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정장을 입으면 자기자신이 몇 배나 더 멋져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전생에서도 정장을 입는 경우가 잘 없긴해도 입기만 한다면 나 자신이 좀 더 멋져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얼굴까지 잘생기고 몸매도 좋아 옷발이 엄청나게 잘 맞는다면?
만족을 넘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듯한 자신감이 넘쳐흐르게 된다. 전생의 어느 배우가 잘생긴 게 최고야! 라고 말했던 것처럼 외모의 중요성은 이루어 말할 필요가 없다.
"좋네."
나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정장, 그러니까 이곳 말로 예복을 입은 내 모습을 관찰했다. 거울에는 선홍빛 머리카락의 미남이 선홍색 예복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미소짓고 있다.
예복은 여느 귀족들이 본인의 부와 명성을 과시하기 위해 새기는 장식도 없고, 흔한 무늬마저 없는 평범하디 평범한 예복이다. 다른 귀족이 본다면 평범하다고 비웃을 수도 있지만 예복의 가격이 워낙 창렬적이라 비싼 옷을 사는 건 무리다. 전생에 입었던 정장과 비슷해서 스스로 흡족하기도 하고.
그리고 마냥 검소한 것도 아닌 것이, 목에는 흰색 스카프를 매고 있다. 스카프에는 미네르바 제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독수리 문양이 순금으로 새겨져 있다.
검소하지만 개성을 온전히 나타내는 패션. 안 그래도 눈에 띄는 내 붉은색 머리카락과 안성맞춤인 패션이다.
'스타일은... 이대로 가자. 딱히 건드릴 것도 없네.'
내가 메이크업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기껏 꾸며봤자 이상하게 될테니 처음부터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잘생겼는데 딱히 건드릴 부분도 없다.
그 대신 머리를 단정하게 관리하기 위해 조금 전에 미용실을 방문했다. 미용실에 방문하니 오늘 있을 모임을 위해 작정하고 꾸미는 학생들로 넘쳐났으며 그중에는 내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리나와 세실리, 마지막으로 마리까지. 이 세 사람은 다른 손님과 달리 종업원 4~5명이 달라붙어 무슨 수술을 하는 것마냥 꾸미는 중이었다.
'황녀와 공작가 영애, 그리고 마족의 공주까지. 바쁘긴 바쁘겠네.'
나는 머리 스타일만 단정하게 가꾸면 그만이었기에 빨리 끝난 편이다. 원래는 모든 인력이 3명에게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내 존재를 알아챈 리나가 배려해줘서 나부터 관리해줬다.
그래봤자 머리카락만 조금 자르면 그만이었기에 1명이면 족했다. 미용실에서 떠나기 전, 과연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기대가 되는 건 덤이었다.
'모임 시작은 5시 반부터니까...'
나는 거울에서 시선을 떼어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정확히 5시.
이제 슬슬 대강당으로 출발하면 될 것 같다. 숙소에서부터 대강당까지의 거리는 10분도 채 소요되지 않으니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자.
이어서 예복하면 필수적으로 신어야 하는 구두까지 완벽하게 신은 후, 바깥으로 나가 대강당으로 향했다. 바깥은 이제 슬슬 해가 저무는지 어둑어둑해지던 참이다.
'조금 긴장되네.'
전생에서도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지만, 지금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신입생 모임이다. 누구는 신나게 웃고 떠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누구는 인맥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자리일 것이다.
다행히 나는 전자에 가깝다는 점이지만 아쉽게도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 거기다 제일 큰 변수는 바로 잭슨이다.
그 놈이 나를 골탕먹이기 위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겠지만 단단히 대비하는 게 좋다.
'리나랑 마리도 있을 텐데 대놓고 모욕할 수도 없을거고...'
나는 대강당으로 향하는 길에 주위를 둘러봤다. 주말이라서 오가는 행인이 많은 건 자연스럽지만, 오늘은 곳곳에 멋드러진 정장이나 예쁜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누누이 말했지만 모임은 문학생 뿐만 아니라 무학생도 참석하는 행사다. 전공을 대표하는 선배나 조교도 참석할 수 있으니 인원이 꽤 많을 것이다.
