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시간이 상대적으로 빨리 흘러가는 경우는 몇이나 있을까. 사람마다 기준은 다 다르겠지만 구분하자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너무 즐겁거나 재미있는 일을 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겼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은 무언가에 집중할 때 시간이 쏜살처럼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 후로 아쉬움과 함께 부족한 시간을 탓한다.
두 번째는 하루 하루가 반복되는 일상이 이어질 때. 이 경우는 약간 다르다. 과정은 지루하기 그지 없지만 막상 돌이켜보면 시간이 엄청 빨리 지나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는 위의 두 가지 현상을 모두 겪고 있다. 내가 듣고 싶은 강의는 재미있게 들어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지루한 강의는 멍 때리다보니 빠르게 지나갔다.
결과적으로 누나랑 같이 예복을 구매한지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금요일이다. 나는 금요일 마지막 강의인 경제학을 듣지 않아서 3시가 되면 모든 수업이 끝난다.
"오늘의 강의는 여기까지. 내일 있을 모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여러분."
머리를 짧게 깎인 교수가 공손하게 인사함과 동시에 강의실 내부는 박수 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나 또한 그의 명강의에 힘찬 박수로 화답했다.
방금 내가 들은 강의, '군사학'은 그저 점수를 따기 위한 강의에 지나지 않았지만 교수가 워낙 설명을 잘해주니 자연스레 관심이 간 케이스다. 전생의 역사 지식을 토대로 이것저것 묻는다면 교수도 내가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해줬다.
"그리고 아이작 학생?"
"네?"
박수 소리가 점점 잦아질 때 즈음, 교수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의 지목에 박수를 치다 말고 멈칫거렸다.
교수는 특유의 엄격한 표정을 유지하며 강조하는 듯한 뉘앙스로 말을 꺼냈다.
"아까도 말했지만 바다 위에서 이루어지는 해전(海戰)은 지상전과 양상이 전혀 다릅니다. 학생이 말한 대로 '화신(化身)'이 있다고한들 압도적인 체격 차이에서 나오는 힘은 이기지 못 하는 법이에요."
"아... 네."
"그래도 꽤 좋은 질문이였습니다. 눈에 띄는 무력을 갖춘 병력도 없고, 단지 지휘만을 이용해 불리한 전황을 뒤집는 방법. 하지만 현명한 지휘관이라면 애당초 그 전투에 나서지도 않았을 거라는 점을 유의해 두세요. 그럼."
군사학 교수는 간결하게 설명해주고는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가 강의실 밖으로 나가고 난 뒤에도 얼떨떨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명량해전은 어떻게 이긴거야?'
내가 강의 도중에 질문한 주제는 '명량해전'이다. 성웅, 이순신 장군이 이루어낸 업적이며 한국인이라면 결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역사적 진실.
물론 자세한 시대적 배경은 설명하지 않고, 내가 나름대로 이 세상에 걸맞게 대입시켰다. 명량해전에서도 조선 수군은 숫자가 부족할지언정 스펙 자체는 훌륭했으니 이것저것 덧붙이는 건 잊지 않았다. 이 하나를 위하여 2주 동안 조용히 강의만 들었으며 오늘이 되어서야 질문했다.
하지만 군사학 교수는 딱 잘라 말했다. 상대방에도 큰 피해를 입히는 건 가능하겠지만 승리를 점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심지어 지휘관이 신의 선택을 받은 '화신'이라 할지어도 말이다.
'내가 비유를 너무 이상하게 했나? 그것도 아니라면...'
지구와 이 세상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이순신의 존재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건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심지어 내가 교수에게 말했던 수군의 상황보다 원역사의 상황이 더 최악이었다. 혹시나 해서 배경과 상황을 조금 더 좋게 만들었는데도 교수는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었다.
"뭘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니? 내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내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현실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고뇌하던 중, 옆에 앉은 마리가 피식거리며 나에게 말했다. 그에 나는 생각을 잠시 멈추며 그녀를 쳐다봤다.
마리는 한쪽 입꼬리를 삐죽 올린 채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고작 12척을 배로 100척이 넘는 병력을 어떻게 이기겠니? 나 같으면 그딴 전투를 감행할 지휘관의 목을 잘라버렸을걸? 차라리 그 병력을 보존해서 다른 병력과 합치는 게 낫지. 병사 입장에서 개죽음도 그런 개죽음이 없을거라고."
그런데도 이순신 장군은 이겼어. 심지어 왕에게 반쯤 버림받은데다 자기 손으로 일군 군사는 원균이 그 전에 다 말아먹었다고.
하지만 위의 말이 나올 일은 결코 없었다. 그저 바보같이 웃으며 그녀의 말에 동의할 뿐이었다.
"하하하... 역시 그렇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
"넌 가끔 가다가 괴짜 같은 면모가 있더라."
