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63
“돌인가?”
테오도르가 자신의 망토 아래 불룩한 그것을 보며 말했다.
“이런 커다란 돌은 없었어요. 혹시나 해서 다칠만한 것은 제가 다 치워버렸는걸요.”
내 말에 테오도르는 퍽 감동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헤헷.
당연하지. 혹시나 넘어지거나, 휘청거리거나 해서 테오도르가 다치면 안 되니까!
“말만 하지 말고, 치워보면 되잖아.”
우리 중에서 제일 성격이 급한 것은 스기엔이었던 모양이다. 나와 테오도르가 서로 눈을 맞추고 있는 사이, 스기엔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네가 내 망토를 치워보면 되잖아.”
“…….”
테오도르의 말에 스기엔은 바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분명했다.
‘무섭잖아! 이런 건 인간인 네가 해야지!’
본 모습은 드래곤인 것이 밝혀졌지만, 스기엔은 여전히 목소리만 큰 나의 작은 슬라임 친구였다.
“좋아. 내가 치워볼게.”
크게 숨을 한번 들이켜 가슴 속에 용기를 채운 다음, 나는 테오도르의 망토 한쪽을 손으로 잡았다.
“아니. 내가 하지.”
내가 막 망토를 들치려는 순간, 테오도르가 내 손을 잡았다.
“아뇨.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테오도르 님은 아직 무리하시면 안 돼요.”
“지금은 괜찮아.”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아니야. 혹시 모르니 내가 하겠어.”
“작작 좀 해라! 진짜 이놈의 지긋지긋한 인간들…….”
테오도르와 내가 옥신각신하고 있자, 옆에서 스기엔이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불만이면 네가 하면 되잖아.”
그 말과 한숨을 들은 테오도르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감히 위대하신 마족님께 고개를 조아리지는 못할망정 어디서 명령질이야?”
“하찮은 인간의 망토 하나도 들추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얼어 죽을 위대한 마족 타령이지?”
“뭐? 얼어 죽을? 이 인간이 어디 한번 혼쭐이 나야 정신 차리지?”
할 수 있다며 격려를 해주던 훈훈한 동료애와 그것에 감동해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내던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스기엔과 테오도르는 또다시 다투기 시작했다.
“어휴! 둘이 또 왜 그래요? 어떻게 보면 먼 친척 같은 사이인데, 좀 친하게 지내요!”
“친척은 누가!”
먼저 버럭 소리를 친 것은 스기엔이었다. 테오도르는 상대가 나라서 참을 뿐이지, 말 없이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험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니, 둘 다 어떻게 보면 엔기스의 후손이잖아. 그러니깐 넓은 의미로 보면 먼 친척이나 다름없는…….”
“카악! 말도 안 돼!”
아! 방금 스기엔이 내지른 소리는 약간 드래곤의 포효 같았다. 역시 그 피가 흐르는 게…….
“피이!”
“으응?”
마치 스기엔의 포효에 반응이라도 하듯, 테오도르의 망토 아래 둥그런 물체에서 아까보다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마치 작은 새가 제 딴에는 성질을 부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풀쩍 솟아오르며, 망토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어머?”
“응?”
“으잉?”
찰나의 순간, 그 안에 보였던 무언가를 보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머 소리를 냈고, 테오도르는 자신이 뭔가 잘못 본 것이라는 듯이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그리고 가장 큰 반응을 보인 것은 스기엔이었다.
스기엔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이 제 눈을 의심하듯이 큰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더 자세히 보려는 듯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피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하늘색…… 슬라임?”
“피이!”
나의 중얼거림이 맞는다는 듯이 슬라임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원래 있던 분홍색 슬라임 말고, 오늘 처음 본 하늘색 슬라임이.
“내 안에서…… 나온 건가? 예전에 엔기스에게서 드라고니아와 스기엔으로 분리가 되었듯이, 카르오의 후손에게 이어지던 남아 있던 마력이 이 슬라임이 되어서…….”
테오도르는 자기가 말을 하면서도 차마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갑자기 생겨난 슬라임의 존재를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세상에…….”
스기엔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더니, 앞으로 작게 튀어 나갔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자신 외에는 자신과 같은 종족을 보는 것이 처음일 테니…….
“이렇게 예쁜 슬라임이 존재하다니?”
……응?
“이런 완벽한 미모의 슬라임은 처음이야!”
그런 이유였어? 아니, 그것보다도 너 외의 슬라임 자체가 처음이지 않아, 스기엔? 너보다 예쁘면, 무조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슬라임 아니야?
아니, 잠깐! 너랑 똑같이 생겼는데 슬라임이라고 말하는 건, 네 정체성이 슬라임이라는 것을 인정한 거야?
“레이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당신의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피이?”
