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그러니까 네 말은..."
"... ..."
"내 동생이 무학 신입생인줄 알고 공을 던진거다? 어차피 내가 옆에 있으니 막아줄거라 생각했고?"
"...응."
화를 억누르는 듯한 니콜의 물음에 여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참고로 여자는 니콜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중이다.
나 또한 니콜의 옆에 서서 그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니 드넓은 연무장 외곽에 있어서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끔씩 누군가 지나가도 한 번 보기만 하고 자기 할 일을 하러 떠났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신경 쓰기 보다는 저기 멀리서 대련 중인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걸로 보인다.
내가 그리 생각하는 동안 니콜이 무릎을 꿇은 여자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해?! 어?!"
"... ..."
"아무리 장난이어도 내가 그딴 장난은 함부로 치지 말랬잖아! 내 말이 말 같지 않지?!"
니콜이 버럭 호통치자 무릎꿇은 여자가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여태까지 니콜의 상냥한 면모만 보았던 나로서는 상당히 의외의 반응이다.
하기야 굳이 니콜이 아니라 그 어떤 형제자매라도 화를 내긴 할 것이다. 하마터면 소중하게 키웠던 막내동생이 크게 다칠 뻔했으니까.
평소 언성을 높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그녀였기에 지금 이 상황이 신선했을 뿐이다.
"대답을 해, 아델리아. 내 말 틀려?"
"미, 미안..."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사죄한 여자. 하지만 니콜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콧김을 길게 내쉬었다.
"나한테 사과할 게 아니라 우리 아이작한테 사과해. 다음부터 그딴 장난질하면 교수님에게 정식으로 항의할테니까 주의하고. 알겠어?"
"응..."
"자. 그럼 이제 사과해."
니콜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나는 그녀가 얼굴이 드러나자 물끄러미 쳐다봤다.
목부근까지 단발로 깔끔히 자른 연갈색 머리카락과 오똑한 콧대, 그리고 긴 속눈썹이 인상적이었다. 전반적으로 보이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녀다.
내가 하늘색에 가까운 그녀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을 때, 그녀 또한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 예쁜..."
저 입이 문제인가. 여자의 입에서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오자 니콜의 기세가 한층 더 무서워졌다. 저건 솔직히 한 대 맞아도 할 말이 없다.
여자도 니콜이 위험한 기운을 풍기자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다급히 사죄을 말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장난이 지나쳤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장난은 절대 안 치겠습니다."
보이시한 외모처럼 목소리톤도 허스키한 것이 꽤나 잘 어울렸다. 아까 그 경박한 말투는 니콜에게 장난을 칠 때만 나오는 모양이다.
나는 그녀가 머리까지 숙이며 사죄하자 살짝 얼떨떨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아, 네. 괜찮아요. 그나저나 아델리아 씨라고 하셨나요?"
"네. 아델리아 크로스라고 합니다."
귀족에게만 하사받는 미들네임이 없는 걸 보면 아델리아는 평민이다. 미모만 보고 귀족인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살짝 놀라웠다.
'그런데 장난이랍시고 나한테 공을 던졌다라...'
이러면 둘 중 하나다. 니콜과 계급을 넘어선 절친이거나 생각이 없는 것이거나. 다만 니콜에게 반말을 하는 걸 보면 전자로 추정된다.
나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아델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가지 질문을 날렸다.
"혹시 우리 누나랑 친구에요?"
"어..."
아델리아가 대답을 하려다 말고 니콜의 눈치를 봤다. 니콜은 여전히 화가 난 얼굴이었으나 턱을 까닥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에 아델리아는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네. 친구에요. 입학할 때부터 지금까지 쭉 같이 지내고 있죠."
"그럼 그냥 반말하세요. 우리 누나 친군데."
"정말? 그래도 되지?"
그렇다고 바로 반말을 해버리네. 나는 아델리아가 활짝 웃으며 묻자 내심 어이없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델리아는 이제서야 살겠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더니 말을 속사포로 꺼내기 시작했다.
"정말로, 정말 정말 미안해. 내가 진짜 다시 한 번 사과할게. 난 니콜이 누구를 데려왔나 싶어서 그랬던 거거든. 그런데 동생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아까도 말했지만 전 괜찮아요. 이미 지나간 일인데다가 어차피 아델리아 씨도 누나가 충분히 막을거라 예상하고 던진거잖아요? 단검을 안 던진 게 어디에요."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하지. 니콜이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던졌으면 난 그대로 퇴학감이었다고."