마리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또한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거니?"
우리 두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뒤에 앉아있던 리나가 부드러운 음색으로 물었다. 참고로 리나의 옆에는 세실리가 앉아있다.
원래 세실리는 제논 일대기 8권을 다 읽기 전까지 리나와 따로 앉기로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8권을 다 읽은 모양이다.
"너도 알잖아. 나랑 아이작은 경제학을 안 듣는 거. 그건 왜?"
그동안 마리가 까칠함이 묻어나오는 어조로 대답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마리가 리나를 불편해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이전까지는 알음알음 경계했다면 지금은 거의 대놓고 까칠하게 대했다.
허나 리나는 여유만만만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린 것이 마리의 행동에도 개의치 않다는 걸 단적으로 드러냈다.
"그냥 아쉬워서. 너희랑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거든."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지 말아줄래? 가자, 아이작."
"어... 응."
"둘 다 내일 모임에서 봐~"
내가 걸음을 옮기기 전에 세실리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나는 그녀의 인사에 홀린 듯이 손을 흔들어 주고는 서둘러 마리의 뒤를 따라갔다.
마리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리나에게 인사하는 건 잊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꾸벅이는 걸로 인사하자 리나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미소에 살짝 불안감이 들었지만 애써 떨쳐냈다.
"정말이지... 그 짜증나는 미소는 언제 봐도 싫어."
강의실 밖으로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중에 마리가 투덜거렸다. 투덜거렸다기보다는 거의 뒷담을 내뱉는 수준이었다.
나는 마리가 왜 리나를 싫어하는지 궁금했으나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본래 이런 건 본인이 직접 묻기 전까지 삼가하는 편이다.
그 대신 다른 주제로 분위기를 전환하는 게 좋다. 나는 마리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너도 내일 모임에 참석할거지?"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돼. 나는 레킬리스 공작의 딸이니까. 미리미리 인맥을 쌓아둬야지."
니콜은 모임을 신입생들이 웃고 떠들고 즐기는 행사라 말했지만, 마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건 또 아는 듯싶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귀족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연줄 즉, 인맥이다.
인맥이 없다면 위기의 상황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없을테고 무엇보다 귀족에게 있어서 정치는 빼놓을 수 없는 사안이다.
평민에게 신입생 모임은 그저 행사에 불과하지만, 귀족에게는 인맥을 쌓기 위한 공간이다. 간단히 말해 훗날을 대비한 예행 연습이라 보면 된다.
"너도 참석한다고 했지? 리나한테 들었어."
마리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언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맞는 이야기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긍정하자 마리의 고운 미간을 살짝 좁혀졌다. 불편히다는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진짜 사람 불편히게 만드는 재주는 있네. 설마 리나가 압박한 건 아니지? 솔직히 말해."
"절대 아니야. 내가 자발적으로 참여한 건데?"
"음..."
나의 부정에 마리가 푸른색 눈을 똑바로 뜨며 나를 직시했다. 전에 세실리가 언급했듯이, 나는 속내가 얼굴에 잘 드러나는 편이다.
비록 마리는 세실리처럼 독심술 수준으로 내 표정을 읽진 못 하나 얼굴색을 통해 어림짐작하는 편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켜 얼굴색이 변하지 않도록 제어하고 있다.
잠시 후,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마리가 애매하다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다행히 얼굴색이 변하진 않은 모양이다.
"정말로 자발적인거지? 리나가 참석했으면 좋겠다- 이런 뉘앙스로 말하진 않았고?"
"절대 아니야."
리나를 싫어하는만큼 리나를 잘 아는 마리다.
"그리고 예복까지 샀는 걸?"
"예복?"
"응."
"흐응..."
마리는 내가 예복을 샀다는 말에 나를 묘한 비음을 흘리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마치 품평을 하는 듯한 시선인지라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이윽고 마리는 모든 품평(?)을 끝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만족한다는 목소리였다.
"꽤 잘 어울리기는 하겠네. 누가 만든 걸로 샀어?"
"어... 몰라. 누나가 골라준 거라서."
"가격은?"
"7골드 99실버였나?"
"엥? 겨우 그거밖에 안 해?"
역시 공작가 딸내미 클라스라고 해야 하나. 8골드, 즉 한화로 무려 80만원이나 하는 예복을 '겨우'로 취급했다.
나는 새삼스레 그녀의 집안을 떠올렸다가 역으로 물었다.
"그럼 너는?"
"나는 가문에서 갖고 온 게 있어. 아빠가 생일 선물로 준 건데 무려 그 유명한 젤트가 나를 위해 제작해준 드레스야."
마리가 우쭐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나는 젤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아마 재봉과 관련된 장인이지 않을까.
