어오도록 썼으니 인물 관계도가 명확한 편이다.
당장 주인공 제논과 히로인 메리의 관계가 어떠한지, 진과 릴리의 관계가 어떠한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여기서 제논의 동료와 조력자까지 포함한다면 꽤나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다.
"씨발. 뭐?"
그런데 잭슨이 꺼낸 말은 어이가 털리다 못해 원작자인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원래 욕은 무의식적으로도 삼가하는 편인데 욕이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올 정도다.
잭슨도 내가 욕을 할 줄은 몰랐는지 살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는 이것 보라는 듯이 검지 손가락을 펴더니 특유의 오만한 표정으로 설명을 꺼냈다.
"욕을 하는 걸 보니 너도 감탄한 모양이군. 하긴 그 누구도 릴리가 제논에게로 갈 거라는 예상은 하지 않았을테지.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가?"
"뭐...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본질이 서로 다르니 어쩔 수 없겠지."
잭슨이 좌중에게 의견을 묻자 대체로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그 분위기를 읽고 어이가 손을 흔들며 가출하는 모습이 눈에 선명했다.
선동이라도 당한 걸까, 아니면 아직 꺼내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 걸까. 하지만 한두 명도 아니고 대부분이 동의하는 걸 보면 후자로 추정된다. 이 사람들이 바보도 아직 고작 그거 하나로 쉽게 설득되지는 않을테니.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잭슨에게 물었다. 당장이라도 소리 지르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것 뿐이야? 단지 릴리가 제논에게 호감을 보인다는 이유로?"
"물론 아니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닌, 제논 일대기 속 세상은 마족을 향한 차별이 여전히 존재해. 하물며 릴리는 빛의 교단 내에서도 장래가 기대되는 성직자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난 진의 출생이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
"출생?"
시원하게 냉수마찰을 한 것처럼,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열기가 급속도로 식어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슨 개소리냐는 심정으로 듣고 있었지만, 잭슨이 '언급'한 출생을 듣고나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도 그럴게 진의 출생은 앞으로의 전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떡밥 중 하나였으니까.
잭슨도 내 표정을 읽었는지 씨익 웃으며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서 꺼냈다.
"그래. 지나가듯이 언급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 했겠지만 악마 사냥꾼들의 수장, 사크란은 진에게 이리 말했지. '자네처럼 뿔이 크고 검은 마나의 농도가 짙은 마족은 지극히 드물다'라고. 또한 제논 일대기 속 마족은 세대를 거치면 거칠 수록 악마의 피가 조금씩 옅어진다는 특징이 있어."
"... ..."
"이 모든 걸 종합하자면 이래. 진은 마족과 마족 사이에 태어난 게 아닌, 진짜 악마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마족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 악마의 특징이 더욱 강하게 두드러질 수밖에 없을거야."
"와..."
짝- 짝- 짝- 짝-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박수를 쳐줬다. 첫 시작은 이상했지만 과정은 전부 내가 원했던 이야기에 부합한다.
실제로 진은 여타 마족과 달리 인간보다는 악마에 한없이 가까운 마족이다. 어머니가 악마에게 강간당하여 어쩔 수 없이 낳았으며 어린 시절 때부터 모진 학대를 받고 자라난 비운의 마족.
심지어 진의 어머니를 강간한 악마도 평범한 악마가 아니다. 앞으로 등장할 칠죄종 중 '식탐'을 맡고 있으며 그에 걸맞게 남의 힘을 강탈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 능력은 아들에게도 유전되어 먼 훗날, 진이 페이크 최종 보스이자 대악마, 디아블로의 힘을 흡수하기 위해 사용된다. 당연하지만 그 뒤로 힘에 잠식당해 제논의 손에 비극적으로 격퇴당하는 거고.
'그래도 아주 멍청하지는 않네.'
하는 행동은 싸가지 없고 재수없지만 머리까지 멍청한 건 아닌 모양이다. 오히려 제논 일대기를 누구보다 열심히 읽은 애독자에 가깝다.
