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아마 그런 짤을 본 적이 있을 거다. 4성 장군 옆에서 병장 한 명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모습을 말이다.
각은 각대로 잡혀있고 한치의 실수조차 용납하지 못 한다는 표정이 포인트다. 물론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해지지 않는 이상 웃어넘길 수 있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내가 그런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면 무슨 기분이 들까?
그것도 머지않아 황제가 될 사람이, 찾기만 하면 작가를 황궁에 가둘 거라는 권위자가 내 옆에 앉아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리나가 말하길, 학생인데도 견문이 상당히 넓은 것 같다고 하더군. 특히 메그너 교수를 골탕먹였다는 소식은 꽤 재미있게 들었다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너무 긴장하지 말게나. 내가 황태자라지만 권위로 누군가를 해할 생각은 없거든."
나는 레오르트가 사람 좋은 표정으로 말해도 웃을 수 없었다. 그가 황태자인 것도 있지만 나를 황궁에 가둬버리고 싶다는 사람이 옆자리에 버젓이 앉아있는데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다.
'하필 자리 배치도 이래서...'
현재 나는 대련을 지켜보기 좋은 관중석에 앉아있다. 관중석과 대련장 사이에는 반투명한 유리가 세워져 있어 관람하기 편하다. 또한 유리에는 방어 마법이 설정돼 있어서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허나 제일 큰 문제는 자리다. 내가 레오르트와 한 칸 떨어져있다면 모를까, 레오르트가 중간에 앉고 나와 니콜이 양옆에 앉은 상황이다. 부담감이 장난 아니다.
"눈동자 색을 보고 니콜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동생일 줄이야. 그러고 보니 데이브는 머리도 붉은색이었지."
"저희 형도 아십니까?"
"물론이네.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조교로 활동하는 자들은 대부분 높은 티어의 기사단에 입단하니 항상 눈 여겨 봐야지. 아참. 데이브가 견습 기사가 된 건 알고 있나?"
"네?"
처음 듣는 이야기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한 칸 떨어져 앉은 니콜을 쳐다봤다. 니콜도 깜빡하고 있었는지 아차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 깜빡하고 있었네. 사실 입학식을 하고 이틀 후부터 견습 기사로 발탁됐거든. 그때 오빠도 널 만나느라 잠깐 잊고 있었나 봐."
"어디로 갔어?"
"네이비 기사단. 어디인지 알고 있지?"
알다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데이브는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이가 갈리도록 단련하더니 기어코 네이비 기사단에 입단한 모양이다.
동생으로써 자랑스러웠으나 말도 안 해주고 가버리니 약간 섭섭했다.
"그럼 언제 돌아와?"
"글쎄? 견습 기사는 훈련만 받아서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 그래도 연락은 할 거야."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몰래 휴가를 넣어줄 수 있네만?"
"괘, 괜찮습니다."
중간에 앉은 레오르트가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농담을 던지자 어색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는데 그가 한 농담은 전혀 농담 같지가 않았다.
채앵!
잠깐의 잡담을 뒤로 하고 드디어 대련장에서 대련이 시작되었다. 나는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음이 귀에 들어오자 대련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레오르트와 니콜도 마찬가지였다.
대련장 중심에는 니콜의 친구, 아델리아가 장검을 쥔 채 다른 한 명과 싸우는 중이다. 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검으로 맹공을 가하면 아델리아는 여유롭게 받아쳤다.
나는 춤을 추는 것처럼 현란하게 싸우는 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눈으로 따라가는 것조차 벅찼다.
'실제 싸움은 이렇구나.'
가끔씩 방학 기간 때 집으로 돌아온 데이브나 니콜이 아버지와 대련하는 건 자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격렬하지는 않고 아버지가 문제점을 하나 하나 가르쳐주는 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든 상대를 쓰러뜨려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다 해야 하나. 아무튼 아델리아의 상대는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당연하지만 아델리아는 하나하나 모두 받아치며 반격을 가했다.
"지금 아델리아와 대련 중인 학생이 누구지?"
"이안이라고, 검술 부분에서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흐음."