'와... 저 사람은 진짜 멋지네.'
가끔가다가 내가 감탄할 만큼 멋진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훤칠한 키와 쭉 뻗은 기럭지하며 다부진 체격을 보아 필시 무학생일 것이리라.
자세한 외모는 내가 시력도 좋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멀리 있는데도 멋짐이라는 게 폭발하는 중이다. 확실히 무학생 중에 몸이 안 좋은 사람은 없을테니 뭘 입던 간에 멋져보이긴 할 것이다.
'나도 키 크고 싶다.'
아카데미에 오고 나서 키가 1cm 정도 크긴했다. 그래봤자 173도 안 된다는 점이 슬프지만.
그나마 위안이라도 삼을 수 있는 건 아직 내가 성장기라는 거다. 전생에서도 키가 175cm였으니 거기까지만 커도 나에겐 감지덕지다.
"아이작?"
"음?"
이제 슬슬 대강당 도착하기 직전,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뒤이어 고개를 옮기자마자 눈에 들어온 얼굴에 살짝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호랑이상의 미남이자 미네르바 제국의 황태자, 레오르트가 두 눈에 호기심을 품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레오르트도 예복을 입었다는 걸까.
나와 달리 레오르트는 황태자라는 위명에 걸맞은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흰색 바탕과 황금색이 조화를 이루었으며, 지난 주 우연히 만났던 잭슨이 산 예복보다 훨씬 멋져보였다.
나는 그의 외모를 발빠르게 훑어봤다가 의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레오르트 님?"
"역시 아이작이 맞군. 멀리서 붉은색이 보이길래 따라왔는데 진짜일줄이야."
"여기는 웬일이시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대충 알 것 같다. 아마 레오르트도 신입생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나선 것일테지. 레오르트도 정치학을 대표할만한 학생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리고 레오르트는 내 예상대로의 답변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 옷을 보면 자네도 짐작했을텐데? 당연히 모임에 참석하기 위함이지. 자네도 보아하니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강당으로 향하는 중인 것 같은데?"
"네."
"음..."
내 간단한 대답을 들은 레오르트가 턱을 살살 쓰다듬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거의 제복 수준으로 화려한 그의 예복과 비교했을 때 나의 것은 검소하다 못해 볼품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레오르트는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듣기 좋은 목소리로 내 모습을 칭찬해줬다.
"자네와 정말 잘 어울리는군. 붉은색이 어울리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레오르트 님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에요."
"아니. 내 눈에는 재력을 뿜내기 위해 쓸데없이 비싼 옷을 입는 귀족보다 훨씬 멋져보인다네."
"그...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 담겨있어서 더욱 민망해졌다. 레오르트는 내가 뺨을 긁적거리자 낮게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가도록 하지."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누가 뭐라고 하겠나? 만약 누군가 자네에게 겁박을 준다면 내가 친히 나서주겠네."
"그... 알겠습니다."
이이상 거부한다면 레오르트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다. 내가 마지못해 수락하자 레오르트가 먼저 두 다리를 움직였다.
나도 그가 앞으로 걸어가자 주변을 한 번 둘러보면서 뒤를 따라갔다. 나란히 걷는 건 그의 권위를 해칠 염려가 있다. 이건 집에서 배운 예절 중 하나다.
"아이작. 그러고 보니 자네는 이번에 출간된 제논 일대기 8권을 읽었나?"
앞장서던 레오르트가 나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솔직히 이 질문이 왜 안 나오나 싶었다.
나는 미리 짐작하고 있던 질문이었기에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아뇨. 읽지는 않았지만 신문은 봤습니다. 8권에 귀족을 비판하는 이야기와 증기 기관차라는 운송수단을 선보였다고 하더군요."
"그래. 귀족을 비판하는 건 그렇다 쳐도 증기 기관차는 나조차도 놀라웠지. 정말로 증기 기관차 같은 교통수단이 발명된다면 세상은 크게 변화하겠지."
