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모두에게 묻겠다. 입학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우리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무한한 영광과 축복이 있길 바라며..."
뭐긴 뭐야.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시지. 여기는 총장이라 불러야하나.
아무튼 길고도 지루한 훈화 말씀은 어딜 가나 변치 않는 모양이다. 대신 나 혼자 지루한 건지 몰라도 내 옆에 서 있는 입학생들의 눈빛은 초롱초롱하기 짝이 없다.
미네르바 제국에서 최고의 교육기관이라는 헤일로 아카데미의 총장은 분명 높으신 분일테고, 이들은 그 높으신 분이 친절하게 설명하니 좋게 볼 수도 있다.
나에게는 그냥 풍채 좋은 영감 님이 좋은 말씀하는 것밖에 되지 않지만. 한시라도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그런데 여기는 돈을 얼마나 처바른 거야?'
입학식은 대강당에서 실시되었는데, 그 규모가 무시무시하다. 일반적인 체육관을 두 개 정도 이어붙은 크기다.
신입생 뿐만 아니라 학부모는 물론, 유망주를 보러 온 사람도 많기에 수용 인원을 늘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엄청난 크기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하나도 안 보이네.'
무엇보다 단상 위에 올라가 있는 총장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총장 뿐만 아니라 옆의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얼굴도.
내가 뒤쪽에 앉아있는 것도 있지만 난 시력이 좀 안 좋은 편이다. 매일매일 책만 읽고 집필하다보니 자연스레 시력이 나빠졌다.
그렇다고 아주 나쁜 건 아니고, 일상 생활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게 아니었으면 진작에 안경을 맞췄겠지.
안경의 불편함은 전생에서 차고 남도록 느꼈으니 관리는 꾸준히 하고 있다.
"...하여, 모두에게 무운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이상입니다."
교장님, 아니 총장의 훈화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잠깐 멍 때리고 있어서 깜짝 놀라 자동으로 박수를 쳤다.
뒤이어 박수 소리가 잠잠해지고 드디어 숙소로 가는 건가 싶을 때, 안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참고로 저거 마법으로 방송하는거다.
[이어서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의 소감 발표를 진행하겠습니다.]
염병. 아직 남아있는 게 있다니.
내가 속으로 꿍얼거리고 있을 때, 대강당 내부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입학하는 거야? 마족이?
-아무리 그래도 조금 불안하긴한데...
-와... 엄청 예쁘다.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기 부끄럽지만 내가 직접 쓴 제논 일대기를 통해 마족을 향한 시선이 달라졌다는 건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달라진 게 이정도다.
전에는 얼마나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살았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마족은 언제나 걸어다니는 시한 폭탄 그 이상으로 취급당했으니 매우 심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족은 어지간해서 헬리움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는 모양이다. 세실리의 결정은 그만큼 파격적이고, 또한 과감했다.
'...근데 하나도 안 보이네.'
눈매를 좁히며 단상에 시선을 집중해도 공주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 거리에서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면 그것도 이상한 거지만 나에게는 그냥 검은색 덩어리가 움직이는 중이다.
주위에서 예쁘다, 아름답다, 가슴 크다, 섹시하다 등등. 외모와 관련된 극찬이 쏟아지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나는 볼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앞에 앉을 걸. 이게 다 전생에서 항상 뒷좌석에 앉던 버릇 때문이다.
우웅-
[아. 아아. 모두들 안녕하신가요? 반갑습니다.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이라 합니다.]
우와. 목소리 진짜 쩐다. 라디오 하면 대박날 듯.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지 세실리가 입을 열자마자 강당 내부가 고요해졌다. 목소리가 얼마나 예쁘면 시끄러웠던 강당이 삽시간에 조용해질까.
그동안 세실리는 고혹적이면서 농염한 목소리로 자기가 하고픈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분들도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믿지 못 하실 거예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존재라 불리는 마족이니까. 아마 여전히 꺼림칙하신 분도 계실거고, 어쩌면 경멸하는 사람도 계실 거예요.]
강한 호소가 깃든 말이라서 그럴까. 나는 잡생각을 치우고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도 나랑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전부 엄숙한 표정으로 경청하는 태도를 취했다.
