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헤일로 아카데미는 세계 최고의 교육기관이라는 명성에 부합하듯이, 숙소의 시설도 눈이 휘둥그레 떠질 정도로 대단했다.
일단 1인 1실인 건 기본이고 방 자체가 매우 넓었다. 원룸 수준이 아니라 거의 20평짜리 아파트다.
심지어 마법으로 구현했는지 몰라도 숙소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장치까지 있었으며, 심지어 냉장고까지 있었다. 도대체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마법으로 한 거겠지.
'좋으면 됐지.'
여기는 판타지 세상이라 전생의 상식이 처참하게 박살나는 곳이다. 당장 운석까지 떨어뜨리는 괴수들이 즐비해 있는데 상식 쯤이야.
나는 전반적으로 깔끔한 숙소를 둘러보다가 안으로 걸어갔다. 푹신한 침대도 있고, 책상도 있고, 있는 건 다 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응?"
그러다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옷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어딘가 눈에 익은 색깔이다. 나는 캐리어를 질질 이끌며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하니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지급해주는 교복이었다. 상의는 흰색 와이셔츠고, 바지는 검은색이다. 이외에도 와이셔츠 위에 껴입을 수 있는 여러 옷가지가 존재했다.
사계절이 존재하는 미네르바 제국이니 계절에 맞춰 입으라는 듯했다. 나는 내 몸에 딱 맞는 듯한 교복을 이리저리 훑어봤다.
'아까 옷치수를 재더니 바로 바로 지급해주는구나.'
솔직히 사복보다는 교복을 입는 편이 낫다. 사복을 입어도 매일 같은 옷만 입을테니까.
잠시 후, 나는 한 번 시험 삼아 교복을 입었다. 때마침 전신 거울도 있어서 내 모습을 확인하기 편했다.
"스읍... 아무리 봐도..."
남장한 여학생 같은데. 얼굴이 어머니를 닮아 선이 얇고 예쁘장하게 생긴데다가 몸매까지 슬림한 탓이다. 물론 못 생긴 것보다는 훨씬 낫다.
나는 교복을 대충 옷걸이에 걸고 짐을 풀었다. 사실 짐이라고 해봤자 책 몇 권과 주말에 입을 옷, 마지막으로 원고밖에 없다. 챙길 게 있어야 말이지.
"지금 시간이..."
짐을 모두 다 풀고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4시 30분. 슬슬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마음 같아서는 형이나 누나랑 같이 식사를 즐기고 싶었으나 그들은 바쁜 몸이다. 괜히 이런 사소한 일에 바쁜 사람을 부를 수는 없는 노릇.
그냥 굶을까 생각했지만 여기 밥이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하기도 하니 가는 게 좋을 듯했다. 그 시간동안 원고를 쓰면 될테고.
"아. 맞다. 종이."
그러고 보니 원고지를 어디서 판매하는지 우선적으로 알아놓아야 한다. 여분은 차고 넘치도록 들고 왔지만 만약을 위해서다.
여기는 연필과 지우개가 없어서 한 번 삐끗하면 원고를 버려야한다. 그때문에 화를 내거나 욕지거리를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많다.
"푸에취! 아, 씨발."
바로 지금처럼.
시간이 남아돌아 원고를 작성하던 와중에 뜬금없이 재채기가 터져나왔다. 원고에 침이 덕지덕지 발라져 잉크가 번졌다.
이제 거의 한 장을 다 채우기 직전이라 눈쌀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아쉽긴 해도 버려야지.
나는 원고를 찢기 전에 새로운 종이에다 미리 옮겨적은 후, 남은 종이를 갈갈이 찢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하지만 재채기 때문에 집중력이 다 깨져버려 마법필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아직 30분밖에 안 지났네?"
기왕 이렇게 된 거 밥도 먹을 겸 아카데미 구경 좀 해볼까. 나는 살짝 굳어진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고 준비를 갖췄다.
교복을 입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을 못 느껴 사복 차림으로 나갔다. 부모님이 챙겨주신 용돈과 학생증을 챙기는 건 잊지 않았다.
참고로 학생증도 마법 처리가 되어있어 위조는 절대 불가능하다. 위조가 가능했다면 이미 나라에서 직접 모셔갔겠지. 참고로 학생증은 입학 전에 발급했다.
"진짜 넓네."
나는 헤일로 아카데미 내부를 본격적으로 돌아다녔다. 마차에서 봤을 때는 호그와트처럼 성에 가까웠는데 내부는 전혀 다르다. 또 하나의 도시 혹은 마을이라 해도 무방한 수준이다.
강의를 위한 건물은 물론이고, 도서관, 서점, 상점, 의류점, 식당, 대장간 등등.