"잘 아는 년이 그딴 장난질을 하냐?"
니콜이 사나운 목소리로 압박하자 아델리아도 마땅한 변명을 하지 못 했다. 단지 민망한 웃음을 흘리며 쩔쩔거리다가 미안함에 고개를 숙일 뿐.
니콜도 아델리아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 같자 한숨을 푹 내쉬며 마지못해 용서해줬다.
"후우. 아까부터 말했지만 지금부터라도 그런 장난은 하지 마. 한 두 번이면 모를까, 연무장에 올 때마다 이러니 나도 슬슬 짜증나거든."
"미안..."
"누나. 원래부터 자주 이랬어?"
"내가 연무장에 올 때마다 항상 이랬어."
어쩐지 반응이 빠르더라니. 아델리아의 전과가 한 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연무장에 올 때마다 이런 장난을 해대니 니콜도 어지간히 짜증났을 거다. 게다가 오늘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동생인 내가 위험할 뻔했으니 더더욱.
나는 머리를 헤집는 니콜을 쳐다보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연무장 입구 쪽을 쳐다봤다. 입구는 기다란 통로 같은 형식이라 내부는 어두컴컴했는데, 빛이 있다고하나 인영 정도만 간신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델리아는 그 어둠 속에서 니콜이 오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비록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오고 있다고한들 그것만으로 확신은 서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아델리아 씨."
"응? 나 불렀어?"
"아델리아 씨도 안구에 마나를 부여할 수 있어요?"
"당연하지. 이래보여도 실력 하나만큼은 뛰어나다고."
자부심이 한가득 담겨있는 대답이었다. 확실히 누나를 따라 조교를 하는 걸 보면 실력은 이미 입증된 셈이다.
안구에 마나를 주입하는 능력이 실력과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다면, 우리의 눈이 얼마나 예민한 부위인지 생각하면 된다.
안구에 마나를 주입하여 어둠 속에서도 물체를 똑바로 체크할 수 있다는 건 마나 컨트롤에 있어서 뛰어나다는 걸 반증한다.
제논 일대기를 처음 집필할 때 아버지의 자문을 받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아버지도 즐거워하면서 이밖에 이런 저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그것 외에는 전생의 기억을 빌려 내가 따로 창작했다.
나는 기운을 되찾은 듯한 아델리아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체온을 구분하는 것도 돼요?"
"뭐? 내가 그걸 어떻게 해? 그건 최소 기사단장 정도가 되어야 쓸 수 있는 기술이라고."
아델리아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버지는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쓸 수 있다고 하셨는데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기준이었던 모양이다.
"니콜의 남동생이라 했지? 노파심에 말하는 건데 너희 아버지랑 다른 사람이랑 비교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마. 칼질 하나로 지도를 바꾸는 사람인데 비교가 되겠어?"
"아버지가 그정도야?"
아버지가 굉장한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가 사실이냐는 표정으로 니콜에게 묻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너도 알잖아. 언제 우리 아빠가 자기 입으로 뭘 말한 적이 있었니?"
"없었지. 그런데 왜 그러신데?"
"그 업적이 남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희생한 기사단원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하시더라. 아이작 넌 모르겠지만 네가 태어나기 전만 해도 술이 없으면 밤에 못 주무셨어."
증상을 보아하니 전형적으로 PTSD를 호소하는 군인이다.
하물며 아버지는 무려 기사단장, 그것도 네이비 기사단 소속이었으니 실전 경험이 남들보다 배는 많았을 것이리라. 네이비 기사단은 미네르바 제국 최강의 기사단인만큼 다양한 임무를 부여받는다고 들었으니까.
그중에서는 악마화를 한 마족을 토벌하는 임무도 있다. 사실 악마를 토벌하는 건 네이비 기사단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진행하니 최후의 수단이라고 보는 게 명확하다.
이런데도 삼남매를 무사히 길러낸 걸 보면 정신력 하나는 대단하신 분이다.
"아무튼 간에 아델리아. 너 지금부터 대련 준비할 거지?"
"해야지. 신입생도 많아서 꽤 바쁠거야."
"그럼 오늘은 벌로 너 혼자만 해. 나는 동생 데리고 다닐테니까."
"뭐?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그거는..."
