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7화 (18/763)

< 17화 >

내가 이곳에 환생한 이후로 관심이 가던 게 무엇이냐 물으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를 꼽자면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번 생각해 보아라. 지금까지 살면서 당연시 여겼던 역사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들로 채워져있다. 지구의 운명을 바꾼 1차 세계대전이나 2차 세계대전은 사라졌고, 대한민국의 명운을 뒤바꾸었던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도 없다.

사실 없다라는 말보다는 행성 자체가 달려져서 발생한 현상이지만 그래도 실로 흥미롭다. 전생에서도 궁금한 역사는 인터넷 뿐만 아니라 책을 뒤져서라도 찾는 편이었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때는 소설을 읽다가 도저히 못 버티겠다 싶으면 역사책을 여러번 정독했다. 역사는 소설과 달리 원인과 결과가 확실하고, 비록 주관적이긴해도 다양한 내용이 실려있으니 흥미를 돋구기에는 충분했다.

'도서관에도 책이 엄청 많던데. 빨리 읽고 싶다.'

전생으로 치자면 월요일 다음 날인 화요일. 나는 역사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노트를 끄적거렸다. 어제의 실수 덕분에 오늘은 강의용 노트를 들고 왔다.

강의용 노트에는 내가 따로 정리한 이 세계의 역사가 분석되어있었는데, 단순히 특정 나라의 역사가 적혀있는 것이 아니다.

전생으로 치자면 '2차 세계 대전' 속에 어떤 사건이 터졌는지, 또 어떤 전투가 발생했는지, 또 어떤 인물이 활약했는지에 대한 분석글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도 지구의 2차 세계 대전처럼, 종족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발생한 '종족 전쟁'이 존재했다. 이는 정확히 500년 전에 벌어졌던 사건으로 인간, 드워프, 엘프, 수인, 마족 가리지 않고 전쟁을 치룬 대사건이다.

'인간끼리도 아니고 종족끼리 전쟁을 치룬 경우라 분석하기 빡세네.'

엘프는 타종족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선민사상과 고지식함, 그리고 오만 때문에 자충수를 둔 경우가 많고, 드워프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으나 반쯤 인간 편이었다.

어째서 드워프가 인간 편에 들었냐면 간단하다. 인간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또 드워프의 무기를 제일 많이 사들였으며 엘프와는 사이가 안 좋았으니까.

수인은 당시 인간에게 노예 취급을 당해 엘프의 편에 붙었고, 마족은 '분노'와 '절제' 두 분파로 나누어 서로에게 마법을 발사했다. 공통점은 두 종족 모두 인간에게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는 걸까. 그 후로 인간과 수인과의 사이는 나빠질대로 나빠졌고, 엘프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후에도 서로 험악한 편이다.

하지만 이중에서 제일 복잡한 건 당연하게도 인간이다. 겉으로는 담합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온갖 정치와 권모술수가 난무하여 제 살을 깎아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난세에 항상 등장하는 '영웅'이 출현해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각 종족마다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중 가장 수혜를 입은 건 당연히 드워프겠지. 돈도 많이 벌고 인명 피해도 적었으니까.'

만약 다른 종족이 드워프를 건드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종족 전쟁은 상처만 남은 무승부가 아니라 한 쪽으로 기울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엘프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알아서 무너진거지? 너무 얕본건가?'

종족 전쟁에는 여러가지 대규모 전투가 있었고, 그 전투가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서적도 존재한다. 나는 그 서적들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의문점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읽은 역사서적은 대부분 인간의 관점으로 기록돼 있는지라 온갖 추측만 난무할 뿐, 엘프가 어떤 이유로 자충수를 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종전 직후 세대 교체가 일어난 걸 보면 그것과 연관돼 있는 건 확실했다.

'엘프측의 주요 전력이었던 아이케르가 갑자기 체포된 것도 그 이유에서겠지. 하여간 어딜 가나 꼰대가 문제야.'

무려 10년 간의 기나 긴 시간 끝에 전쟁은 막을 내렸다. 무려 10년동안 전쟁을 치뤘으니 드워프만 제외하면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인간 측에서 몇몇 왕국은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파산하거나 미네르바 제국에게 흡수당했다.

종족끼리의 전쟁은 끝났으나 인간끼리의 전쟁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단 말이야.'