옆에서 니콜과 레오르트가 말을 나누는 동안에도 대련에 집중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전투씬을 참조할 때는 아버지에게 조언을 받았으나 역시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 차이가 난다.
제논 일대기는 주인공이 세계적인 영웅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인만큼 수많은 전투를 치루는데 나에게는 판타지여도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현실'이다. 별의 별 괴상한 것들이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계.
내 기준으로 말도 안 되는 능력을 묘사해도 아버지가 매우 현실적이라고 칭찬했을 때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능력이어도 다 된다고 하니까...'
그냥 마나를 이용해 이런 이런 능력을 발휘했다고 하면 모든 게 용납이 간다. 오히려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철덩어리가 바다에 둥둥 떠다니거나 말도 없이 마차가 움직이는 게 불가능하다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궁금해졌다. 앞으로 제논 일대기에는 '증기 기관차'라는 새로운 문물이 등장할텐데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불가능하다고 단언할까 아니면 가능하다고 할까.
기대가 된다. 당연하지만 나는 그저 멀리서 팝콘만 뜯을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니콜. 자네는 이번에 출간된 제논 일대기를 읽었나?"
"네?"
내가 속으로 앞으로의 스토리를 구상하는 도중에 레오르트가 대뜸 니콜에게 물었다. 대련에 집중하고 있던 니콜은 레오르트 질문에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인 듯했다.
나 또한 당황스러운 건 똑같았으나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척 연기했다. 괜히 여기서 과하게 반응했다간 이상한 눈초리를 받을지 모른다.
"자네도 제논 일대기를 좋아하던 걸로 안다만."
"아... 네. 7권이라면 읽었습니다."
"그렇군."
짤막하게 대답한 레오르트는 이번에 나를 쳐다보며 질문을 날렸다.
"아이작 자네는?"
"...저도 읽었습니다."
"몇 권까지?"
이미 머릿속에 완결까지 구상해 놓았습니다. 새드 엔딩으로 말이죠.
나는 눈을 데록데록 굴리다가 마리에게 했던 거짓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5권까지만 읽었습니다. 책을 사려고 해도 매번 매진되는 바람에..."
"응? 니콜은 7권까지 읽었다하지 않았나? 동생에게 빌려주지 않은건가?"
"안 그래도 빌리려 했습니다. 방학이 아닌 이상 누나가 집에 있는 시간이 적어서 빌리기에도 미안했거든요."
"아. 그런 이유라면 납득이 가는군."
레오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해가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예상치 못한 위기였지만 다행히 어찌 어찌 넘어간 듯했다.
이후로 대화가 단절되는가 싶어 대련에 집중했을 때였다.
"저... 레오르트 님."
"응? 왜 부르나?"
"레오르트 님은 정말로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찾으면 황궁에 가둬버리실 건가요?"
니콜이 우려와 걱정이 한가득 담겨있는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기 전까지는.
나는 최대한 대련에 집중하는 척 하면서 조용히 엿들었다. 어째서 그녀가 레오르트에게 저런 질문을 한 건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자그마치 황태자가 신문에 그런 말을 넣었으니 누나로서 걱정되는 건 당연하다.
그동안 레오르트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피식거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학 당일 날에 보여줬던 반응과는 약간 달랐다.
"장난이야. 장난. 너무 진지하게 새겨듣지 않아도 돼.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났지만 지금은 천천히 기다리자는 마음이거든."
"그럼 저자를 찾는 일은..."
"그 일은 계속 진행해야지. 더구나 앞으로 예상되는 전개를 본다면 저자가 조금 위험해질 것 같기도 해."
레오르트의 대답에 니콜은 물론 나 또한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남들보다 정보력이 우월한 황태자가 저런 말을 하니 쉬이 흘려들을 수 없었다.
나는 한 칸 옆에 떨어져 앉은 니콜과 시선을 교차했다가 조용히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죠?"
"난... 아, 그전에 아이작?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을 해도 되겠나? 7권의 줄거리가 포함돼 있어서 말이네."
"전 상관없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뭘.