정말로 작은 도시의 형태를 띄고 있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뒤섞여있지 않고 따로 따로 잘 구분돼 있다. 하긴 이것 저것 섞여있으면 약간 어수선한 느낌이 들었겠지.
처음부터 아카데미를 세우려고 계획한 게 아니라 아예 도시 하나를 설계한 듯했다.
딸랑-
"어서오세요~"
"여기 원고지는 없나요?"
"어떤 원고지를 말씀하시는 거죠?"
"이런 재질이요."
상점에서 원고지를 사는 건 쉬웠다. 미리 준비했던 종이를 가져다가 상점 주인에게 보여주면 끝이다.
또한 종이의 가격도 매우 싼 편이었다. 책이 널리 퍼져있는 걸 보면 제지 기술이 꽤나 잘 발달돼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상점에서 더 볼 게 없는지 대충 둘러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별의 별 이상한 것들이 많았으나 내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했다.
'한 번 서점이나 가볼까?'
숙소로 돌아가던 중, 문득 길을 가다가 봤던 서점이 생각났다. 전생의 대형 서점처럼 건물 규모가 꽤 컸던 걸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 부모님의 도움으로 원고를 출판사에 주기만 했지, 내 책이 어떻게 팔리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 한 번 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이에 숙소로 향하던 발걸음을 서점으로 돌렸다. 길은 이미 머릿속에 외워둔 참이다.
그리고...
[현재 '제논 일대기'는 전권 모두 매진되었습니다. 손님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 ..."
입구부터 범상치 않은 문구가 기재되어있었다. 최근에 발간된 것도 아니고 전권이 모두 팔렸단다. 이게 정말 사실일까.
내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문구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서 어떤 여자가 앙칼진 목소리로 짜증을 부렸다.
"아이씨. 진짜! 나 아직 5권밖에 못 읽었다고!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조금만 참아, 마리. 출판사에서도 제논 일대기만 인쇄하고 있다고 말했으니 언젠가 나오겠지."
"그 언젠가가 도대체 언젠데?! 여기 와서도 매진됐다는 소리만 하고 있잖아!"
하도 시끄러워서 그녀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생떼를 부리는 여자를 확인했다.
인상을 써서 그런지 고집이 강해보이지만 고양이상의 미인이다. 독특하게도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의 소유자였으며 눈동자는 푸른색이었다.
여자를 말리느라 진땀을 빼는 중인 남자는 그의 오빠로 추정됐다. 이목구비는 달라도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색깔이 완벽히 일치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여자의 히스테리는 계속 이어졌다.
"오빠가 분명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제논 일대기가 있을 거라며! 지금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
"그, 그게...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어."
"몇 권 정도?"
"...6권은 3개, 7권은 아예 없었지."
"지금 장난쳐?! 오빠가 대신 사줬어야지!"
"마리. 너도 알겠지만 제논 일대기는 한 사람당 한 명밖에 못 사도록 규정으로 막혀있어. 옛날에 사재기를 하던 일당이 검거된 거 몰라?"
이제는 어질어질하다.
다른 건 몰라도 책으로 사재기하는 건 처음 듣는 소리다. 무슨 밀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황당함에 헛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운 나쁘게도 백발의 여자가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아까보다 더 화난 표정을 짓더니 나에게 소리쳤다.
"야. 너 뭐야? 방금 나보고 웃은거야?"
"마리!"
"이거 놔. 저 애가 날 보고 비웃었다니까?"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갈 길 가세요."
"놔! 이거 놓으라니까!!"
마리라고 불린 여자는 자기 오빠한테 질질 끌려가면서도 아득바득 나를 노려봤다. 나는 그들이 떠나가도 한바탕 폭풍이 스쳐지나간 느낌에 못 박힌 듯이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현재 내 소설이 어떤지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사재기까지 할 정도면 말 다했지.
"...밥이나 먹자."
저 애도 입학생인 것 같은데 설마 같은 반으로 배정되는 건 아니겠지?
*****
이번 헤일로 아카데미의 신입생 수는 대략 200명이다. 여기서 무학은 150명이고, 문학은 5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어째서 문학보다 무학에 사람들이 3배 많냐고 물으면 이 세상의 특징 때문이다. 몬스터와 마나가 존재하고, 전생과 달리 기계보다는 사람의 힘에 의존하는 세상.
그러다 보니 교육도 '무(武)'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며, 마법조차 일종의 무력이라 무학에 편입된 상태다. 이때문에 무학 내부에서도 특성에 따라 반이 나뉘어진다고 들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문학이 외면당한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절대 아니다. 일신의 무력이 없어도 세상을 뒤바꾼 사례는 이곳에서도 빈번하다.
