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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2화 (33/763)

< 32화 >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함부로 대하기 곤란한 상황이 수 분간 이어지고 있을 때 부드러운 여인의 음색이 끼어들었다. 목소리에 의아함과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 목소리에 나는 물론이고 내 팔을 붙잡은 두 여자도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옮긴 곳에는 금발의 여자가 한 손에 와인잔을 들며 의문에 찬 표정으로 우리를 보는 중이다.

웨이브 진 황금색 머리카락과 사파이어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 금색과 흰색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오프솔더 드레스로 하여금 우아하고 고고한 기품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또한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과시하는 듯이 몸에 착용된 비싼 장신구의 숫자도 많은 편이다.

분위기가 180도 바뀐 마리처럼, 이전과 달리 학생의 모습이 아닌 일국의 '황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나타난 리나였다.

"치정 싸움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꽤 재밌네."

리나가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말하며 와인잔에 담긴 음료를 홀짝였다. 강 건너 불 구경하는 듯한 태도였으나 그녀의 말에는 뼈가 담겨있었다.

"...치정 싸움?"

마리는 리나의 말을 듣고 미간을 좁혔다가 나와 시선을 마주 쳤다. 나 또한 얼떨결에 마리와 얼굴을 마주했다.

"...아!"

그러다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내 팔을 붙잡은 손을 떼어내는 마리. 리나의 말을 듣고나서 남들에게 현재 이 상황이 어떻게 비추어질지 뒤늦게 깨닫은 모양이다.

그사이 세실리도 장난은 그만두려는지 붙잡았던 내 팔을 슬며시 놓아주었다. 가슴에 거의 파묻힌 것처럼 밀착돼 있던 내 팔이 드디어 자유로워지는 순간이었다.

약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세실리의 가슴은 솜털이 가득 들어 있는 베개처럼 푹신푹신했다. 팔을 떼어내니 그런 느낌을 더욱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누, 누, 누, 누가 치정 싸움을 한다는 거야? 오, 오해하지 마, 말아줄래?"

상황이 종료되고 마리가 리나에게 왁- 왁- 소리쳤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일어난 홍조하며, 말을 더듬는 걸 보면 누가 봐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다.

그에 리나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오해했으면 사과할게. 아무래도 세실리가 장난친 것 같은데 맞지?"

리나는 이다음으로 세실리에게 질문했다. 평온하지만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다.

"바로 눈치챘네? 역시 리나야."

세실리도 부정하지 않고 곧바로 인정했다.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라앉히며 세실리를 힐끔거렸다.

뒷짐을 지고 시선을 다른 곳에 두면서 여유로이 대답한 걸 보아 마리와 달리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째서 그녀가 이런 장난을 벌였는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장난이라고 해도 그 정도가 조금 과했으니까. 포상이니 뭐니 해도 서슴없이 팔을 붙잡는 건 누가 봐도 애정 표시에 가깝다.

'...그냥 놀리기 좋은 동생에게 장난을 치는 건가?'

세실리는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착각이 아니라 평소에 나를 대하는 태도나 장난을 본다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알게 되는 법이다.

다만 그것이 한 사람으로서의 호감인지, 아니면 이성으로서의 호감인지 이처럼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조금 전 그녀가 언급한 것처럼 포상 같은 개념이라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호감에 가까울 것이다.

'단순히 썸... 정도로 생각해야겠지.'

당장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다. 세실리가 나를 이성으로 좋아한다는 증거가 너무 빈약한데다가 설령 그렇다 해도 거리를 벌릴 생각이다.

일개 남작의 아들인 나와 헬리움의 공주인 세실리. 이것만 보아도 나와 그녀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물론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부터 상황이 역전되겠지만, 꽁꽁 숨기던 비밀을 밝힌다는 건 어느 누구에게나 꺼림칙한 일이니 예외로 두자.

이건 비단 세실리 뿐만이 아니라 마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아이작도 세실리처럼 예복이 붉은색이네? 머리색이랑 정말 잘 어울려."