"레오르트 님은 정말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증기 기관차는 전생에서 '산업혁명'을 대표하던 발명품 중 하나다. 또한 '산업혁명'은 아무런 연고도 없이 짜잔! 하고 나타난 게 아니라 예로부터 기술이 차근차근 적축되었다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러므로 산업혁명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특정 기준 이상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의미인데, 이 세상은 과학과 마법 사이에 미묘한 언밸런스함이 존재한다.
냉장고 같이 원리가 간단하다면 마법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증기 기관차처럼 복잡한 기계는 마법으로 대체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것조차 마법이지 공학이 아니다.
레오르트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는지 다소 부정적인 본인의 의견을 꺼냈다.
"글쎄... 안타깝지만 소설은 소설로만 봐야 옳겠지. 대략적인 원리를 소설에서 설명했다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해. 그 거대한 철덩어리를 마법도 없이 오직 자력으로만 움직여야하니까 그보다 더욱 복잡한 이론이 필요하겠지. 거기다 증기 기관차를 제작할 수 있는 기술력이라면 그 기술을 이용해 여러 가지 발명품도 만들 수 있을걸세."
"힘들다는 이야기군요."
"그렇지. 하지만 그런 발상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도대체 지식과 경험이 얼마나 풍부한 사람이면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 걸까? 나는 감조차 잡히질 않는다네."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게 아니라 다른 세상에서 살다 와서 그런 거다. 이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지식을 갖고 있으니 레오르트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래도 증기 기관차의 제작은 어렵다고 하니 다소 아쉬울 수밖에 없다. 신문에서도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할 바에야 마법 연구를 하는 것이 더 좋을 거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한 번 쯤은 그의 머리를 들여다 보고 싶다네. 가끔 그가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온 건지 의심스럽단 말이지. 제논 일대기도 그렇고 이 증기 기관차라는 것도 그렇고."
"... ..."
비록 흘러가듯이 얘기한 거지만 나에게는 실로 위험한 발언이었다. 천만다행히도 레오르트가 앞을 보고 있어서 망정이지, 지금 내 얼굴을 봤다간 큰일났을 거다.
나는 핏기가 싹 가신 기분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따로 거울로 확인하지 않아도 지금 쯤 내 얼굴은 새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변색돼 있을 테니까.
'이런 건 전혀 예상치 못한 건데...'
내가 초조한 심정으로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머지않아 대강당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하자 레오르트는 나에게 말했다.
"이제 여기서 헤어지는 것이 좋겠군.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말일세."
"알겠습니다."
"그럼 모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라겠네. 아 참. 혹시 니콜도 참석하나?"
"아뇨. 누나는 모임이라면 질색하는지라 불참합니다."
"음... 역시 아직도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나..."
레오르트는 내 대답을 듣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였지만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렀다.
아무래도 니콜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는 듯했다. 니콜보다 입학을 늦게 한 레오르트가 아는 사건이라면 아카데미 내에서도 유명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알겠네.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레오르트 님도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내가 집에서 배운 예법에 따라 인사하자 레오르트가 손을 흔들어주며 떠나갔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대강당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연무장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큰 규모였다. 입학식 이후로 한 번도 오지 않은 곳이었으나 막상 이렇게 보니 새삼스럽다.
'안쪽은 어떻게 꾸몄을려나?'
체육관을 두 개 이어붙인 것처럼 내부도 매우 넓었다. 나는 기대감을 안고 대강당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본격적인 행사가 5시 30분이지, 그전부터 대기하는 건 상관없었기에 입구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입구를 통과하여 대강당 내부에 진입했을 때였다.
"...대단하네."
나는 대강당 내부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자마자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천장에는 언제 달았는지도 모를 샹들리에가 설치되어 내부를 환하게 밝히는 중이었고, 그 아래에는 길게 늘어진 테이블들과 그 위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놓여있었다.
특히 중앙이 텅 비어있는 걸 보면 무도회처럼 춤을 추기 위한 공간으로 추측되었다. 모임 수준이 아니라 고위급 귀족이 초청한 파티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사람들은... 꽤 많네.'