허나 애독자라 해도 싸가지 없는 건 싸가지 없는 거다. 거기다 잭슨은 현재 행운과 불행을 동시에 가진 상황인데, 행운은 내가 제논 일대기의 원작자라는 거고 불행은 내가 제논 일대기의 원작자라는 것이다.
그동안 잭슨은 내가 박수까지 쳐주며 감탄하자 뿌듯했는지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우러러 보라는 자신감이 뿜어져나왔다.
"어때?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니까 네 말은 즉, 진의 출생 문제와 릴리의 입장이 겹치는 바람에 절대 이어지지 않는다는거지?"
"그래. 잘 들었..."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릴리가 눈을 돌리고 제논에게 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나는 잭슨의 말을 중간에 잘라버리며 내 의견을 드러냈다. 내가 단호하게 부정할 줄은 몰랐는지 잭슨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잭슨의 추리는 정말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원작자으로써 부정해야 할 건 부정해야 한다. 실제로 잭슨의 설명은 그럴 듯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창작한 캐릭터가 이상한 방향으로 평가되는 건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지?"
내가 반박하자 잭슨은 불쾌감을 담으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본인 딴에는 열정을 부었던 추리가 부정당하니 기분이 영 좋지 않은 모양이다.
물론 잭슨의 추리는 어느 정도 맞는 부분이 있기에 언급은 해주는 게 좋다.
"네 말대로 진의 출생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어쩌면 나중에 큰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지. 아니, 걸림돌이 되는 건 확실할 거야. 악마의 특징이 타인보다 짙다는 건 그만큼 인간보다 악마에 더 가깝다는 걸 의미하니까."
"... ..."
"그런데 릴리가 과연 그 사실을 모를까? 어릴 때부터 함께 한 그녀라면 그 사실을 알고도 곁에 있을걸?"
진과 릴리의 러브 라인이 애달픈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소꿉친구라는 관계다. 진은 친모에게조차 악마라고 학대를 받았으며, 더 나아가 마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진 고초를 겪었다.
만약 이대로 성장했다면 진짜로 '악마'가 되었겠지만, 우연히 릴리와 인연을 맺게 된 이후부터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흔히 구원받았다고 표현들한다.
릴리도 헌신의 끝을 보여주는 진의 모습에 사랑을 꽃피우지만, 각자의 입장과 사정으로 인해 선뜻 다가가지 못 하는 중이다.
"그리고 릴리가 제논에게 보여준 호의는 이성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의 호의에 가까워. 특히 제논은 진이 악마가 될 뻔한 적을 몇 번 막아줬잖아? 릴리 입장에서는 정말 고마운 사람이 아닐 수가 없겠지. 거기다 진과 릴리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어. 가끔가다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는 묘사라던가, 은근슬쩍 손을 잡았다는 묘사가 꽤 많지."
"... ..."
"무엇보다 릴리는 진에게 꽃을 몇 번 선물해준 적이 있어. 그게 무슨 꽃인지는 알아?"
잭슨은 내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미리 정답을 말하자면 릴리가 진에게 선물했던 꽃은 백합(릴리)이다.
백합의 꽃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대표적인 건 단연코 '순정'이다. 릴리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그녀는 진을 향한 사랑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중이다.
"...하얀 꽃, 백합이구나. 그리고 백합의 꽃말은 변함없는 사랑, 즉 순정이지."
약간의 시간이 지나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대답은 잭슨이 아닌, 우리의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한 명에게서 나왔다.
이에 나는 대답을 꺼낸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답을 한 사람은 갈색 머리카락을 깔끔히 뒤로 넘긴 미청년이었는데, 키가 크고 예복 겉으로 드러난 체격이 다부진 걸 보아 무학생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날카로운 눈매하며 턱 또한 베일 듯이 갸름했다. 전체적으로 차가운 냉미남 스타일이었다.
아무튼 할 말은 마저 해야겠지. 나는 갈색 머리의 남자로부터 다시 잭슨에게 시선을 옮겼다. 잭슨은 백합의 꽃말을 듣고나서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릴리는 진에게 백합을 선물해주면서까지 본인의 마음은 변치 않을거라 강조하고 있어. 진도 그 마음을 알기에 누구보다 더 헌신을 하는 거고. 그러니 두 사람이 이어지지는 못 해도 릴리가 제논에게 간다는 건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개연성과 릴리의 캐릭터성에 완벽하게 어긋나는 이야기지. 애당초 릴리라는 이름부터가 그 증거야."
