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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164화 (164/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64

세 마리의 말을 붙들고, 안절부절못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인스트는 우리가 어깨와 머리 위에 슬라임을 한 마리씩 얹고 돌아오자, 입을 쩍 벌렸다.

“피이!”

“이게…… 무슨 일이죠? 스기엔이 세포 분열이라도 한 겁니까?”

레이디께 수컷의 손길이 닿게 둘 수 없다는 스기엔의 주장으로 내 머리 위에 얹어져 있던 하늘색 슬라임이 기운차게 소리치자, 퍼뜩 정신을 차린 인스트가 물었다.

“무례하다, 인간! 감히 레이디께 손가락질이라니!”

어김없이 스기엔이 나섰다. 내가 두 슬라임을 다 데리고 가기에는 무겁다며 테오도르는 스기엔에게 자기 어깨를 빌려주었던 터라, 바로 귀 옆에서 나는 목소리에 테오도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말하자면, 긴데요…….”

나는 머리 위에서 슬라임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 잘 됐어요.”

나는 나의 결론에 동의를 구하며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어깨를 떨치며 스기엔을 거의 떨어뜨리듯이 내려놓던 테오도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 맞아. 다 잘되었어.”

테오도르는 평안한 미소를 지었다.

* * *

“마을이 보인다!”

앞쪽에서 스기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기엔은 레이디를 편안하게 모셔야 한다며 자기가 이제껏 잘 있었던 가방은 하늘색 슬라임에게 양보하고, 인스트의 말에 다른 빈 짐가방을 하나 묶어서 타고 있었다.

안에 쿠션도 넣고 답답하지 않게 구멍도 뚫어놓은 슬라임 전용 가방보다는 아무래도 임시로 만든 가방은 답답하다 보니 수시로 나와 있는 모양이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졸다가 굴러떨어져 맨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테오도르에게 머리가 잡힌 건 기억도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을이 보이는 걸 알면 슬슬 들어가지, 그래?”

한숨 섞인 인스트의 말과 함께 천천히 속도가 줄었다. 그리고 조금 더 나가자 내 시야에도 스기엔의 말대로 마을이 보였다.

안젤라가 사는 마을이면 더 반갑고 좋았을 테지만, 인스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발루텍스 산에서 이동을 제법 많이 한 덕에 오히려 그것보다 더 이전에 들렀던 큰 마을로 바로 내려갈 수 있다고 했었다.

안젤라를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 건 조금 아쉬웠지만, 대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며칠 더 단축되었으니, 이것도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원래 저건 저렇게 말이 많아?”

길이 좀 넓어지자 슬며시 내 옆으로 말을 몬 인스트가 말했다. 어째 좀 피곤해 보이는 말투였다.

하긴, 스기엔이 그리 과묵한 편은 아니지. 그래서 나는 같이 수다도 떨고 좋았지만, 아무래도 인스트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차라리 바꿀래? 쟤는 말 못 하잖아.”

인스트는 슬쩍 눈짓으로 엘리자베스에게 매달린 가방을 가리켰다. 당연히 가방이 아니라 그 안에 든 하늘색 슬라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스기엔이 싫어할걸요.”

스기엔은 자기 가방을 양보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로 내 말에 태워야 한다고 말했다.

음흉한 수컷들에게 레이디를 맡기면 안 된다나, 뭐라나.

테오도르는 종족을 뛰어넘는 더러운 사랑 따위에 관심 없다고 말해서 스기엔을 열받게 했고, 결국 하늘색 슬라임은 그대로 내 말에, 스기엔은 인스트의 말을 타게 된 것이었다.

“설마 내가 이거랑 숙소에서도 같은 방을 써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 글쎄요?”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은 예감에 나는 슬쩍 인스트의 눈길을 피했다. 사람은 셋이고, 방도 아마 세 개를 빌리게 될 터였다.

“오랜만에 침대인데, 좀 푹 쉬고 싶다고.”

“그럼, 제가 둘 다 데리고 잘까요?”

어차피 둘 다 조그만데 그렇게 크게 자리도 차지하지 않을 테고, 내가 양쪽으로 끼고 자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정말?”

“전 괜찮아요.”

간절한 인스트의 눈빛에 결국 나는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제야 인스트의 표정이 환해졌다.

스기엔과 함께 있는 게 그렇게 힘들었나 싶어서 잠시 짠한 마음이 들었다.

* * *

“으하~ 살 것 같다!”

푸짐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모처럼 따뜻한 물에 씻고, 침대에 눕자 내 입에서는 저절로 그 소리가 나왔다.

“너도 시원하지?”

“피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분 좋은 것 같은 목소리니까 시원하다는 거겠지? 욕조에서 찰방거리고 잘 놀았으니까 물을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아! 통역관이 있으니까 나 혼자 유추할 필요가 없네. 스기엔, 뭐래? 시원하대?”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스기엔에게 말했다. 그런데…… 얜 또 뭐하는 거람?

분홍색 몸을 더욱 붉게 물들인 스기엔은 어느샌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의외였다. 씻고 나오자마자 같이 논다고 정신없을 줄 알았는데?

“피이?”

하늘색 슬라임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저쪽에서 풀쩍 뛰어넘어와 스기엔의 뒷모습에 기웃거리다가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얘 왜 이래?’라는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스기엔? 왜 그래? 어디 아파? 열나?”

나는 스기엔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좀 뜨끈한 것 같기도 하고?

“피이이~?”

그러자 하늘색 슬라임도 스기엔이 걱정되는지, 나를 따라서 스기엔에게 제 몸을 찰싹 붙였다.