세실리는 좌중을 한 번 둘러보는 듯하더니 힘있는 목소리로 본인의 심정을 소신껏 표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책이 나온 이후로 마족을 향한 시선이 달라졌죠. 그 책은 우리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에서 인간이길 소망하는 가련한 존재들로 표현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소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줬죠.]
"음..."
나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말을 직접 들으니 내 얼굴이 다 화끈해진다.
과연 세실리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이 강당에 있다는 걸 알기는 할까. 아마 하늘이 무너져도 절대 모를 것이다.
[그러니 전 책에서 보여준 것처럼, 제가 여러분들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우리 마족도 인간처럼 웃고, 떠들고, 슬퍼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께 반드시 보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입에 발린 말보다 본인의 의지와 결심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말.
정말 멋지다. 이순간만큼은 멋지다라는 표현밖에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
과연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절대 못 한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난 세실리, 그녀처럼 굴곡진 인생을 살지도 않았고 용기도 없었으니까.
'...나쁘진 않네.'
나는 단상에서 내려가는 세실리를 보며 진심을 담아 응원했다. 신문으로 볼 때는 황당하기 그지 없었는데 지금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소설 속 여주인공이 현실에 등장했다면 딱 저렇겠지.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얼굴이라도 제대로 봤으면 좋았을텐데.'
눈이 나빠서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게 한이다. 뭐, 그녀도 신입생이니 언제 한 번 쯤 마주치지 않을까.
[이상으로 헤일로 아카데미 제 1012회 입학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신입생들은 각자 배정받은 반을 확인해주시길 바랍니다. 수업은 내일부터 시작합니다. 이상.]
드디어 길고 길었던 입학식이 종료됐다. 반은 조금 있다 확인하면 될 것이니 우선 숙소부터 갈 예정이다.
나는 사람들이 강당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가도 가만히 있었다. 지금 끼어들었다가 이리저리 치일테니 어느 정도 빠져나간 뒤에 나갈 계획이다.
"아이작!"
"응?"
"여기야 여기!"
그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동명이인을 불렀다면 모를까, 내가 아는 목소리였기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나와 같은 붉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맹금류 같은 황금빛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팔을 흔들고 있었다. 또한 그 옆에는 남색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황금색 눈동자를 지닌 여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두 남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반가움에 미소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형! 누나!"
"오랜만이구나. 아이작."
"잘 지냈어?"
내 형과 누나다. 이름은 각각 데이브와 니콜.
형은 아버지를 똑 빼닮아 강직한 전사의 이미지를 풍겼고, 누나는 어머니를 닮아서 상당한 미녀다.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우리 막내 입학식하는 거 보러 왔지."
니콜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째서 그녀가 허리를 숙였냐면 내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다.
얼굴은 몰라도 신체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아서인지 그녀는 키가 매우 큰 편이다. 아마 어지간한 남자보다 크지 않을까.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었어? 아버지랑 어머니는 어때?"
그때 데이브가 부모님의 안부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의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하며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늘 똑같으시지. 아마 평생 그럴 거 같은데?"
"그래? 부모님도 참. 그렇게도 서로가 좋으신건가."
데이브는 피식 웃었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주변에 빠져나가지 않은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이에 데이브는 고개를 약간 숙여 속삭이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만나자마자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한데, 다음 권이 언제 나오는지 알려줄 수 있니?"
"... ..."
역시나 예상대로다. 나는 순간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내 표정에 데이브는 화들짝 놀라며 변명을 주절주절 내뱉기 시작했다. 옆의 니콜은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아, 아니. 물론! 우리 막내를 더 보는 게 중요하지!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
"시끄러. 오빠는 동생보다 책이 더 중요해? 애가 섭섭해하잖아. 아이작, 저 멍청이 말은 무시해도 돼. 알겠지?"
"...응."
참고로 전생의 나이까지 합치면 내가 이 둘보다 나이가 많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건 아제 신경쓰지 않는다.
괜히 신경 썼다가 머리가 복잡하기도 하고, 이 둘이 나보다 어른스러운 면모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내가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었을 수도 있고.