"... ..."
"그래도 아까 전 감탄은 진심이었어. 남들이라면 쉬이 넘길만한 복선들을 캐치해서 진의 출생이 심상치 않다고 말했잖아. 솔직히 그건 나도 좀 놀라웠어."
"크윽...!"
내 딴에는 칭찬을 한 건데 잭슨에게는 아닌 모양이다. 나는 잭슨이 입술을 앙 다물고 얼굴을 붉히기 시작하자 순간 말을 잘못했나 싶었지만 곧내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금 전 '그건 나도 좀 놀라웠어'라는 발언은 원작자의 입장이 되어 말한 것이나 잭슨은 내가 원작자라는 걸 전혀 알지 못 한다. 그러니 위의 발언은 내가 본인보다 위에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
그런데 어쩌겠나. 이미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인데.
거기다 평소 잭슨이 나에게 시비를 걸었던 걸 상기하면 딱히 정정할 필요성도 못 느꼈다. 그냥 자기가 알아서 열폭하라지.
"그럼 당신도 진과 릴리가 이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잭슨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와중에 누군가 나에게 질문했다. 조금 전, 백합의 꽃말에 관한 대답을 꺼냈던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 그리고 잭슨과 달리 한껏 예의를 차린 그를 바라보며 잠깐 고민의 시간을 거쳤다. 앞으로의 전개를 곧이곧대로 말하자니 스포일러가 되는 것 같아 양심이 찔렸다.
더군다나 최악의 경우, 이 일을 빌미로 꼬리를 밟힐 수도 있다. 나는 한 번 만났다 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특색을 가졌으니까. 그런 경우는 한사코 사양이다.
이에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거친 후, 어디까지나 내 가설이라는 뉘앙스를 담아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건 작가만이 알고 있겠지만 저는 이어질 수 없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싶네요."
"어째서죠?"
"진은 릴리에게 헌신하는 기사 그 자체입니다. 릴리가 위험해지면 자기 목숨은 기꺼이 내줄 수 있다는 뜻이에요. 실제로 그런 묘사가 간간이 나오고요."
"아! 혹시 그건가요? 릴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악마가 될 수도 있다는 진의 독백이요."
이 인간은 거기까지 알고 있네. 나는 밝은 표정으로 대답한 갈색 머리의 남자의 모습에 움찔거렸다.
차갑고 감정 하나 표현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인데 지금 보니 뭐랄까...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걸 보니 특정 부분에서 열정이 넘쳐났다.
"어... 아마 그것도 일부겠죠? 어쨌거나 진은 릴리를 위해 본인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준비가 되어있어요. 설령 악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불쌍해라... 진짜 그렇게 될까?"
"그건 작가만이 알겠지. 그래도 나는 둘이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숙소로 돌아가면 하나하나 찾아봐야겠다.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들으니 정말 신기해."
내 말이 끝나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나는 상황이 어느 정도 일단락된 듯하자 잭슨을 쳐다봤다.
잭슨은 본인이 생각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자 분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글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것이 좀 추하게 느껴진다.
'그러게 누가 그딴 얼토당토않는 말을 하래?'
다시 말하지만 그의 유일한 불행은 내가 제논 일대기를 직접 쓴 원작자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의 논리에 설득됐을 가능성이 크다.
진과 릴리가 이어지지 못할 거라는 확신은 좋게 볼만하지만, 그렇다고 순정의 표본인 릴리가 제논에게 갈 거라는 건 도저히 가만 둘 수가 없었다.
나는 부들부들거리며 말조차 하지 못 하는 잭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더 할 말 있어? 난 아무거나 괜찮은데."
"...으득!"
이빨을 깨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고, 잭슨은 더이상 나와 마주치기도 싫다는 듯이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잭슨이 다른 곳으로 걸어가도 그를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걸 본 나도 슬슬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죄송하지만 붉은 머리 신사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갈색머리의 냉미남이 나를 불러세움으로써 무산되었다. 나는 살짝 당황하며 그를 쳐다봤다.
