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69
“꺄악! 귀여워!”
클레어는 내가 보여준 도토리 팔찌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어쩜 이렇게 조그맣지? 이 안에 팔이 들어간다는 거잖아? 꺄악! 진짜 너무 귀여웠겠다!”
도토리 팔찌 안에 손가락 세 개를 겨우 끼워 넣고, 클레어는 다시 감격했다.
오늘은 클레어가 쉬는 날이었고, 나 역시 그랬다. 내가 저택을 비웠던 3주간의 모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 클레어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맞춘 것이었다.
사실 진짜 중요한 엔기스를 만난 이야기나, 피이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들은 클레어에게 해줄 수 있었다.
중간에 내가 요리를 망친 일이나, 갑자기 나타난 멧돼지 이야기, 안젤라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클레어는 그 이야기들도 매우 재미있게 들었다.
“이것 보니까 옛날 생각난다. 나도 어렸을 때 이런 걸 만들고 놀았는데 말이야.”
“그래? 너도 도토리 팔찌를 만들었어?”
나는 그런 적이 없던 터라 의외였다. 우리 집은 숲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나는 먹지도 못하는 도토리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었다.
“내가 어릴 때 우리 동네에서는 꽃팔찌를 만드는 게 유행이었어.”
“오호~.”
클레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그런 적이 있던가를 생각해봤다. 하지만 어린 나는 꽃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다.
앗, 아니다. 언니가 알려준 달콤한 꿀을 먹을 수 있는 빨간 꽃은 눈을 번뜩이며 찾아다녔던 것 같기도 했다.
“꽃을 엮어서 만들기도 하고, 강아지풀로 토끼 팔찌를 만들기도 했었지. 아주 시간이 많을 땐 화관도 만들었어.”
“강아지풀로 토끼를?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간단해. 그냥 두 개를 합쳐서 묶기만 하면 되거든? 지금은 겨울이라서 강아지풀이 없으니 안 되겠지만, 나중에 봄이 되면 내가 만들어줄게.”
“와! 기대할게!”
내가 기대한다고 말하자, 클레어는 뿌듯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너흰, 또 일은 안 하고 이렇게 떠들고 있니?”
갑자기 끼어든 시비조의 말투에 클레어는 깜짝 놀라서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닫아두었던 식당 문이 어느새 열려 있었고, 거기에는 잔뜩 불만 어린 표정의 예전의 그 빨간 머리, 노란 머리, 그리고 갈색 머리의 하녀 삼총사가 서 있었다.
“우린 둘 다 오늘 쉬는 날인데.”
나는 시비를 걸겠다고 단단히 다짐한 표정으로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그들을 향해서 말했다.
“너희야말로 일 안 하고 뭐해?”
내 질문에 그들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너희는 무슨 일하는데, 일은 안 하고 그렇게 셋이 뭉쳐 다녀?”
나는 정말로 궁금했다. 저렇게 한가한 부서가 있으면, 오르디에게 클레어를 거기에 배치해달라고 하고 싶었다.
요즘 날이 추워서 찬물에 채소를 씻느라 클레어가 손이 시려 죽겠다고 해서 말이다.
“우, 우리는 일 다 하고 온 거거든!”
“벌써?”
바깥은 아직 훤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일이 끝났다고?
“너희 무슨 일하는데? 주방은 아닐 거고, 세탁실? 아니면 청소? 혹시 마구간? 대체 어디길래 이렇게 빨리 마쳐?”
나는 더욱 궁금해졌다. 나는 이미 꿀직장이지만, 이렇게 일이 빨리 끝나는 좋은 부서가 있으면 클레어도 옮기면 좋을 것 같았다.
“시, 시끄러워! 내가 어디서 일하는지 네가 알아서 뭐하게!”
역시나 꿀보직 정보는 아무한테나 알려주는 게 아니었는지, 노란 머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에 쟤 이름을 들은 것 같은데 이미 잊어버렸네.
어쩔 수 없었다. 엑스트라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다간 머리가 터질 테니까.
“네가 알아야 할 건, 네가 카르오 대공님 평판에 아주 완벽히 먹칠했다는 거야.”
내 앞으로 척척 걸어온 노란 머리가 식탁을 아주 세게 내려치며 말했다.
그제야 저 삼총사가 여기에 나타난 이유를 깨달았다.
뭐, 시비를 걸러 왔다는 것은 진작 알았고, 구체적으로 어떤 걸로 시비를 걸지를 지금 알았다는 것이 맞겠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손 안 아파?”
내 질문에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시, 시끄러워! 왜 내 손 걱정을 하는 거야?”