"쩝... 아무튼 미안하다. 너도 꽤나 스트레스 받고 있을텐데 내가 실언을 했네."
"아냐. 괜찮아. 그나저나 아까 헬리움의 공주가 한 연설 들었어?"
지금 같은 상황에는 화제를 돌리는 게 최선이다. 데이브는 내 질문을 듣자마자 단상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와 니콜 또한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단상에는 아직까지 세실리 공주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누군가 있었는데 아카데미 입구에서 봤던 리나 황녀였다.
두 여자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몰라도 상당히 밝은 표정이었다.
"확실히 공주의 자격이 있긴 있더라. 나 같으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렇게 못 하거든."
"음... 그렇지?"
"그래서 기분이 어때? 사실상 헬리움의 공주를 단상에 세우게 만든 것도 네 책 덕분이잖아."
니콜이 은근슬쩍 그리 물었다. 하지만 나는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묘하다고 해야 하나.
연설을 들을 때는 뭉클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영 어색했다. 정말로 그런가 싶어서.
어째서 내가 왜 이런 기분을 느끼냐면, 전생 때문인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세상 경험이 전무하다.
마족을 향한 차별을 두 눈으로 본 적도 없으며, 악마로 변한 마족이 어떤 사건사고를 저질렀는지 알지도 못 했다. 심지어 이곳의 상식조차 잘 모르는 편이다.
"...솔직히 말해서 와닿지가 않아. 형이랑 누나도 알다시피 난 밖에 나간 적도 없고, 집에서 책만 읽었잖아.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잘 모르겠어."
"얘는. 누누이 말했지만 너무 자신을 깎아내리지 마. 너는 우리 가문의 소중한 보물이니까. 알겠지?"
대답을 들은 니콜이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니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또한 방긋 웃으며 그녀의 기대에 부응해줬다. 그러자 니콜이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나랑 오빠한테 물어봐. 전공이 달라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생활이면 도와줄 수 있을 거야."
"응. 알았어."
"아카데미 생활할 때는 학업에 집중해야한다. 괜히 부담 갖지 말고 글을 쓸 필요는 없어. 알겠지?"
"응."
"착하다. 우리 아이작."
이처럼 니콜은 나를 어린애로 보는 경향이 있다. 사실 그녀 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그런다.
이 세상은 17살이 되면 성인으로 취급하지만 그들은 20살이 되기 전까지 이러지 않을까. 그래도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전생에 기댈 수 있는 가족이 갑작스레 사라져서 그런 것일지도.
가족 간의 정이라는 건 참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기에 나에게는 더욱 소중했다.
"그럼 이제 가봐. 우릴 찾고 싶으면 언제던지 연락하고."
"알겠어. 나 갈게."
나는 그들에게서 멀어지면서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두 사람도 나에게 응원을 메세지를 보내며 손을 흔들어줬다.
가슴이 따스해지는 재회를 뒤로 하고, 나는 우선적으로 숙소로 향했다. 숙소의 위치는 입학식 전에 지도 조교가 모두 설명해줬다.
"룰루루~"
오늘 하루는 숙소에서 편히 쉴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
한편 아이작이 떠난 대강당.
대강당의 단상 위에는 엘프 못지 않게 아름다운 두 미녀가 밝은 표정으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한 명은 칠흑색 머리카락과 피처럼 붉은 눈을, 또 한 명은 황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지녀 각자 색다른 매력을 뿜내고 있었다.
특히 칠흑색 머리카락의 여인은 머리에 뿔이 솟아나있어 누가 봐도 마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 이번에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와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 리나다.
그녀들은 여느 때의 평범한 소녀처럼 꺄르르 웃으며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꺄하하하! 정말이지 그거는... 아참. 리나 님. 혹시 그 장면도 아시나요? 메리가 불한당한테 킥을 날린 부분이요."
"아~ 물론 알고 있죠. 아마 그 킥의 이름이..."
"헥토파스칼 킥. 그쪽 세계에서는 폭풍의 이름 중 하나라고 들었어요."