"감사합니다. 리나 님도 푸른 하늘의 태양처럼 빛나는 것 같습니다."

"후후. 칭찬 고마워. 마리는 어쩐 일로 공을 들인다 했더니 전보다 더 예뻐진 것 같네?"

"너한테 그런 말 들어봤자 전혀 안 기뻐."

리나의 살가운 칭찬에도 마리는 매몰차게 대했다. 마리가 아무리 공작가 영애라지만 그보다 높은 황녀에게 무례한 태도를 연이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리나는 전혀 개의치 않은지 빙긋 웃기만 할 뿐, 별 다른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 그걸 본 마리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썩어가는 중이지만.

"...아무튼 이제부터 뭐 할 생각이야?"

마리는 못마땅하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리나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리나는 특유의 부드러운 음색으로 대답했다.

"아이작을 데리고 다니려 했지. 이참에 아이작에게도 내가 아는 친구를 소개시켜주면 어떨까 싶어서."

"꼭 아이작이 너랑 같이 있을 거라는 말투네? 아이작의 의견을 안 물어?"

"그럼 지금 물어보면 되겠네. 아이작의 생각은 어때?"

마리의 적의가 담긴 질문에도 리나는 능청스레 대답했다. 그녀는 마리의 얼굴이 구겨지던 말던 나를 보며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다시금 불편해진 상황 속에서 중지 손가락의 펜혹을 문질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당장 지금도 다양한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 여기서 리나를 따라다닌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눈초리로 볼지는 불 보듯 뻔하다.

차라리 리나가 실망을 느낄지언정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귀족들의 복잡한 정치 세계에 발을 디디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지난 번처럼 압박을 가해도 한사코 거절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리나 님에게 누를 끼칠 것 같아서 안 되겠네요."

"내가 부탁한다고 해도?"

내가 예의 바르게 거절의 의사를 표하자 리나가 예상했던 말을 꺼냈다. '부탁'이라고 했지만 엄연히 황녀가 내리는 명령에 가까웠다.

이에 나는 리나의 눈과 정확히 직시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내가 거절하지 못 할 거라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전부 틀렸다고 단언할 수 있다.

"죄송하지만 황녀 님. 저는 복잡한 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이순간만큼은 모임 그 자체를 즐기고 싶어요."

나는 힘이 실린 목소리로 리나에게 내 의사를 똑똑히 전달했다. 가슴에 손을 올려 내 단호한 마음을 피력했다.

직설적으로, 그것도 평소처럼 이름을 부르지 않고 황녀라는 명칭을 입에 담았기 때문일까. 리나의 눈동자가 살짝 크게 떠졌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몰랐다는 반응이다.

비록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겠지만, 여기서 딱 잘라 끊는 것이 앞으로의 내 신상에 이롭다.

"...알았어. 네 뜻이 그렇다면야. 싫다는 사람을 데리고 다닐 수도 없겠지."

리나도 내 마음을 알아줬는지 아쉽다는 투로 말할 뿐, 실망스럽다는 기색은 없었다. 그녀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더이상 나에게 할 말이 없었는지 옆의 세실리에게 말했다.

"그럼 세실리 너는?"

"난 리나의 친구가 누구인지 궁금해."

"알았어. 마리는..."

"내가 굳이 대답을 해야겠니?"

질문을 채 하기도 전에 까칠한 마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리나는 역시라는 듯,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리. 미리 말하지만 언제까지 그런 태도를 보일 거야? 내가 그렇게도 싫니?"

"난 가면을 쓴 사람이랑 가까워지긴 싫어. 네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그랬으면 안 됐어."

아무래도 과거에 마리가 리나에게 한 번 크게 데인 적이 있던 것 같다. 리나도 별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스스로도 본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마리의 대답을 끝으로 쥐 죽은 듯한 침묵이 가라앉은 것도 잠시, 리나가 입을 엶으로써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그 대신 목소리에는 전보다 힘이 빠져있었다.

"...우리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 세실리? 이제 가자."

"응."

"그럼 두 사람도 즐거운 시간 보내길 바랄게."

