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168화 (168/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68

“피? 피피? 피!”

“응. 그래, 그래.”

뭐라고 말을 하는 하늘색 슬라임의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며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방금 같이 목욕하고 나온 터라 안 그래도 반투명하고 반짝이는 슬라임의 피부가 더욱 반짝반짝했다.

“뭐야? 이제 레이디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거야?”

방에서 과일을 먹으며 기다리고 있던 스기엔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전혀 모르는데.”

“근데 왜 알아들은 척하는 거야?”

“맞장구는 못 알아 들어도 칠 수 있잖아? 그래야 말하는 얘도 뭔가 신날 것 아니야. 원래 옹알이 하는 아기들한테도 그러잖아.”

“그러다가 네 욕하는 거면?”

“내 욕을 했어?”

이 슬라임 참 그렇게 안 보였는데, 저렇게 해맑은 얼굴을 하고 내 욕을 하고 있었다고?

“당연히 아니지! 레이디의 어여쁜 입술은 욕 같은 건 어울리지 않아!”

“피이!”

둘은 동시에 발끈해서 소리쳤다. 좀 억울했다. 아무리 봐도 얘는 사람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은데, 왜 하지는 못하는 거지?

“원래 슬라임은 사람 말을 하는 것 아니었어?”

나는 말이 통하는 스기엔에게 물었다.

“나도 원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스기엔은 입장을 정확하게 하지 않고, 말꼬리를 흐리며 하늘색 슬라임을 쳐다보았다.

사람 말을 하는 슬라임1, 사람 말을 못 하는 슬라임2. 비교할만한 상대가 둘밖에 없으니 어느 게 원래라고 하기에 무색했다.

“뭐, 슬바슬인가보지.”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슬바슬이 뭔데?”

“슬라임 바이 슬라임. 슬라임마다 다르다고. 대충 스기엔과 이 슬라임의 특색이라고 생각해야지.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얘도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스기엔의 질문에 나는 친절히 대답해주었다. 슬라임 학자가 어디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까지 얘, 쟤, 걔, 슬라임으로 부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름이 있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하늘색 슬라임을 마주 보며 말했다.

“피이!”

“그래? 그럼 네 이름을 피이로…….”

“좋다라고 대답한 거야. 이름을 피이로 하겠다는 게 아니라.”

통역사님께서 얼른 대답했다.

“그럼 이름은 좋다로…….”

“성의가 없잖아!”

이번에는 대변가님께서 발끈했다. 어째 본인보다 스기엔이 더 의욕적인 듯했다. 솔직히 쟤는 아무 이름이나 다 좋다고 할 것 같은데.

“그럼 성의 있는 이름은 뭔데? 스기엔이 말해 봐.”

“흠…….”

이번에는 작명가님이 납셨다.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스기엔은 하늘색 스기엔을 바라보았다.

“피이?”

스기엔과 눈이 마주치자 하늘색 슬라임은 눈을 깜빡이더니, 살짝 머리의 뿔을 갸우뚱했다. 그러자 스기엔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뷰티풀 프리티 엘레강스 더 고~ 져스…….”

“그냥 피이라고 하자.”

스기엔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얼토당토않은 단어들을 싹둑 잘라내며 나는 말했다.

“아니! 너무! 성의가 없잖아!”

“아니! 왜! 피이라고 우니까! 피이지! 개는 멍멍 우니까 멍멍이! 고양이는 야옹야옹 우니까 야옹이! 얘는 피이하고 우니까 피이!”

“피이!”

“거봐! 피이라잖아!”

“개 좋아! 라고 했어!”

“거봐! 개좋다잖아!”

“아니! 개가 좋다고! 피이라는 이름이 개좋다는 뜻이 아니야!”

“좋아, 그럼 네가 말해봐. 넌 네 이름을 뭐로 하고 싶은데?”

스기엔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나는 결국 의견을 철수하고, 피이를…… 아니, 아직 이름이 없는 슬라임에게 물어보았다.

“자, 봐. 얘 이름은 스기엔이야. 내 이름은 레나티스. 넌?”

친절하게 손가락으로 스기엔을 가리키고, 이어서 날 가리킨 다음에, 마지막으로 하늘색 슬라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피이!”

“뭐래?”

기운찬 대답을 듣자마자, 나는 스기엔에게 고개를 돌렸다.

“피이 라고 했어.”

“나도 그렇게 들었어. 하지만 해석을 해줘야지.”

“피이라고 했다고.”

응? 스기엔이 한 말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아! 혹시?

“그러니까, 자기는 ‘피이’라고 했다는 거지?”

“응.”

“그러니까, 이름이 피이라는 거지?”

“그래. 이름도 귀엽지 않아?”

스기엔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조금 전에 내가 피이라고 말했을 땐, 성의 없는 이름이라고 해놓고선…….

“좋아, 그럼 피이?”

“피이!”

“잘 지내보자.”

나는 이름이 생긴 슬라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피이는 기분 좋다는 듯 내 손에 대고 자기 머리를 마주 부벼 주었다.

* * *

“고용인들의 입단속을 하긴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외부에서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집무실의 문을 닫자마자 오르디는 다급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저택에 돌아온 테오도르에게 마음 같아서는 일단은 푹 쉬라고 말하고 싶었다.

말을 달리느라 엉클어진 머리나, 피곤하고 푸석해 보이는 얼굴, 살짝 땀 냄새가 나는 구겨진 옷을 보자면, 그렇게 말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닥친 상황이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특히, 황실 쪽에서 눈치를 챈 모양입니다. 지난주에 입궁하라는 서신이 왔었습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입궁이 어렵다고 회신을 하긴 했습니다만, 믿지 않은 것 같습니다.”

