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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8화 (9/763)

< 8화 >

내가 마음 속으로 교수를 저주하고 있을 때, 리나가 옆에 앉아있는 마리를 바라보며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마리 님도 계셨네요. 오랜만이에요."

"그래. 그것 참 오랜만이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서로 안면이 있는 듯했다. 다만 미소를 짓고 있는 리나와 달리 마리는 불만 가득한 표정이라는 걸까.

마리가 반말을 하는 건 그녀의 가문이 미네르바 제국의 개국공신이라 가능한 일이겠지만, 대충 봐도 마리가 리나를 대놓고 껄그러워하는 중이다. 정작 리나는 개의치 않아하지만.

리나는 마리의 퉁명스러운 인사에도 미소를 유지하며 다시 시선을 나에게로 옮겼다. 나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하자마자 최대한 태연한 척을 했다.

뒤이어 리나는 조금 전보다 화사한 표정을 짓더니 우아한 목소리로 스스로를 소개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아이작 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미네르바 제국의 1황녀, 리나 우르미 크리스틴이라고 해요. 편하게 리나라고 불러주세요."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리나 황녀님."

"듀커르 마이샬?"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식으로 소개하자 리나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그리고는 내 머리카락과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붉은 머리카락과 금색 눈... 왠지 익숙하다 했더니... 그런데 문학이라..."

"네?"

"아니에요. 아무튼 황녀를 빼고 리나라고 불러주세요. 세실리? 세실리도 인사할래?"

"아, 응!"

리나는 능청스레 넘기더니 뒤의 세실리를 불렀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서로 말까지 놓은 걸 보면 그사이 꽤 친해진 모양이다.

나는 세실리가 앞으로 나서자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세실리도 긴장한 낯빛으로 내 얼굴을 바라봤다.

'진짜 하나같이 다들 비현실적으로 예쁘구나.'

마리도 그렇고, 리나도 그렇고, 세실리도 그렇고.

전부 다 비현실적으로 예쁜 나머지 확 와닿지가 않는다. 사람이 아니라 정성을 들여 그린 캐릭터가 현실에 툭 튀어나온 기분이다.

하물며 세실리는 마족이다. 이 세상에 환생나고 처음으로 마주한 이종족.

칠흑색 머리카락은 익숙하니까 넘길 수 있는데 피처럼 붉은 눈동자와 머리 양 옆에 솟아난 뿔은 정말로 이질적이었다.

무엇보다...

'...셔츠가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중이네.'

약간 과장해서 가슴이 본인 머리만하다. 교복으로 가리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위압감을 자랑하는 중이다. 옆에 서 있는 리나도 나름 큰 편인데 세실리에 비해서는 역부족이다.

그에 반면 마리는... 적당히 큰 편이다. 앞의 두 여자가 너무 큰 거지 결코 작지 않다. 애시당초 귀족이라 잘 먹고 잘 자는만큼 발육이 좋은 건 당연한 일이겠지.

각설하고-

"안녕하세요.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연설에서 들었던 것처럼, 세실리가 특유의 고혹적인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헬리움만의 예법인지 심장 쪽에 손을 대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리나 덕분에 자신감을 얻어서 목소리에도 약간 활기찬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에 나는 어떻게든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대답했다. 시선 처리도 고역이다.

"아까 들으셨겠지만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세실리 공주님."

"저도 리나처럼 편하게 세실리라고 부르셔도 돼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나는 리나와 세실리를 번갈아보다가 본론부터 꺼냈다.

"두 분께서 저에게는 어쩐 일로?"

그리 물으면서 주변을 힐긋거렸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수많은 학생들의 시선이 이쪽에 집중돼 있다.

대부분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으나 개중에는 적대 어린 시선도 더러 존재했다.

특히 오자마자 세실리에게 추파를 던졌던 백작가 영식. 아마 이름이 잭슨이랬나.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놈은 아주 죽일 듯한 기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조만간 따로 불려나갈 것 같다. 두렵기보다는 귀찮았기에 당분간 쟤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그사이 내 질문을 들은 리나가 우아한 말투로 말했다.

"수업 때 발표가 인상적이었거든요. 지식이 곧 힘이 된다니, 전 생각치도 못한 대답이었어요. 정말 멋졌죠."

"과찬이십니다."

"아뇨. 전혀 과찬이 아니에요. 그러다 문득 궁금해지더군요. 아이작 님은 어째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라고 말이죠."

만약 지구에 사셨다면 한 번 쯤은 들으셨을 명언입니다. 황녀님.

물론 위의 말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빠르게 궁리했다.

"계속 서 있지 말고 앉아서 얘기하지? 보니까 다음 시간에도 옆자리에 앉을 거 같은데."

그러다 중간에 마리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니 마리가 턱을 괴며 짜증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리나를 향하고 있었는데, 어지간히도 리나가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아. 이거 제가 실례했군요. 그럼 자리에 앉을까요?"

"...네."

어쩌다보니 세실리, 리나, 나, 마리 순으로 앉게 됐다. 오른쪽을 봐도, 왼쪽을 봐도 미녀가 있어서 좋긴 하다만 압박감이 장난아니다.

그도 그럴게 내 왼쪽은 공작가 영애가, 오른쪽에는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와 헬리움의 공주가 나란히 앉아있다.

까닥 입을 잘못 놀리면 내 목이 날라가는 건 물론이고, 집안도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 사이에 끼여있던 병사의 심정이 이러할까. 최대한 태연한 척 하고 있으나 가슴이 긴장으로 세차게 두근거렸다.

"그래서 대답은요?"

내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리나가 재차 질문했다.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눈동자에 호기심과 기대감이 담겨있었다.