레이디? 여자야?
느끼한 스기엔의 질문에 그 하늘색 슬라임은 발랄하게 뜻 모를 대답을 했고,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스, 스기엔?”
흐뭇한 표정으로 하늘색 슬라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스기엔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왜?”
스기엔은 여전히 그 하늘색 슬라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채, 건성으로 내게 대답했다.
“그 슬라임이 여자인 건 어떻게 알아?”
솔직한 내 질문에 옆에 있던 테오도르가 은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 봐도 암컷이잖아! 이렇게 영롱하고 아름다운 수컷이 존재할 리 있겠어?”
뭘 딱 봐도 안다는 거야? 너랑 색깔만 다르고 똑같이 생겼는데! 무슨 쌍둥이끼리 서로 잘생겼다고 올려치기 하는 소리야?
“그래서 이름은 뭐래?”
“이름이 뭐냐는데?”
“그래. 이름이 뭐냐고.”
“이름이 뭐냐고 말했다고.”
“그래. 내가 말했잖아. 이름이 뭐냐고!”
“이쪽이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니깐!”
“그래! 이름이 뭐냐고!”
이름은 알려주지 않고, 계속 내가 했던 질문만 반복하는 스기엔에게 난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름이라는 단어가 뭔지 모르는 모양이군.”
아……? 그런 거야?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테오도르가 끼어들자, 그제야 스기엔의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말이 잘 통하고 있는 건 맞아? 쟤는 그냥 피이, 피이밖에 못하는 것 같은데.”
“당연하지! 저렇게 곱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는데 어떻게 못 알아들어?”
“피이~.”
아마도 저 하늘색 슬라임은 우리 말을 하지는 못해도 알아는 듣는 모양이었다. 스기엔의 말에 볼로 추정되는 곳이 살짝 붉어지는 것을 보면.
그리고 스기엔은 귀여워죽겠다는 표정으로 하늘색 슬라임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목소리나 생김새가 귀엽긴 하지만 저렇게 찬양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그냥 평범하게 귀여운 슬라임인 것 같은데?
나는 내 의견에 공감해줄 평범한 인간의 시점을 가진 테오도르를 살며시 쳐다보았다.
테오도르는 아예 ‘무슨 저런 주접 싸는 소리를 하고 있어?’라는 표정으로 스기엔을 쳐다보고 있었다.
휴……. 다행이야. 내 눈은 정상이었어.
“이름 모를 신비로운 여인이라니……. 너무 환상적이야.”
“피이!”
“아, 아닙니다. 저는 당신에 비하면 그저 평범하고 비루합니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작작 해라.”
테오도르가 스기엔의 말을 뚝 끊어냈다. 저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소리인데?
“인스트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이제 돌아가는 게 좋겠어. 곧 해가 질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러고 보니 인스트를 잊고 있었다. 우리가 말을 맡기고 온 지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슬라임도 같이 가야 하나?”
테오도르가 하늘색 슬라임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 슬라임을 보면 기분이 이상한 듯했다.
자기 몸에서 저런 게 나왔다고 생각하면 당연하려나?
“당연하지! 이 곱고 여린 레이디를 이 산속에 버려두고 갈 생각이었어?”
“튼튼하고 멋진 다른 슬라임이 지켜준다면, 이 산속에서 알콩달콩 둘이서 사는 것도 괜찮은 생각일 거 같은데?”
“물론, 튼튼하고 멋진 내가 가냘픈 레이디를 지켜줄 수는 있지만! 이 척박하고 험한 산에서 생활하실 분이 아니시다!”
“호오~. 나는 슬라임을 이야기했는데, 그게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걸 보니 드디어 네가 슬라임인 것을 인정하는 건가?”
“…….”
“내 생각엔 이 하늘색 생명체는 레나티스에게 들은 슬라임이라는 몬스터가 확실한 것 같은데 말이야.”
“…….”
“스기엔 넌 이 아름다운 레이디와 같은 종족인 거야, 아니야?”
“나, 나는!”
“아무래도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종족 번식도 하고…….”
“무례하다! 레이디 앞에서 그런 망발이라니!”
“레이디를 닮은 아주 예쁜~ 슬라임도 낳으려면, 같은 슬라임이어야 할 것 같은데?”
“!!”
스기엔의 눈에서는 점점 초점이 없어졌고, 테오도르의 얼굴에서는 승리의 미소가 슬며시 피어올랐다.
“그만 놀려요.”
보다 못한 나는 테오도르의 팔뚝을 찰싹 쳤다.
“당연히 같이 가야지. 걱정하지 마, 스기엔.”
나는 안심하라는 듯 스기엔에게 말했고,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스기엔의 눈에서 초점이 돌아왔다.
“그럼,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