이 세상은 트레이닝복이나 레깅스를 보듯이 옷을 만들기 위한 원단 자체는 잘 발달해 있다. 연금술이 화학을 대체할 수 있을 뿐 더러 레시피가 널리 퍼져있어서 어느 정도 양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옷을 제작하는 건 별개의 이야기다.
여기는 재봉틀조차 발명돼 있지 않아 손으로 직접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야 한다. 그래서 평민은 몰라도 귀족의 옷은 장인들이 제작하기에 가격이 무시무시하게 비싸다.
"엄청 비싸겠네."
"당연하지. 어림잡아도 100골은 거뜬히 넘어갈걸? 뭐, 젤트가 제작한 것치고는 싼 편이지만."
고작 드레스 한 벌에 1000만원이나 한다니, 역시 부자들의 세계는 이해할 수 없다.
마리는 이야기를 하다가 장난기가 돌았는지 악동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자신감을 듬뿍 담으며 나에게 선언하듯이 말했다.
"내가 드레스 입은 모습 보고 반하지나 마. 우리 오빠도 마지못해 예쁘다고 해줄 정도였으니까."
나는 그 장난에 딱 한 마디로 응수해줬다.
"지금도 예쁜데."
"...에?"
"지금도 충분히 예쁘다고."
"어... 어어..."
무뚝뚝하지만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린 걸까. 백설기 같은 그녀의 피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내 대답이 꽤나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마리가 아름다운 미녀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나는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했을 뿐이고.
"어... 저... 그게... 으으..."
그 뒤로 마리는 한참 동안 안절부절 못 하며 쉽게 말을 꺼내지 못 했다. 얼굴도 손가락으로 누르면 붉은 물이 뚝- 뚝- 흐를만큼 새빨개진 상태다.
그걸 보고 괜히 말했나 싶었지만 장난은 그녀가 먼저 쳤다. 솔직히 장난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진심을 담은거라 번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 그... 고마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 그 말을 들으니까 좀 당황스럽네."
"내가 어때서?"
"너는 그러니까... 무뚝뚝한데다가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다 티가 나잖아? 그러니까... 아무튼 그래."
마리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땅바닥만 쳐다보며 걷던 마리가 나를 향해 힐끔거렸다.
"...아이작."
"응."
"나 정말로 예뻐?"
"정 못 믿겠으면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 열에 열은 다 예쁘다고 하지."
"...히히."
그렇게도 좋은 건가.
마리는 내 무뚝뚝한 대답을 듣고 배시시 웃었다. 괄괄했던 첫 인상과 달리 사춘기 소녀다운 풋풋함이 묻어나오는 중이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나올만큼, 마리의 색다른 면모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아이작."
"응."
"방학 때 우리 저택에 꼭 올 거지?"
왠지 그 말이 이상한 방향으로 다가온 건 내 착각일까. 화기애애한 지금의 분위기도 그렇고 마리의 반응도 그렇고 묘하게 느껴졌다.
어쨌거나 적당한 이유도 있겠다, 거부할 생각은 없다.
"당연히 가야지. 제논 일대기 작가도 온다고 네가 말했잖아?"
마리에게서 그 사실을 듣고나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아버지는 꼬리가 밟힌 적은 전혀 없고, 사칭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답장을 보내주셨다.
덕분에 안심이 됐지만 사칭범의 정체가 더 궁금해졌다. 과연 어떤 간 큰 놈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공작에게 사기를 치려고 하는 걸까.
마리는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가 뒤늦게 깨달았다는 목소리로 알려줬다.
"아~ 그거? 내가 깜빡하고 말을 안 해줬구나. 아빠가 그 사람 사칭이래."
"뭐?"
"사칭이었다고. 여러모로 수상한 정황이 있어서 조사하니까 그 전부터 유명한 사기꾼이었데. 지금은 제논 일대기가 유명하니 작가로 사칭하려다 우리한테 걸린거고."
썩 당황스러우면서도 허무한 결과였으나 따지고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공작이라면 쉽게 믿지도 않을테니 사람을 시켜 꼼꼼이 조사했을 터.
사실상 사칭범이 제 무덤을 팠다고 봐야 옳다. 한탕 크게 벌어볼 생각이었겠지만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그리고 아빠가 한 번 만나봤는데 글을 오래 쓴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굳은살? 그런 것도 없어서 처음부터 의심했다고 들었어. 아이작도 갖고 있지 않아?"
"이거?"
나는 손을 들어 그녀가 설명한 '펜혹'을 보여줬다. 마리는 내 중지 손가락에 나있는 펜혹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응. 응. 그거 맞아. 우리 아빠도 서류 작업을 하면서 그쪽에 굳은살이 배겼거든. 근데 너는 우리 아빠보다 더 심한 것 같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이야."
이제 이 정도는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다. 마리는 내 대답을 듣고 어련하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이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우리 저택에 안 올 거야?"
"음..."