문학생, 무학생 가리지 않고 참석하는 모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바글바글거렸다. 참석 여부는 분명히 자유였던 걸로 알고 있는데 정말 많은 학생들이 참석했다. 저중에는 신입생뿐만 아니라 전공을 대표하는 선배와 조교들도 포함돼 있을 것이리라.
나는 벌써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침을 꿀꺽 삼키며 두 다리를 옮겼다.
"호호호. 그래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감사합니다. 레이디께서 웃으시니 정말 아름답네요."
"정말요?"
단상으로 다가가면서 중간중간 대화 내용이 귀에 들어왔지만 그다지 신경 쓸 부분은 없었다. 지금은 아는 얼굴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물론 아는 얼굴이 있다고 무작정 다가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아는 그들이라면 분명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있을테니까.
괜스레 아는 척을 해서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갈 바에야 뻘쭘하게 있는 편이 훨씬 낫다.
'그냥 음식이나 먹을까? 마침 배도 고프니...'
내가 그 생각을 하며 슬그머니 테이블 쪽으로 가려던 찰나였다.
"아이작!"
"... ..."
"아이작! 여기야! 여기!"
이놈의 빌어먹을 빨간 머리 같으니라고.
나는 귀에 친숙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속으로 한탄했다. 목소리가 저렇게 멀리 들리는 걸 보면 분명 멀리 떨어져 있는 게 확실한데 정확히 나를 본 알아 본 모양이다.
하기야, 머리도 빨간색이고 양복도 빨간색인데 나를 못 볼 수가 없다. 저렇게 목청을 높히며 부를 줄은 몰랐지만.
그에 나는 반쯤 포기하며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머리카락과 악마의 상징인 뿔이 솟아나 있는 걸 보면 세실리였다. 아무래도 미용실에서 모든 메이크업을 끝내고 온 듯한...
"...어?"
그러나 내 생각은 거기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세실리가 가까이 다가오면 올 수록 그녀의 파격적인 의상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순간 잘못 본 건가 싶어 두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세실리의 드레스가 바뀔 일은 절대 없었다. 나는 입을 살짝 벌리며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눈에 담았다.
내 머리카락이 붉은색에서 좀 더 밝는 선홍빛이라면, 그녀의 드레스는 붉은색보다 어두운 체리색이었다. 그녀와 잘 어울리는 색상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드레스 자체가 문제다.
보통 노출이 심한 드레스라고 해봤자 등과 어깨가 완전히 드러나거나 가슴이 살짝 보이는 것밖에 되지 않는데, 세실리의 드레스는 그것보다 더 심하다.
허리 라인에서부터 옷줄기가 V자로 갈라져 세실리의 가슴을 일부나마 가렸지만, 말만 가린 수준이지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가슴 때문에 거의 다 노출된 상태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올 때마다 가슴이 조금씩 흔들거려 음심을 자극시켰다.
"생각보다 늦게 왔네. 분명 우리보다 빨리 가지 않았어?"
"... ..."
"그러고 보니 아이작도 나처럼 붉은색 옷이잖아? 잘 어울린다, 얘."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세실리가 늘 그랬듯이 친근하게 대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반가운 인사에도 쉬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복장도 복장이지만 향수라도 뿌렸는지 장미향이 내 후각을 자극했으며, 은연히 풍기는 색기가 평소 묻어두었던 내 음습한 욕망을 수면 위로 끌어내려고 한다.
서큐버스와 대면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나는 시선을 얻다가 둬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 했다.
"난 어때? 잘 어울려? 다른 사람들은 어울린다고 칭찬해줬는데 아이작은?"
그러거나 말거나 세실리는 내 기분도 모르는지 드레스의 양끝을 잡아올리며 물었다. 목소리에는 기대와 특유의 장난기가 담겨있었다.
나는 그 질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한 번 세실리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꿀꺽-
말로 하는 대답 대신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이 되었던 걸까.
"풋."
"... ..."
세실리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요망하게 웃었다. 그리고나서 놀리듯이 말했다.
"아이작 얼굴 엄청 빨개졌어."
"... ..."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얼굴이 안 빨개지는 남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필시 고자거나 게이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