“으아아아니이이잇!”

그러자 스기엔이 그 자리에서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놀래라!

“소, 소인은 괜찮소이다.”

쟤 뭐라니?

나는 스기엔의 말투가 너무 어이없어서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기, 스기엔?”

“뭐냐, 하찮은 인간?”

……익숙한 저 건방진 말투에 괜히 안심되는 내가 싫어진다. 거기다가 왜 목소리마저 달라지는 건데?

“네가 얘를 여신처럼 떠받드는 건 알겠는데,”

“여신처럼이 아니라 여신 그 자체지!”

아, 네…….

“너무 그렇게 하면 상대방이 좀 부담스럽지 않을까?”

내 질문에 스기엔은 움찔했다. 틀림없이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혹시 연애 안 해봤어? 모태 솔로야?”

“무, 무슨! 이 내가 어딜 봐서 모태 솔로처럼 보여!”

“지금 그렇게 화를 내는 점이?”

“…….”

“아니, 사실, 솔직히, 스기엔은 모태 솔로일 수밖에 없지. 그동안 슬라임이 없었잖아. 상대가 있어야 뭐, 연애하든, 대시하든 할 텐데, 상대가 없었으니까 말이야.”

“…….”

이렇게까지 밑밥을 깔아줘도, 스기엔은 자신이 모태 솔로라는 것이 영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스스로가 슬라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처럼.

하긴, 세상에 악명을 떨치던 악룡이 어느 한순간에 하찮은 슬라임이 되어버렸으니 당연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겠지.

“그리고 사실, 있잖아.”

나는 하늘색 슬라임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스기엔을 향해서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아마도 귀가 이쯤에 있지 않을까 추정되는 스기엔의 신체를 향해서 손나팔을 만든 다음에, 하늘색 슬라임이 듣지 못하는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는 듯이 속삭였다.

“사실 모태 솔로 동정남도 수요가 많은 편이야.”

“뭐?”

“사실 나도 문란남 보다는 동정남이 훨씬 낫다고 생각해. 지고지순하고 좋잖아.”

“사, 사실이야?”

스기엔은 몸을 훽 돌려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당연하지!”

“그런데 왜 그걸 겨드랑이에 대고 말하는 건데?”

“…….”

거기가 겨드랑이……였나? 귀가 아니라? 대체 슬라임의 신체 구조는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가 없네.

“이 슬라임은 아직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낯설고 모르는 게 많은데, 말이 통하는 상대는 스기엔뿐이잖아. 스기엔이 그렇게 거리를 두는 것보다 빨리 친해지고 싶어 할 거라고 나는 생각해.”

“그, 그렇습니까?”

스기엔은 아주 조심스럽게 하늘색 슬라임에게 내 말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피이!”

그리고 하늘색 슬라임은 힘차게 대답했다. 내가 모르는 말로.

“뭐래?”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대.”

슬쩍 얼굴을 붉히며 스기엔이 대답했다.

“그럼…….”

뭔가 말을 하려고 하던 스기엔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왜? 또 뭐가 문제인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고개를 낮춰 스기엔에게 물어보자, 아주 작게 속삭이듯 스기엔이 말했다.

이성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아주 전형적인 모태 솔로의 고민이었다.

“우선 이름이…… 뭔지 모르는구나. 그럼 몇 살…… 이랄게 없구나. 그럼 집이 어디…… 집이 없구나. 음…….”

그리고 한가지 내가 간과한 점은, 나도 테오도르를 만나기 전엔 모태 솔로였다는 것이었다.

“흐음…….”

“음…….”

“피이?”

스기엔과 내가 이 슬라임과 어떻게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하는지 고민하자, 하늘색 슬라임은 의아하다는 듯이 우리 둘을 쳐다보았다.

“피피!”

그러다가 갑자기 하늘색 슬라임이 폴짝 뛰어오르더니, 스기엔의 옆에 찰싹 붙였다.

“아! 그게 내 이름이 맞긴 하는데, 이건 너무 가까운 거 같은데…….”

“피이?”

“아니! 싫은 건 아니고, 아니, 굳이 따지자면 좋긴 한데…….”

“피이!”

“무, 물론 그렇지.”

뭔가, 해석되지 않는 대화가 오갔다. 어쨌든 둘의 사이가 좋아 보이니까 된 거 같긴 한데…….

“피이!”

“고마워. 너도 예뻐.”

“피이? 피피!”

“뭐? 아니야! 진짜 맹세코 세상에서 내가 본 슬라임 중에서 네가 제일 예뻐!”

문제는 너무 사이가 좋은 나머지, 내가 방해꾼이 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둘이 연애하는데 내가 끼어든 것 같…….

“저기, 레나티스?”

내 눈치를 살짝 보며 스기엔이 나를 불렀다. 내 눈치를 보다니, 흔치 않은 경우였다.

“응?”

“우리 둘만의 사적인 대화를 좀 나누고 싶은데.”

내가 방해꾼이 된 기분이 아니라, 그냥 방해꾼이었구나.

“그, 그래. 내가 자리를 비켜줄게. 좋은 대화 나누길 바라.”

어쩔 수 없이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하늘색 슬라임이 좀 말려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응, 그래. 쳐다도 안 보네.

“아니, 이 밤에 나더러 어딜 가라고.”

어쩔 수 없이 방에서 나오긴 했지만, 낯선 마을의 여관 복도에서 내가 갈 곳은 없었다.

“아!”

아니다. 한군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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