"뭐?"
아델리아가 곧바로 항의하자 니콜은 한 쪽 눈을 치켜뜨는 걸로 대신했다. 결국 큰 죄가 있던 아델리아가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대신 오늘만이다?"
"생각해보고."
"아, 제발. 그러지 말고."
"내 소중한 동생 얼굴에 시퍼런 멍을 들게 할 뻔한 사람이 누구더라?"
아무래도 아델리아가 약점을 제대로 잡힌 것 같다. 나는 무릎까지 꿇으며 사정사정하는 아델리아와 팔짱을 낀 채 고민하는 니콜을 번갈아봤다.
확실히 이렇게만 본다면 신분을 초월한 절친 사이가 맞다. 우리 가족이 대체적으로 권위와 먼 성격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아델리아의 행동은 다른 사람이 본다면 기겁하기에 충분했다.
조금 전 그녀가 스스로 말했듯이 귀족의 목숨을 위협했다는 죄로 퇴학은 기본이고 실형까지 받았을테니.
'이 사람은 어떻게 누나랑 친구가 된 거지?'
내가 의문을 갖는 동안 니콜이 아델리아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됐다.
"그럼 이제 대련이나 하러 가. 난 관중석에 있을거니까 사람들한테 상황 설명은 잘 해주고."
"알았어. 아이작이라고 했나?"
"네. 아이작이라고 합니다."
"이 누나가 대련하는 거 잘 봐 둬. 바로 반하게 해줄테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가기나 해."
아델리아는 니콜이 미리 가져왔던 훈련용 철검을 던져주자 가볍게 잡아챘다. 뒤이어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방정맞게 팔을 흔들었다.
철없는 아이마냥 천방지축이지만 신기하게도 밉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점점 멀어지는 아델리아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니콜에게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누나. 저 사람이랑 어떻게 해서 친구가 된 거야?"
"그냥 어쩌다 보니까. 입학 때부터 계속 주변을 걷돌길래 말을 걸었더니 지금까지 쭈욱 이어졌지. 성격이 좀 천박... 아니, 이상해도 실력 하나는 보장할 수 있어. 아까도 장난이 지나쳤던거지 나쁜 애는 절대 아니야."
"니콜?"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뒤에서 누군가 니콜을 불렀다. 중저음에 듣기 좋은 미성을 지닌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에 니콜은 물론 나도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확인했다.
'...어.'
그리고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뇌가 정지하는 기분을 실시간으로 느꼈다. 적어도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다 못해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다.
내가 딱딱하게 굳어있는 동안 니콜은 남자와 구면이었는지 반갑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반말을 한 남자와 달리 니콜의 억양에는 전과 달리 예의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레오르트 님?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이번 주는 새학기가 시작되는 주였으니까. 바쁜 건 하나도 없었지."
리나처럼 황금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청명한 푸른색 눈동자. 리나가 청초하면서 강아지상의 얼굴이라면, 앞의 남자는 호랑이처럼 인상이 강했다.
한편 니콜과 대화를 나누던 남자는 나에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조용히 말을 흐렸다.
"그런데 옆은..."
"제 동생입니다. 인사해, 아이작. 미네르바 제국의 황태자이신 레오르트 님이셔."
내 마음도 모르는지 니콜이 내 등을 두드려주며 인사를 시켰다. 나는 잔뜩 긴장하며 레오르트와 얼굴을 마주했다.
예기치 못한 만남에 퍽 당황스러웠지만 어찌 되었던 간에 인사는 해야겠지. 더군다나 굳이 긴장할 필요는 없는 것이 나와 레오르트는 초면일 뿐더러 그는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전혀 모른다.
느닷없이 황궁에 갇히게 될 염려는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그 생각이 들자 나는 집에서 배운 예법을 토대로 레오르트에게 인사했다. 지금은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안녕하십니까.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만나뵈어서 영광입니다, 레오르트 님."
"아하. 니콜의 동생이었군. 어쩐지 닮았다했어. 반갑네. 미네르바의 정당한 계승자, 레오르트 우르미 재클리스라고 한다네. 그나저나 아이작이라고?"
"네."
"호."
왜요. 왜 그런 탄성을 지르는 것이죠. 불안하게스리.
내가 불안감에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쯤, 레오르트가 무척 반갑다는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리나가 말했던 학생이 자네였군?"
...씨발.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