리나는 세실리를 데리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실리도 떠나기 전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살갑게 인사해줬다.

나는 왠지 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겪은 듯한 데쟈뷰에 손을 흔들어줬다. 옆의 마리는 세실리에게만 인사를 해줬지, 리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리나와 세실리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이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쯤, 마리가 나를 바라보며 제안했다.

리나를 대할 때와 다르게 환하기 짝이없는, 밝은 얼굴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도 다른데로 가볼까?"

"음..."

나는 너무나 자연스레 우리라고 칭한 마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곧바로 답하지 않은 이유는 생각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리나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정치적으로 얽히기 싫은 것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리나를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리나 세실리처럼 마음을 놓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마리는 경우가 약간 다르다. 나름대로 친하다고 생각하는데다가 그녀는 현재 나에게 모종의 호감을 품고 있다.

그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인지 사람으로서의 호감인지는 세실리처럼 분간이 가지 않지만, 적어도 불편한 관계는 절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나는 약간 걱정된다는 마음을 담으며 마리에게 물었다.

"내가 너랑 같이 있으면 리나 님의 제안을 거부한 이유가 없어지지 않아?"

"어..."

마리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말문이 막혔는지 곧바로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 푸른 눈동자가 데록데록 굴러가며 어떻게든 이유를 찾는 모습이다.

제아무리 권위의식과 거리가 먼 마리라지만, 그녀는 엄연히 레킬리스 공작가 출신이다. 피하고 싶어도 복잡한 일,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엮일 수밖에 없는 위치다.

하물며 그녀가 전에 비슷한 요지의 말을 꺼낸 적이 있다. 모임에 참여하기 싫어도 레킬리스 가문의 딸인만큼 인맥을 넓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여해야 한다고. 이건 빼도박도 못 하는 진실이다.

과연 마리는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나는 그녀의 생각이 모두 정리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줬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마리는 리나와 세실리가 있는 곳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생각을 모두 정리한 걸로 보였다.

"...지금 당장은 안 되겠네. 너도 알다시피 나도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마리가 살짝 음울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해야 할 일은 분명 인맥을 넓히는 일일 터.

나처럼 모임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면 함께 다닐만 했지만, 아쉽게도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알았어. 그럼 나중에 봐야겠네."

"응. 행사가 어느 정도 끝날 때 만나면 될 거야. 아, 그리고..."

마리는 말을 하다가 말고 내 얼굴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드러냈다.

뒤이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더니 얼굴을 살짝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아까보다 작아진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 아까 세실리가 쳤던 장난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너랑 나랑 무슨 사이냐고 물을 수도 있어. 그때는..."

"그때는?"

"... ..."

이제는 말을 흐린 수준이 아니라 말이 없어진 마리. 그와 동시에 얼굴이 점점 노을처럼 붉어지기 시작했다.

뭐, 대충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이 잡힌다. 아마 속으로 나와 어떤 사이인지 고민하고 있겠지. 나는 그녀의 입이 열릴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줬다.

이윽고 약간의 시간을 거쳐 고민하던 그녀는 나를 힐끔거렸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다소 착잡함이 실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냥 친구 사이라고 해. 알겠지? 세실리가 장난을 쳐서 걱정된 마음에 그런 상황이 발생한 거라 하고."

"응."

"...그래.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

내 무뚝뚝한 대답에 마리는 힘없이 화답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등을 돌리고 나서야 드레스의 등부분이 훤히 파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실리보다는 아니지만 마리의 드레스도 과감한 편이다.

나는 뒷모습만으로도 아름다운 자태를 내뿜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도 잠시, 상황이 일단락된 듯하자 등을 돌렸다.

"...응?"

그러다 문득 뒤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하지만 모두 착각이었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시선은 없었다.

오직 점점 멀어지는 마리의 뒷모습만이 시야에 들어올 뿐. 나는 그녀의 뒷모습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간단하게 와인이나 마셔볼까.'

테이블로 가는 도중에 아까 전 리나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이 생각났다. 여기는 17세가 되면 성인으로 간주하니 술을 마셔도 상관없다.