'씨발. 어떡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도 그 명언을 전생에서 듣기만 했지, 어떤 경위를 통해 나온 건지 하나도 모르니까.

그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낫다. 괜스레 리나가 꼬치꼬치 파고들면 또다른 거짓말을 구상해야 할테니까.

나는 다른 의미로 콩닥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달래면서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딱히 설명할 길이 없네요."

"그냥 그렇게 생각한 거라니..."

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떨떠름히 중얼거렸다. 실망한 건지 아니면 놀라워한 건지 모르겠으나 아마 실망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나 이 모든 순전히 내 착각에 불과했다.

"대단하시네요."

"...예?"

"정말 대단하시다시고요. 아이작 씨는 평소에도 지식을 힘으로 생각했다는 거잖아요?"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건데? 대체 어떤 착각을 했길래 저런 결론을 내놓는 거지?

내가 황당해 하는 동안 리나는 아까 전보다 눈을 더욱 빛내더니 직설적으로 물었다.

"이런 말 하기 죄송하지만 아이작 씨는 육체적인 재능이 없으시죠?"

"어... 네. 아버지도 중간에 포기하셨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어째서 호크 경의 아들이 무학이 아니라 문학에 들어왔는지 의문이었지만... 이제서 이해가 가요. 호크 경이라면 분명 무력을 쌓지 못 한다면 지력을 쌓으라고 하셨겠죠."

"저... 리나? 아이작 씨의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세실리가 리나에게 질문했다. 나 또한 내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고 있기에 자연히 궁금해졌다.

아버지는 본래 평민이었다가 기사로 활동할 때 어마어마한 위업을 세워 귀족이 된 케이스인데, 정확히 어떤 업적을 세웠는지 모르고 있다. 아버지 스스로도 나한테 말하기 꺼려하는데다가 어머니도 크면 알게 된다고 애매하게 대답해주셨다.

헌데 지금 듣자하니 무려 황녀, 그러니까 황족의 귀에도 들어갈 정도로 대단한 분인 걸로 예상된다. 집에서는 그저 호탕하고 친근한 이미지의 아버지인데.

내가 그리 생각하는 동안 리나는 세실리를 바라보며 내 아버지, 호크에 관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냈다.

"혹시 미네르바의 붉은 사자라고 들어본 적 있어?"

"붉은 사자라면... 설마?"

세실리는 리나의 질문을 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나를 쳐다봤다. 자기들끼리만 알고 나는 전혀 모르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아, 어쩐지. 어디서 들어본 성에다 머리도 빨간색이라 했더니 붉은 사자의 아들이었구나? 눈도 황금색이고."

심지어 마리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정작 아들인 난 모르고 있는데.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가 의문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마리에게 질문했다.

"너도 알고 있어?"

"응? 설마 몰라? 붉은 사자의 아들인데도?"

"몰라. 어머니에게 물어봐도 안 알려주셨어."

"분명 그럴 거예요. 호크 경은 자기가 이룩한 업적을 남에게 알리는 걸 달갑지 않아 했거든요. 본래 백작의 작위까지 받을 수 있었지만 그 자리는 과분하다며 일부러 남작 작위를 하사받으셨죠."

리나가 대신 설명해줬다. 나는 마리에게서 시선을 떼어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은 전보다 한층 더 부담스러워졌고, 그 옆의 세실리는 호기심이 더욱 강해진 표정이다. 다른 건 몰라도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다.

'대체 현역 시절 때 뭘 하시던 분이지?'

백작의 작위까지 받을 뻔했다고 했으니 네이비 기사단의 기사단장이기라도 하셨나.

참고로 네이비 기사단은 미네르바 제국에서 제일 유명하고, 또 가장 강한 기사단이다. 시골 깡촌에만 지내던 내가 알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지 얼추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호크 경은 네이비 기사단의 단장으로써 셀 수도 없는 업적을 세우셨어요. 편하게 쉬고 싶다는 본인의 의사만 아니었더라면 기사단장의 자리는 몇 십 년간 묵묵히 지켰겠죠."

진짜였네.

"아무튼, 그 호크 경의 아들이니 평소에도 만일에 대비해 힘을 쌓으라고 하셨을 거예요. 그렇죠? 호크 경은 늘 기사단원에게 변수에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라고 하셨거든요."

"...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지만 나에게는 천만다행이다. 훌륭한 아버지를 둔 덕에 리나가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으니.

리나는 내 대답에 듣고 전보다 진한 미소를 짓더니 기대를 담으며 나에게 말했다.

"조금 전에 분명 역사, 신학, 생물을 고려하고 계신다고 하셨죠? 그것 말고는 없나요?"

"아마... 철학이랑 인문학 정도?"

"철학이라... 기대하고 있을게요."

잘 부탁한다는 말이 아니라 기대하겠다는 말. 나는 그 속에 담겨있는 의미를 깨달았다. 앞으로 본인의 기대에 어울리는 활약을 보여주라는 뜻이다.

보아하니 찍혀도 제대로 찍힌 걸로 보인다. 나쁘게 찍힌 것 보다야 낫지만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다.

뭐, 어쩌겠나. 지금은 어떻게든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것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아참. 그러고 보니 아이작 씨?"

"편하게 말 놓으셔도 됩니다."

"알았어. 아이작. 아까 전부터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말씀하세요."

"이거."

리나는 내 손가락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오른손 중지 손가락에 배긴 굳은살, 그러니까 '펜혹' 쪽이었다.

그에 살짝 의문을 가졌을 때 리나가 궁금하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굳은살, 펜을 자주 써야 나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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