전생에서도 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어도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이 발발한 것처럼, 이 세계도 비슷한 과정을 밟은 적이 있다. 다만 과학이나 공학이 발달하지 않고 마법이 급속도로 발달됐다는 게 차이점이다.

문제는 발달한 게 지금 이 수준이다. 과거에는 마법이 얼마나 고차원적인 능력인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인간들은 말 그대로 선택받은 자들만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리라.

"음..."

"... ..."

"...응?"

고민을 하느라 집중력이 살짝 깨진 사이, 누군가 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나는 노트에서 시선을 떼어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얇디 얇은 허리 라인과 존재감을 드러내는 가슴을 넘어서 마침내 얼굴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동그란 안경 너머에 호기심이 듬뿍 담긴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하게 됐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가 얼굴을 마주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교수님?"

역사학을 담당하는 교수, 엘레나 헤븐싱어 교수다.

엘레나 교수는 연두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안경을 써서 지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미녀지만 가장 큰 특징이라함은 바로 길쭉하게 뻗어있는 귀다.

이즈음되면 눈치챘을텐데 엘레나 교수는 미의 화신이자 여러 종족 중에서도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알려진 종족, '엘프'다.

어째서 엘프가 헤일로 아카데미에 있는지 물어볼 수도 있으나 사실 별로 신기한 일은 아니다. 아까 말했듯이 엘프는 종족 전쟁 이후 세대 교체가 일어났으며, 그 세대 교체에는 이종족과의 활발한 교류도 포함돼 있다.

그렇기에 그녀가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교수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엘레나 교수 뿐만 아니라 무학에서도 중에서도 엘프 신입생과 교수가 있다. 안타깝게도 문학에는 엘프 신입생이 없는 것 같지만.

"이거 다 네가 적은거니?"

내가 눈을 껌뻑거리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엘레나 교수가 노트를 가리키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녀가 가르킨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 놈의 집중력 때문인지 바로 앞에 누가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제논 일대기에 관한 필기가 아니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질문에 화답했다. 엘레나 교수는 손으로 턱을 괸 채 내 노트와 나를 번갈아보시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잠깐 보여줄 수 있니?"

"네. 뭐..."

그녀에게 노트를 주면서 시간을 확인하니 수업 시작까지 10분 정도 남아있었다. 지난 주에도 약 20분 전에 오셨으니 딱히 이상할 건 없다. 단지 내 필기에 관심을 보이는 게 조금 당황스러울 뿐.

내가 살짝 쫄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동안에도 엘레나 교수는 내 노트를 유심히 쳐다봤다. 가끔씩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무언가 골몰하는 것처럼 턱을 어루만졌다.

뒤이어 마지막 페이지까지 정독한 엘레나 교수는 짤막한 감평을 꺼냈다.

"분석은 꽤 잘 되어있네. 종족 전쟁이라는 큰 틀 안에 각 종족 간의 상황도 잘 설명돼 있는데다 원인과 결과도 명확해. 인간의 역사만 집중돼 있는 건 조금 아쉽지만 이건 차차 보안하면 될 거고. 조금만 다듬고 보안한다면 논문으로 제출해도 손색이 없겠는 걸?"

감평을 내놓던 엘레나 교수는 뒤늦게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아, 하며 정정했다.

"아니지. 이건 애시당초 논문 형식으로 쓴 게 아니잖아? 그런데도 이정도면 엄청 대단한 거지. 글을 엄청 잘 쓰는구나?"

"치,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작이라고 했지? 이런 건 누가 가르쳐 줬어?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은데?"

엘레나 교수가 한 손에 든 노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무어라 대답할지 고민하다가 쑥쓰럽다는 듯이 대답을 꺼냈다.

"스스로 터득한 거예요."

"정말로?"

"네."

전생의 대학교에서 배웠다는 건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다. 엘레나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뭇 놀랐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난 주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맨 앞자리에 앉은 걸 보면 역사에 관심이 많나보네?"

"재밌잖아요."

다른 건 몰라도 이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전생에서도 역사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파고들면 파고들 수록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와 내 상상력을 자극했다.

엘레나 교수도 그런 내 대답에서 진심이 느껴졌는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잠깐만 기다리렴."

그녀는 나에게 노트를 돌려주더니 저 말만 남긴 채 강의실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의문도 잠시, 왼쪽에서부터 들린 목소리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교수님에게도 칭찬받는 걸 보면 아이작은 글쓰기 능력이 뛰어난가봐? 펜혹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네."