음주는 그닥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과연 이 세계의 와인은 어떤 맛일까. 내 입맛이 어린애 입맛이라 그런지 몰라도 쓴맛보다는 단맛이 강했으면 좋겠다.

'근데 행사 시작은 언제 하는 거...'

내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테이블로 향하던 중이었다.

"이봐! 거기 빨간 머리!"

"응?"

빨간 머리는 나를 부르는 걸까. 귀에 속속 박히는 목소리도 그렇고 이름이 아니라 빨간 머리라 부르는 것도 그렇고 누구인지 대충 알 것 같다.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가까운 거리에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에 사람들로 둘러 쌓여있지만 재수없는 상판떼기만큼은 명확했다.

나는 재수없는 얼굴과 더불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혹시나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래도 역시 빨간 머리는 나 혼자밖에 없다.

이에 나는 검지 손가락으로 나 자신을 가리키며 의문을 드러냈다.

"나?"

그 의문이 전달되었을까.

재수없는 상판떼기, 그러니까 잭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너 아니면 누구겠냐? 라는 심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나는 그 반응에 속으로 낄낄 웃으면서 잭슨에게로 걸어갔다. 그러자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점점 모이기 시작했다.

다들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아마 무학생으로 추정된다. 남자들은 대부분 키가 크거나 어깨가 넓었으며, 몇몇 여자들은 드레스가 아닌 남성용 예복을 입었다.

이어서 잭슨의 앞에 선 나는 저번에도 그랬듯이, 무뚝뚝한 인사를 건넸다. 보는 사람이 많아도 개의치 않았다.

"안녕."

"... ..."

잭슨의 얼굴이 전보다 더욱 구겨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내 인사가 불만인 듯했다.

이후로 그는 화를 삭히는 것처럼 숨을 몰아쉬더니 조용히 말했다.

"네놈은...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군. 가문에서 자기보다 높은 작위를 가진 상대에게는 존댓말을 하라고 배우지 하지 않았나?"

"... ..."

나는 곧바로 답하지 않고 눈짓으로만 주위를 힐긋거렸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흥미를 품고 이 상황을 관망하는 중이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예의없는 놈으로 몰아넣으려는 것 같은데, 잭슨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작위를 '공식적으로' 이어받았을 때의 얘기지, 우리 같은 자식은 아닌 걸로 아는데?"

"...뭐?"

내가 그리 답하자마자 잭슨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마따나 작위에 따라 예의를 차리는 건 공식적으로 작위를 받았을 때다.

물론 예외는 있다. 가령 귀족 위에 있는 왕족이 그런 케이스다. 내가 리나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던 이유가 이때문이다. 세실리는 자기가 누나라 부르라고 했으니 예외로 두자.

그런데 잭슨은 어디서 잘못 배웠는지 몰라도 이상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잭슨처럼 남들을 깔보는 마인드를 가지지 않는 이상 보통 서로 존댓말을 하며 존중하는 편이다.

"아무리 그래도 서로에게 격식을 갖춰야 하지 않나?"

"반말은 저 빨간 머리가 먼저 했잖아."

"잭슨은 쟤를 불렀을 때부터 빨간 머리라고 했어."

아, 그렇다고 내가 잘한 건 아니다.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걸 보듯이 둘 다 예의없는 놈으로 찍힌 상황이다.

허나 잭슨은 현 상황이 썩 당혹스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몰라도 본인까지 예의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혔으니까.

나는 잭슨이 당황하는 동안 대화를 잇기 위해 입을 열었다. 우선은 그가 왜 나를 불렀는지가 중요하다.

"그나저나 할 말이라도 있어? 날 부른 이유가 있을 거 아냐?"

"...흠. 흠."

내 질문에 정신을 차렸는지 잭슨이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는 특유의 깔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별 일 아니야.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네 모습이 보였거든. 그전에 재밌는 상황도 있었고 말이야."

"... ..."

"레킬리스 공작가의 영애와 헬리움의 공주. 누가 뭐래도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분들이지. 누구랑은 사는 세상이 달라."