“3주나 저택을 비웠으니 외부에서 눈치챌 만도 하지.”

집무실의 책상 한 귀퉁이에 있는 검은색 가발을 보며 테오도르가 말했다.

이 얄팍한 임시방편이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것은 이미 알았다. 들키리라는 것도 예상했다.

테오도르가 믿었던 것은 외부에서 카르오 대공의 부재를 알아차리더라도, 대놓고 그것을 추궁하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뒤에서는 무슨 일을 꾸미더라도.

상관없었다. 카르오 대공의 부재로 중요한 결정을 빠르게 내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야금야금 카르오가 가진 상권이나 무역권을 탐하더라도, 약간의 손실을 보더라도, 테오도르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것들보다는 레나티스가 훨씬 중요했다. 아니, 그에게 레나티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카르오 대공이라는 지위도, 테오도르라는 남자의 인생도, 레나티스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후 황실의 반응은?”

테오도르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책상에 쌓인 서류들을 보며 말했다.

오르디의 선에서 쳐낼 것은 쳐냈을 텐데도, 서류는 책상에 넘치도록 많았다.

저것을 전부 해치우려면, 2주는 족히 걸릴 듯했다.

오히려 이쪽이 테오도르는 더 짜증스러웠다. 이 서류들을 처리하는 동안 그는 바쁠 테고, 그러면 레나티스와 있을 시간이 부족했다.

‘당분간 또 집무실에서 티타임을 가져야겠군.’

“내일 황실에서 사람이 오기로 했습니다. 대공님을 직접 뵙고, 폐하의 말씀을 전달해드리겠다고 하더군요.”

그제야 테오도르는 오드리를 쳐다보았다. 그가 자신을 보자마자 울상을 지은 것이 확실하게 이해가 갔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핑계를 대고 지나갔지만,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카르오 대공을 직접 보고 말하겠다고 하니 그걸 거절할 핑계가 없었다.

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불안하고 초조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딱 하루 전에 테오도르가 귀환했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내일 내가 그자를 만나보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며 테오도르는 책상에 앉았다.

“지금 업무를 보시게요? 물론, 미뤄뒀던 터라 다 급한 서류이긴 합니다만, 오늘은 이만 쉬시면서 여독을 푸시는 게 어떻습니까?”

역시나 가장 중요한 것은 황실의 호출이었던 듯, 그 말을 다 전한 오르디는 그제야 테오도르에게 휴식을 권유했다.

“내일 황실에서 올 사람에게 줄 서류가 있어서.”

“네? 황실에서 요청한 서류는 달리 없습니다.”

“내가 황실에 요청할 게 있거든.”

테오도르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그 내용을 미리 써본 사람처럼 막힘없이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레나티…….”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레나티스의 이름을 부르려던 테오도르는 급히 입을 다물어버렸다.

레나티스는 방에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고집이 세긴 했지만, 테오도르의 말이라면 모두 따르는 그녀였다. 테오도르가 레나티스에게 그러했듯이.

테오도르가 입을 다문 것은 레나티스가 얌전하게 방에서 기다리고 있다 못해, 아예 잠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테오도르는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비로소 레나티스 외의 것이 테오도르의 눈에 들어왔다. 스기엔은 레나티스의 배 위에서, 피이는 그녀의 팔을 베고 누워서 자고 있었다.

그 꼴을 본 테오도르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곤 한 손에 하나씩 슬라임을 달랑 들어 올렸다.

슬라임도 여독이 있었던지 둘 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리고도 잠을 깨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침대에서 떨어진 저쪽 소파에 둘을 나란히 내려놓았다.

‘슬라임 방이라도 하나 마련해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그 방의 용도를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지금까지는 이들의 존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자신과 레나티스, 그리고 인스트가 다였다.

어쩌면 오르디에게는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리타 부인도.

원칙주의적이고 깐깐하지만, 의외로 작고 귀여운 것에 약한 오르디이니 이 슬라임들을 좋아할지도 몰랐다.

거기다가 오르디는 은근히 누군가를 챙겨주는 것을 좋아했다.

테오도르가 슬라임들의 거처에 대해서 생각한 것은 딱 다섯 걸음이었다.

다섯 발자국을 걸어서 다시 침대로 되돌아온 순간, 정확하게는 레나티스의 잠든 얼굴을 바라본 순간, 그의 머리 속에서 슬라임 생각은 마술처럼 싹 사라져버렸다.

“…….”

테오도르는 말없이 조용히 침대 가에 앉았다.

그의 무게감에 살짝 침대가 기울어지고, 레나티스의 손이 살짝 흔들렸지만, 그녀의 고른 숨소리는 여전했다.

물끄러미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테오도르의 얼굴 근육이 점점 풀어지고, 인상이 부드러워진다 싶더니, 이윽고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잠든 레나티스의 얼굴을 볼때면 늘 그랬다.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이, 그저 무방비하게 잠든 모습을 보면,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사랑스러웠다.

이 모습을 지킬 수만 있다면, 자신은 뭐든지 못할 것이 없을 것만 같았다.

테오도르는 손을 뻗어 그녀의 하얀 피부를 간지럽힐 것 같은 머리카락을 치워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레나티스의 곁에 누웠다.

슬쩍 분홍색 머리카락에 코를 묻어 그녀의 향기를 맡고, 배 언저리에 손을 얹어 편안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숨을 느끼며, 테오도르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