리나였다. 그녀는 턱을 괸 채 흥미와 관심이 담긴 푸른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살짝 움찔한 것도 잠시, 중지 부분에 볼록 솟아난 펜혹을 어루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리나는 내 헤픈 웃음에도 빙긋 미소를 지어줬다.

"혹시 아이작은 우리 마족에 관한 역사도 잘 알고 있어?"

이번에는 오른쪽이다. 목소리에 따라 시선을 옮기니 리나와 완벽하게 반대되는 붉은색 눈동자와 마주하게 됐다. 당연하게도 세실리다.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곰곰히 생각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게도 마족은 제논 일대기가 발간되기 전까지 폐쇄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어서 정보가 현저히 적었다. 설령 마족에 관한 역사서가 있다고해도 전부 인간의 관점이었는지라 지극히 주관적이었다.

"아뇨. 건국 과정과 세이비어 교국에서 마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는 것만 빼면 거의 모릅니다. 알다시피 마족은 몇 년 전까지 바깥과 교류를 한 적이 거의 없잖아요."

"음... 하긴 그것도 그렇네. 그럼 내가 몇 권 가져다 줄까? 나중에 아빠한테 부탁하면 되거든."

"정말요?"

나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호의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세실리를 쳐다봤다. 세실리는 내 반응에 살풋 웃더니 장난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몰론이지.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그게 뭐죠?"

"누나라고 해보렴."

"네?"

생뚱맞은 그녀의 조건에 어안이 벙벙해졌을 때 쯔음, 세실리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말투를 유지한 채 나에게 들이댔다.

그녀가 들이대자 나는 순간적으로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누나라 해보라고. 왜? 혹시 부끄럽니?"

"세실리 누나."

"... ..."

"했는데요?"

이제는 세실리가 당황할 차례였다. 그녀가 내게서 무슨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형이나 누나라고 부르는 건 익숙하다.

이미 친형과 친누나가 있는마당에 뭐가 어렵다고.

세실리는 너무나 간단한 내 대답에 이게 아니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뾰루퉁해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혀를 차며 투덜거린다.

"쳇. 재미없어. 그러고 보니 친누나가 있다고 했나?"

"푸흣."

세실리가 투덜거리는 동안 상황을 지켜보던 리나가 웃음을 살짝 흘렸다. 당연하지만 세실리가 그걸 듣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응? 리나. 설마 비웃은 거야?"

"아니? 세실리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아닌 거 같은데..."

나를 사이에 둔 두 여자가 떠드는 동안 엘레나 교수가 오기를 기다렸다. 참고로 리나와 세실리가 있는데 마리가 강의실에 없는 이유는 그녀가 역사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역사라면 치를 떤다고 얼핏 들은 것 같다.

심지어 어제 인문학 수업 때 나에게 골탕을 먹이려던 잭슨 그 놈도 없었다. 확실히 역사는 관심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지루한 건 어딜 가나 똑같은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강의실에 대략 30명 정도만 자리에 앉아있었다.

"자. 여기 책."

"...이건 뭐예요?"

잠시 후, 강의실로 돌아온 엘레나 교수가 나에게 두꺼운 책 한 권을 전달했다. 퀴퀴한 종이냄새가 날 정도로 오래된 책이었는데, 책 표지에 제목조차 없었다.

그에 내가 책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엘레나 교수가 대답해줬다.

"엘프들의 역사서를 공용어로 해석한거야. 엘프는 본인들 고유의 언어로 책을 쓰는 경향이 강하거든."

"네? 지, 진짜로 이게..."

"응. 맞아. 인간의 시선이 아닌 엘프의 시선으로 본 역사서지. 나도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거야."

"우와..."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낡디낡은 책을 들여다봤다. 비록 낡고 볼품없는 외관이나 나에게는 그 어떤 물품보다 값진 보물이었다.

이 역사서를 통해 이 세상의 엘프가 어떤 종족인지, 그리고 제논 일대기에서 등장할 예정인 엘프에 어떤 설정을 추가시킬지 정할 수 있다. 안 그래도 엘프를 어떻게 묘사할지 고민이었는데 엘레나 교수가 시기적절하게 도움을 줬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 은혜를 어떻게 해야..."

"감사는 딱히 필요없고, 혹시 이 수업이 끝나면 다른 수업 듣는 거 있니?"

이어서 그녀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없다면 잠깐 나 좀 찾아올 수 있는지 묻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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