뒤이어 기대와 흥미가 담겨있는 듯한 얼굴이 내 눈에 잡혔다. 그걸 보고 귀찮은 일에 휘말렸구나라며 직감할 수 있었다.
"...아이작이라고 합니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듀커르... 마이샬?"
"마이샬이라면 붉은 사자의 성이지 않아?"
"그러고 보니 니콜 조교님도 마이샬이잖아."
역시 무학생들이라서 그럴까. 붉은 사자로 유명한 내 아버지의 성을 듣자마자 저마다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가끔 가다 니콜의 이름도 언급이 되었는데, 보아하니 신임생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것 같다. 하기야 그 얼굴에 그 실력인데 유명하지 않으면 이상한 거겠지.
"어쩐지... 붉은 머리카락하며 금색 눈동자를 보고 낯이 익다 했는데 붉은 사자의 아드님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시그너 백작 가문의 장남, 에딘 마비 시그너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에딘 님. 그나저나 저는 왜 불렀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스스로를 에딘이라 소개한 갈색 머리카락 남자는 내 질문에 별 일 아니라는 것처럼 대답했다.
"이렇게 된 거, 아이작 님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요. 아까 잭슨 님이 말했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제논 일대기라면 열광하는 팬들입니다. 아이작 님도 비슷한 것 같아서 함께 어울리면 즐거울 것 같아서요."
"... ..."
난 팬이 아니라 원작자인데요. 나는 에딘의 권유를 듣고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뭐, 잭슨과 달리 나에게 시비를 걸지도 않을테고 몇 가지 궁금한 점도 있었으네 거부할 생각은 없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겸사겸사 인맥도 늘리면 좋고.
"네. 그러죠, 뭐. 그전에 와인부터 마셔도 될까요? 목이 좀 말라서."
"아, 네. 와인이라면 저기 테이블 위에 있습니다."
나는 에딘이 가르킨 테이블로 다가갔다. 이어서 테이블로 다가가니 미리 대기하고 있던 웨이터가 직접 와인을 따라줘서 내가 직접 고를 필요도 없었다.
와인잔에 담긴 와인은 진한 보라색을 띄고 있었으며 향을 맡아보니 알싸한 포도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한 입 마셔볼까?'
돌아가기 전에 한 입 마셔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주위의 눈치를 보다가 홀짝이는 수준으로 와인을 마셨다.
"...오."
쓴맛은 전혀 나지 않고 알딸딸한 단맛이 입 안을 감돌았다. 어린애 입맛인 나에게 안성맞춤이다.
나는 와인의 맛에 만족감을 느끼며 아까의 자리로 돌아갔다. 잭슨이 떠나가도 무리가 해체되지 않는 걸 보아 정말 제논 일대기의 팬만 모은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무리에서 나오는 이야기 중 태반이 제논 일대기에 관한 이야기다. 듣는 내가 다 부끄러워질 정도로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아. 오셨군요. 때마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요?"
와인을 가지러 갔다 온 사이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간 모양이다. 내가 의문을 품으며 묻자 에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다들 메리의 출신을 두고 의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이작 님도 아시다시피 메리는 마법사잖아요? 하지만 마법은 평민이 배우기에는 매우 힘든 능력이죠. 그러니 대부분 메리가 귀족, 그것도 후작 이상이라는 부분에 가능성을 두고 있습니다."
"흐음... 그래요? 에딘 님의 생각은요?"
"저는 메리가 엘프와 연관돼 있지 않을까라며 추측하고 있어요. 제논 일대기는 외모 묘사를 꾸준히 하는 편인데 유독 메리는 풍성한 머리카락에 귀가 가려져 있다는 언급이 항상 나오거든요. 하물며 엘프는 마족처럼 마법의 대가이니 귀를 숨기는 것정도는 쉬울테죠."
"... ..."
"아이작 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새끼 뭐야. 그걸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지.
나는 하나하나 다 꿰차고 있는 듯한 에딘의 설명에 얼빠진 대답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애독자 앞에서 이런 말을 하자니 양심이 푹푹 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