“아, 걱정한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전혀 걱정하지 않았으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마.”
“…….”
조금 전에 흔들렸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더니, 순식간에 분노로 들끓는 것이 보였다.
엑스트라답게 참으로 감정 기복이 심하고, 평면적인 성격이었다.
“너! 네가 없는 동안에 무슨 흉흉한 소문이 돌았는지 알아?”
“없었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오히려 내가 되묻자, 이번에는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물론, 화가 나서였다.
“카르오 대공이 천하디, 천한 하녀를 밤마다 자기 침실로 불러들였다.”
내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그녀는 단어를 내뱉었다.
“애초에 카르오 대공이 선대 카르오 대공을 죽인 것은 그 하녀 때문이다.”
나는 매서운 그녀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같이 쏘아봐 주었다.
“신분 차를 극복하지 못한 카르오 대공이 그 천한 하녀와 결국 야반도주했다.”
어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듯이 그녀는 입을 앙다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 소문, 어디서 들었어?”
“어디서 들었으면?”
“당장 그 소문을 퍼트린 사람을 찾아내서 대가를 치르게 하려고.”
“뭐?”
“테오도르 님이 저택을 비운 건 비밀이었어. 분명 집사님이나 리타 아주머니, 오르디 님이 고용인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을 텐데, 그따위 소문을 낸 사람이 있다면 찾아내야지. 그리고 당연히 해고해야지.”
“해고? 네까짓 게 고용인을 해고한다고? 어디서 하녀 주제에 안주인 노릇을 하려고 들어!”
“안주인 노릇을 하려는 게 아니라, 카르오 대공 가에서 일하면서 카르오 대공님께 해가 되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제거해야 하니까 하는 말이야.”
“카르오 대공님께 해를 끼치는 사람은 너야.”
노란 머리 하녀의 검지가 날카롭게 내 가슴을 꾹 찔렀다. 움푹 들어간 그녀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나 역시 본래는 엑스트라였음을 실감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금방 분노했다. 내가 테오도르에게 해가 된다는 말에 가슴 속에 있는 감정이 순식간에 끓어 올랐다.
“네가 정말 카르오 대공비가 될 거로 생각해?”
“그런 생각 안 해.”
“당연하지. 평민은 절대로 귀족이랑 결혼할 수 없어.”
그녀의 검지가 더 깊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카르오 대공님이 너를 아무리 예뻐한다고 해도, 신분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는 거야.”
꾹, 꾹. 손가락이 더욱 가슴을 찔렀다.
“그러니까, 괜히 나대지 말고 조용히 살아. 네가 이 저택에서 뭐라도 되는 양 굴지 말고, 대공님께 폐 끼치지 말고, 쥐 죽은 듯이 살라고.”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그녀는 더욱 기가 살아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떠들어 댔다.
그녀의 뒤에 있는 하녀들은 함께 기세등등했고,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클레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래. 네 말이 다 맞는 말이야.”
조용히 있던 내가 그녀의 말에 긍정하는 말을 내뱉자, 비열한 승리의 미소가 노란 머리 하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처맞는 말.”
나는 아직도 내 가슴을 누르고 있던 손가락을 붙잡았다. 아까부터 이게 너무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악!”
가볍게 손가락을 꺾자, 노란 머리 하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너희는 학습 능력이 없어? 내가 지난번에 분명히 말했잖아? 너희들 말대로 나는 카르오 대공님이 총애하는 하녀고, 그러니까 약간 패악질을 부려도 그분이 용서해주실 거라고.”
보통의 소설 속 여주라면 이 정도에서 멈췄을 것이다. 경고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하고, 그녀들을 용서해주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중요한 사건들 때문에 이런 하찮은 에피소드쯤이야 금방 잊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태생이 여주 동생이라는 엑스트라였고, 그리 마음이 넓지도, 착하지도 않았다.
“악!”
나는 그녀의 손가락을 가차 없이 꺾었다. 보통의 여자라면 그러지 못했겠지만, 내 힘으로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까보다 더한 비명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고, 내가 손을 놓자 그녀는 재빨리 손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래봤자 그녀의 검지는 이미 자기 힘으로는 되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꺾여있었다.
부러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녀의 검지는 탈골된 것 같았다.
“한 번만 더 나한테 시비 걸러 오거나, 카르오 대공님에 대해서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면, 너희는 손가락이 필요 없어서 그런 걸로 알게.”
나는 하녀 삼총사를 하나하나 쳐다봐주면서 말했다.
“알아들었으면, 이만 꺼져줄래?”
내 협박은 아주 효과가 좋은 듯했다. 3명은 아주 쏜살같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