레오르트는 내 쿨한 대답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는 이어서 설명했다.
"어쨌거나 마지막에 제논을 위기에 빠뜨린 주범이 귀족으로 예상하고 있다네."
나는 다른 의미의 놀란 얼굴로 레오르트를 바라봤다. 그의 예상은 정답이다.
7권 마지막에 제논은 혼자서 정찰을 떠나는데, 안전한 곳이라는 말과 달리 몬스터는 물론이고 결계까지 쳐져있는 마의 지대였다. 다행히 기지를 발휘해 결계까지 파훼하여 지역을 뚫고 나왔으나 제논을 기다리고 있는 건 수많은 함정과 습격자들이었다.
안 그래도 지친 몸으로 습격자들과 싸우던 제논은 결국 가슴에 화살을 적중당하게 되고, 7권은 거기서 끝난다.
물론 제논 일대기의 히로인, 메리가 선물해준 목걸이 덕분에 치명상은 면한다. 그 뒤로는 당연히 무쌍을 펼치고 배후를 찾는 거고.
'대놓고 떡밥을 뿌린 것도 아닌데...'
아마 여러번 정독하다가 의아한 부분들을 하나 하나 찾은 게 아닐까 싶다. 왠지 모르지만 작가로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 그 생각은 던져버렸다.
"정말로 주범이 귀족이라면... 무슨 큰 문제라도 생기는 겁니까?"
이 질문은 내가 아니라 니콜이 한 거다. 레오르트는 대련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다른 책도 아니고 하필이면 제논 일대기라서 문제지. 마족의 인식을 뒤바꾼 것처럼 혹여 귀족의 인식도 나쁘게 변할까봐 걱정된다네. 귀족을 비판하는 책은 많지만 대부분 풍자에 가까운데다가 제논 일대기만큼의 파급력은 없었거든."
그런 거였나. 그런 걱정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갈만하다.
내가 항상 허구의 이야기라고 도입부에 적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족의 인식이 상전벽해 수준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제논을 함정에 빠뜨린 주모자가 귀족으로 드러난다면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괜찮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대비는 충분히 한 상태다. 레오르트가 우려하는 상황은 귀족의 명과 암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명장면이 될 것이다.
백성들을 자기 아래로 보는 귀족과, 백성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보살피는 귀족의 싸움. 정치 싸움의 일환이지만 사지에서 돌아온 제논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시원시원한 맛이 있을 거다.
"...만약 정말로 그리 된다면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니콜이 실로 조심스러운 톤으로 레오르트에게 물었다. 그에 레오르트는 손을 휘적거리며 대충 대답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글은 계속 쓰게 할테니까. 어디까지나 보호 개념이지, 압박하는 건 결코 아니야. 애시당초 저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 쓸데없는 가정이라네."
"그렇습니까..."
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압박이 됩니다, 황태자님.
나는 쓰게 웃으며 대련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대련이 끝났는지 아델리아와 학생이 서로 마주보며 인사하고 있다. 숨을 헐떡이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학생과 달리 아델리아는 대련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뭐, 이만하면 됐겠지. 난 이제 가보도록 하겠네."
대련이 끝나자 레오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가 일어서자 의문에 찬 눈빛으로 쳐다봤다.
"벌써 가십니까?"
"나도 눈치가 있어. 내가 있어봤자 그대들만 불편할텐데 빨리 가는 게 좋지. 그래도 즐거웠네."
레오르트는 그 말만 남기며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니콜을 바라봤다.
때마침 니콜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우리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녀도 나처럼 가슴이 쫄깃쫄깃했던 모양이다.
"아이작."
"응."
"앞으로 조심해야겠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그런데 정말로 제논을 위기에 빠뜨린 범인이 귀족이니?"
아까 전 레오르트가 예상했던 전개가 인상깊었던 모양이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응. 크로스트 백작이라고 알아? 그 사람이 범인이야."
"... ..."
"누나?"
내가 범인의 정체를 발설하자 니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졌다. 무언가 충격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그에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니콜이 망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누구인지는... 안 물었는데..."
"아."
본의 아니게 스포일러를 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