그녀의 질문에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마리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초대받은 작가가 사칭으로 들통난 이상 내가 그녀의 저택에 방문할 이유는 없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갈 필요도 없고...'
공작이 사람을 시켜 사칭을 잡았다지만 마리의 이야기를 들으면 원래부터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작과 대면하고 악수를 나누는 순간 내 펜혹의 존재를 알아차릴 가능성이 높다.
마리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공부를 많이 한 탓에 생긴거라고 답할 수는 있겠지만, 원래 의심이라는 건 한 번 받게 되는 순간부터 무럭무럭 자라는 법이다.
특히 공작은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둘테니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나이를 지긋하게 드신 현자로 생각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변태도 아니고 호랑이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머리를 들이밀 이유가 없다.
나는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를 힐긋거렸다가 조심스럽게 대답을 꺼냈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거부할 건 거부해야 옳다.
"...아마도?"
"에이씨... 그냥 말하지 말... 아니지."
마리는 실망을 담아 투덜거렸다가 번뜩이는 생각이라도 났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턱을 살살 매만지며 무언가 계획을 짜고있는지 표정도 힌없이 진지했다.
도대체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기에 저렇게 진지한 걸까. 저렇게 진지한 얼굴은 내가 그녀와 지내면서 처음 봤던지라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안 된다면 되게 해라... 안 온다고 하면 오게 해라..."
"... ..."
"...좋았어. 아이작?"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마리가 방긋 웃으며 나를 불렀다. 나는 불길함이 차올라 딱딱하게 대답했다.
"왜."
"내가 초대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아빠가 초대해도 거절할 거야?"
"...야."
이제는 아빠 빽을 이용해서 가불기를 시전하네.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해도 마리는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말은 안 했지만 우리 아빠도 너한테 관심이 있으시더라고. 얼마나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 학생이 역사를 가르쳐준다는 걸까, 라고 하셨어. 게다가 여기서 내가 역사 점수를 좋게 받으면 더더욱 관심을 주시겠지?"
"... ..."
"어떡할래? 내가 부탁할 때 올래, 아니면 우리 아빠가 부탁할 때 올래?"
"그래. 갈게. 가면 되잖아. 치사해서 진짜."
"좋았어!"
내가 포기했다는 뉘앙스로 대답하자 마리가 두 손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나는 기뻐하는 그녀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마 마리라서 마지못해 수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조건적 거절했다. 마리는 인지하지 못 했겠지만 방금 상황은 엄연히 '권력'을 이용한 거다. 그녀의 가문, 레킬리스의 이념으로부터 한참 동떨어진 행위다.
하지만 지금 그 사실을 알려줬다간 마리가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 일은 가슴 속에 묻어두는 편이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좋겠지.
거기다 마리가 방방거리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부정적인 마음조차 사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그럼 허락한 거다? 갑자기 안 된다고 하면 혼날 줄 알아."
"알았어. 그런 일은 절대 없을테니까 걱정 마."
"그래. 그럼 내일 모임에서 봐! 안녕~!"
마리는 손을 힘차게 흔들어주면서 여학생 전용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 또한 손을 흔들어주면서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교복을 대충 벗어던지고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푹신한 감각이 전신을 파고들어 이대로 쉬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들었다.
'공작가는 그렇다 쳐도 내일은 모임에서는...'
모임은 문학생만이 아니라 무학생까지 한데 모이는 행사다. 니콜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는 했으나 걱정이 되는 건 여전했다.
당장 잭슨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안달이 난 상태였으니까. 모임에서 어떤 모욕적인 언사를 받을지 궁금해졌다. 물론 나는 잭슨을 어른애 취급하고 있는지라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머리의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바락바락 소리질러봤자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는다. 선민사상에 찌든 것도 중2병처럼 느껴져서 썩 와닿지 않았다.
'그나저나 레오나는 참석하려나?'
문득 수인인 레오나가 떠올랐다. 과연 그녀는 내일 모임에 참석할까. 솔직히 그녀의 사정을 보면 참석하지 않을 확률이 크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옷걸이에 내일 내가 입고 나갈 예복이 걸려있다. 저 예복 하나만 해도 80만원이 넘는다.
'그 값을 하기를 바래야지.'
그리 생각하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시간을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다. 이럴 때일 수록 원고를 작성하는 편이 이롭다.
이어서 책상에 앉아 강의용 노트가 아닌, 전개를 정리한 노트를 펼쳤다. 세심하게 정리된 전개 및 에피소드가 적혀있었으며 등장인물의 특징과 대략적인 설명 또한 기록되어있었다.
'칠죄종에서 분노는... 수인으로 하자. 인간에게 가족이 몰살당하고, 심지어 같은 수인에게도 배신당했다는 설정을 추가하면...'
나는 아버지가 선물해준 마법필을 앞주머니에서 꺼내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