"푸흐! 기억나요. 그때 얼마나 통쾌했던지."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이자 세실리와 같은 입학생, 리나가 조신하게 웃음을 흘렸다.
마음 같아서는 세실리처럼 깔깔 웃고 싶었으나 황녀로서 기품은 지키고 있었다. 오히려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호탕하게 웃은 세실리가 독특한 거다.
"리나 님도 제논 일대기의 열렬한 팬이신가봐요? 이런 세세한 것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물론이죠. 솔직히 제논 일대기를 아예 안 봐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을걸요? 제가 장담할 수 있어요. 그런데..."
리나는 잠깐 말을 흐리며 세실리의 외모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름답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모든 게 완벽하다.
자신이 청순한 이미지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면 세실리는 성숙한 이미지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자태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부위가 있다.
그건 바로 흉부, 즉 가슴이다. 자신도 꽤 큰 편인데 세실리는... 더이상 설명은 생략한다.
유일한 오점은 그녀가 마족이라는 건데, 솔직히 이정도 미모 앞에서는 굳이 제논 일대기가 발매되지 않았더라도 수많은 남성의 애간장을 녹였을 것이다.
이에 리나는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며 세실리에게 물었다.
"...세실리 님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자요?"
"네. 마족의 숙명을 덜어주다 못해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잖아요. 사실상 은인이지 않아요?"
리나도 제논 일대기가 발간되기 전까지 마족을 폭탄 취급했다. 실제로 황궁 밖으로 나갔을 때 악마화를 한 마족에게 습격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마족이라면 악마의 탈을 뒤집어 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논 일대기가 나온 이후부터는 완전히 달라졌다.
"저도 악마화를 한 마족에게 습격을 받았던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마족이라면 치를 떨었죠. 그런데 이 책이 나온 이후부터 마족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더라고요."
"... ..."
"당장 저조차 이런 생각을 하는데 세실리 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요."
그 질문을 들은 세실리는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진심이 담겨있는 미소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는 말이 있다. 지금 세실리가 그러했다.
리나가 그녀의 아리따운 미소에 속으로 감탄하고 있을 때, 세실리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핏빛 눈동자에는 아련함과 애틋함이 한데 섞여 애잔하게 일렁이였다.
"은인... 이라 해도 한참 부족하죠. 그 분은 우리 마족을 악마가 아니라 인간으로 봐준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제 모든 걸 내주고 싶어요."
"그정도에요?"
"네. 저희 마족은 무려 1000년 넘게 악마로 취급당했던 역사가 있으니까요. 혹시 5권의 마지막 부분에 사크란이 했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아. 그 부분은..."
아직 완결이 되지 않았지만, 독자들은 제논 일대기의 명장면을 뽑는다면 단연 5권의 최후반부를 고를 것이다. 그 장면이야말로 마족의 고독한 숙명을 고스란히 대변해줬으니까.
세실리는 아직도 여운에 잠겨있는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사크란처럼 되고 싶어요. 최후의 순간에도 악마가 아닌 인간으로 생을 마감하는 마족으로요."
"... ..."
"그럼 리나 님은 저자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저는..."
리나는 순간 당황하며 세실리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녀의 속내를 들으니 자기자신이 초라해졌다.
그러나 황녀로서의 임기응변 덕분일까. 리나는 서둘러 대답을 입 밖으로 꺼냈다.
"황궁에 가둬놓고 글만 쓰게 하고 싶은 사람?"
"...네?"
아. 실수했다.
리나는 본인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뒤늦게나마 자각하여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한 번 꺼낸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
세실리는 리나의 새하얀 얼굴이 실시간으로 붉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그게 뭐에요! 진심이 나오신 거 아니에요?"
"그, 그게...!"
"어쩐지 신문에서도 그리 말하시더니 진심이셨구나?"
"제, 제발 내 말 좀 들어보세요!"
그리하여 두 여자의 우정은 한층 더 깊어져만 갔고.
"푸에취!"
숙소에 도착해 집필을 하던 아이작은 갑작스레 재채기를 하게 됐다.
"크응. 아, 씨발. 침 묻었네."
침 때문에 잉크가 번진 원고를 쫙- 쫙- 찢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