"그래서 본론이 뭔데? 구구절절 이상한 얘기할 거면 나 간다."

"자, 잠깐! 말 좀 들어!"

내가 정말로 가려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자 잭슨이 다급히 나를 멈춰세웠다. 그도 내가 이런 행동을 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 한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나는 소중한 시간을 빼앗겨 살짝 짜증이 난 상태다. 와인을 마시려고 했더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잭슨은 퉁명스러워진 내 표정을 보다가 여전히 깔보는 뉘앙스로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단해. 서로의 논리를 시험하는 거지."

"논리?"

"그래. 원래라면 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 했지만 네가 많은 교수님들의 관심을 받는 걸 보고 생각이 바뀌었어. 지식은 검증되었고, 논리가 얼마나 좋은지 궁금해졌거든."

음...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겠다는 건가? 자기가 나보다 머리가 더 좋을거라 단정 짓고?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길래 이런 제안을 한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 오히려 잭슨에게 악수가 될 수도 있다.

보아하니 나에게 망신을 줌과 동시에 본인의 두뇌를 뽐내고 싶어하는 모양인데, 만에 하나 그가 지게 되면 역풍이 몰아칠 게 뻔하다.

나는 한쪽 눈을 치켜뜨며 의문을 드러냈다. 제안은 고사하고 주제가 궁금했다.

"주제가 뭔데? 이상한 거면 거절할거야."

"제논 일대기."

"...뭐?"

갑자기 그게 왜 나오는거야.

내가 적잖이 당황하는 동안 잭슨은 두 팔을 펼쳐 주위를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제논 일대기의 팬이지. 방금 전만 해도 앞으로의 전개가 어떻게 될지 의논을 나누고 있었어. 각자 다양한 의견과 논리가 오고 갔지."

"... ..."

"그러다 마침 네 얼굴이 보이는 거야. 문학 신입생 중 교수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네가."

"그래서?"

내 물음에 잭슨은 코웃음치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제논 일대기에는 제논과 메리가 주연이지만, 진과 릴리의 비중도 만만치 않아. 거기다 마족인 진과 성직자인 릴리의 애처로운 사랑 이야기는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애태우는 중이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제를 그것으로 하여 의논을 나누었고."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리고 난 그 사랑 이야기를 아주 비극적으로 박살낼 예정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간에 떡밥과 복선은 수거해야 하지 않겠나.

근데 커플링 가지고 의논을 나누다니, 내가 보기에는 영 그랬다. 경제나 정치 이야기를 할 것 같았는데 니콜의 말대로 애들은 애들인 모양이다.

그동안 내 긍정에 잭슨은 탄력이라도 받았는지 줄줄이 설명을 늘어놨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라. 진과 릴리는 결코 이어질 수 없어. 이건 내가 확신할 수 있지."

"...어째서?"

이 새끼 설마 내가 꽁꽁 숨겼던 떡밥을 찾은 건가?

나는 평소 바닥을 기었던 잭슨에 대한 호감도가 수직상승하는 걸 느끼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작가 입장에서 독자가 추리를 통해 전개를 예상하는 것만큼 뿌듯한 일도 없다.

하물며 복선과 떡밥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추리하는 경우라면? 내 작품을 이렇게나 사랑하는구나, 라며 생각하여 더욱 열심히 쓰게 된다.

그래서 더더욱 잭슨에게 기대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이어질 거라 생각하고 있는 진과 릴리인데 혼자서 안 된다고 하니 무언가 있을 거라...

"왜냐하면 릴리는 결국 제논에게 갈테니까."

"... ..."

"마족과 성직자의 조합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신이 허락하지 않을 거야. 릴리도 그 점을 뒤늦게 깨닫겠지. 거기다가 종종 제논에게 호의를 베푸는 행동을 보면 그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야. 나는 그의 설명을 듣자마자 진심을 담아 쌍욕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씨발. 뭐?"

이 새끼가 멀쩡한 캐릭터를 쌍년으로 만들어버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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