거기다 군인에 가까운 무학과 달리 문학은 전문직이라고 할 수 있다. 군인이 국가를 지켜주는 창과 방패라면, 전문직은 국가를 지탱하는 뼈대다.
그렇다면 문학의 반배정은 어떻게 되냐고?
어떻게 되긴. 한 반에 50명을 모두 다 몰아넣는거지.
결국 세실리와 리나와 같은 반이 되었다. 망할.
"아~ 세실리 공주님도 문학이셨군요. 함께 배우게 되어 영광입니다."
"응? 당신은 누구죠?"
리나와 세실리가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어떤 한 남학생이 끼어들었다. 세실리와 리나의 얼굴에 순간 불쾌감이 새겨졌으나 금방 사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학생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제 이름은 잭슨 미렐 케리손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마족의 공주님과 제국의 위대한 태양이시여."
나는 벌써부터 수작질을 벌이는 남자를 보며 코웃음쳤다. 속내가 너무 뻔해서 얼탱이가 터진다.
너무 오버하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개념이 꽉 박힌 사람이라면 저런 식으로 대화에 끼지 않는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리나와 세실리가 나란히 앉은 걸 보고 얼씬도 못 하는 중이다. 저걸 용기라고 해야 할지 만용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눈치가 없는 걸 수도 있고.
세실리는 잭슨의 자기소개를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관심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들어도 전 잘 모르겠네요. 리나 님은 누군지 아세요?"
"...케리손 백작가는 우리 미네르바 제국에서 부유하기로 따지자면 순위권에 드는 가문이에요."
잭슨이라는 놈은 리나가 자신의 가문에 대해서 대신 설명해주자 으쓱거렸다. 생긴대로 논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행동 하나하나가 재수없고 느끼함만이 느껴졌다.
뒤이어 자신감이라도 얻었는지 잭슨은 세실리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실리는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도 평온한 얼굴 그대로였다.
"들으셨죠? 어떻습니까?"
"어떻냐고요?"
"네. 혹시 저에게 관심이 있으시다면..."
"관심없으니까 저리 가주실래요?"
"...나중에. 네?"
물론 세실리가 대놓고 거절하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변했지만.
세실리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며 말했다.
"전 리나님이랑 대화하고 있었는데 끼어들다니 이 무슨 결례인지 묻고 싶네요."
이어서 세실리는 리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리나 님. 미네르바 제국의 귀족은 다 이런가요?"
"아뇨. 저 사람만 그런 거예요. 케리손 백작가라고 하셨죠? 당신은 케리손 백작가에서 레이디에게 함부로 치근덕거리라고 배웠나요?"
"아, 아니. 그게..."
"더이상 할 말이 없으면 돌아가주시겠어요? 곧 수업이 시작할텐데."
"죄,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시하자 잭슨도 급히 사과하며 돌아갔다. 얼굴을 확인하니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으락푸르락해진 상태다.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는데 저 놈은 자기 알아서 깎아먹었다. 그래봤자 백작가 영식이 황녀에게 '감히' 개길 수는 없겠지.
괜히 개겼다간은 목이 날아가는 건 둘째치고 가문이 완전히 몰락할텐데 처신은 잘 해야 하지 않겠나. 그것마저 못 한다면 병신인거고.
"어? 너 어제 그 빨간머리!"
"응?"
내가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때 옆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어쩐지 매우 익숙한 목소리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이게 웬 걸. 어제 서점에서 마주쳤던 백발의 소녀, 마리가 나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아, 염병. 얘도 문학이었어?'
하늘도 기구하시지. 하필이면 첫 만남이 좋지 않았던 여자랑 같은 전공이라니.
그런 내 속내도 모르는지 백발의 소녀, 마리가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나를 쏘아붙였다.
"어제 나보고 비웃은 거 맞지?"
아닌데.
"뭐, 너도 문 앞에서 서성인 걸 보면 나랑 상황이 똑같았겠지만. 아니야? 너도 책을 사려다 매진됐다는 거 보고 짜증났겠지."
난 책이 아니라 초고를 갖고 있는데. 그리고 짜증이 나기보다는 황당했는데.
그것 외에는 차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더니 마리가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죽거렸다. 아무래도 자기 멋대로 착각하고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뒤이어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선심 썼다는 뉘앙스로 입을 열었다.
"휴우. 그래. 비슷한 처지끼리 싸워봤자 뭘 하겠어. 어제 그 무례는 내가 특별히 용서할게."
"... ..."
"분명 작가 님도 우리가 싸우는 걸 원치 않으실 거야. 게다가 그런 상황은 우리가 아니라 그 분의 명예에 먹칠하는 거겠지. 안 그래?"
내가 작가야, 이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