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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162화 (162/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62

낯선 문자를 따라서 우리가 치워낸 마법진은 커다란 원의 형태였다.

문자 그 자체에도 무슨 마력이 있는 건지, 조금 흐려지긴 했지만 수백 년 동안 없어지지도, 나무뿌리에 삼켜지지도, 바위가 갈라지지도 않고 있었다.

스기엔이 직접 그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테오도르와 나는 서로 흙투성이의 손을 붙잡고 기다렸다.

스기엔이 중간에 어딘가를 유심히 쳐다볼 때는 긴장이 되어서 서로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다됐어.”

그러다 한 바퀴를 돌고 제자리로 돌아온 스기엔이 마침내 다되었다고 말했을 때,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고개를 휙 돌려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긴장되어 딱딱해진 내 표정과는 달리 테오도르는 여유 가득한 표정으로 미소를 보내주었다. 마치 전혀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

하지만 나는 걱정이 되어 테오도르를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이 손을 놓으면 테오도르가 마법진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스기엔이 그것을 발동시킬 것을 알았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괜찮아. 혹시나 내 광증이 발현되더라도, 내 치료제가 여기 있잖아.”

테오도르는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올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아무런 위협도 없고, 그저 안전하기만 한 무도회에서 춤을 청하는 것처럼 우아하고 부드러운 자태였다.

“레나티스.”

손짓만큼이나, 입술만큼이나, 부드러운 음성으로 테오도르가 나를 불렀다. 그 부름에 고개를 들자 테오도르가 보였다.

며칠 간의 야영으로 엉클어진 머리카락, 제대로 씻지 못해서 거칠어진 피부, 그리고 마법진을 복구하느라 흙과 먼지가 묻은 손까지.

하지만 그 모습은 결코 초췌하거나, 누추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희망으로 빛나는 테오도르의 눈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그가 멋있어 보였다.

“바보 같은 인간들! 지금이야말로 입을 맞출 때라고!”

저쪽에서 버럭 스기엔에 소리를 질렀다. 아까만 해도 왜 인간들은 생식 활동을 못 해서 안달이냐며 잔소리를 하던 스기엔이 말이다.

“그런 짓 하지 말라며?”

“아!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 로맨틱한 타이밍!”

당황스러워서 스기엔 쪽을 쳐다보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못 볼 꼴은 보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꾹 감은 스기엔이 보였다.

“빨리해!”

누가 재촉하는 상황에서 키스를 할 수 있겠냐며, 스기엔에게 타박을 놓으려는 찰나였다.

“……!”

살짝 벌렸던 내 입술에 무언가가 덮어졌다.

보드랍고, 말캉한 것이 입술에서 느껴지고, 간지러운 무언가가 이마와 눈가를 스쳤다. 그리고 크고 단단한 손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테오도르였다.

저절로 스르륵 눈이 감겼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곳에 어디인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따뜻한 품에, 나도 모르게 안온함을 느꼈다.

부딪힌 입술에서 그의 감정이 느껴졌다. 걱정하지 말라고, 괜찮다고, 꼭 무사히 돌아오겠노라고.

한숨과도 같은 숨결로 나도 대답했다. 함께 행복해지자고.

마주쳤던 입술이 천천히 떼어지는 순간, 멈춰있던 시간도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테오도르와 나는 그저 웃었다. 마법 같은 일이었다. 그저 키스 한 번으로 우리는 두려움을 잊어버렸다.

“시작할까?”

높은 바위 위로 단번에 풀쩍 뛰어오르며, 스기엔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테오도르의 손을 놓았다. 그래도 무섭지 않았다.

테오도르도 마찬가지인 듯, 내 손을 놓았다. 뒤를 돌아 마법진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에는 망설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 다시 뒤를 돈 테오도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웃었다. 나 역시 그에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손을 잡을 수는 없었지만, 테오도르와 나는 함께였다.

“গ ঌ ছ  ঋ এ ঐ আ ঢ…….”

스기엔이 알 수 없는 문자를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추어 마법진이 희미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ছ ঝ দ ঌ , ঝ দ ছ আ ঝ !”

조용히 읊조리던 스기엔이 크게 소리친 순간, 마법진은 수백 년간 참았던 빛을 발하기라도 하듯 환한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테오도르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크흑!”

제법 먼 거리였지만, 테오도르의 신음이 내 귀에는 들렸다. 마치 심장이 아프기라도 하듯, 테오도르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테오도르!”

“안돼, 레나티스!”

내가 테오도르의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뛰어나간 순간, 스기엔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나를 제지했다.

스기엔의 그런 목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라 급하게 발을 멈췄다.

“지금 네가 저 안으로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테오도르!”

스기엔의 말에 나는 더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저 발만 동동 구르며 테오도르의 이름만 불렀다.

환한 빛 속에 둘러싸여서, 고통스러워하는 테오도르의 이름만을.

어쩌면, 엔기스가 마지막 순간에 도망가려던 이유가 저것이었을 수도 있었다.

고통스러워서, 이런 고통을 참으면서까지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 혹은 인간의 육체라는 것은 이렇게 괴로운 것인지를 처음으로 느끼면서 자신의 선택에 후회했을 수도 있었다.

“테오도르! 테오도르!”

감히 드래곤도 견뎌내지 못한 고통의 크기를 알 리 없는 나는 그저 안타까워서 테오도르의 이름만을 부르고, 또 부를 뿐이었다.

“아!”

환하게 빛나던 마법진의 문자에서 어느덧 서서히 빛이 꺼져가고 있었다. 이제는 괜찮을까 싶어서 나는 재빨리 스기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스기엔 역시 확신할 수 없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인상을 찌푸린 채 테오도르의 동태만을 살필 뿐이었다.

“……!”

이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숨을 몰아쉬고 있던 테오도르가 더 견디지 못한 채 바닥으로 온몸을 내던져버린 것은 마법진의 빛이 완전히 꺼진 것과 거의 동시였다.

“테오도르!”

이제는 더 견딜 수 없었다. 스기엔의 허락이 아직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마법진의 빛이 사라졌으니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나는 테오도르를 향해서 내달렸다.

“테오도르?”

옆으로 쓰러진 테오도르의 몸을 살짝 들어 올려, 제일 먼저 테오도르의 얼굴을 살폈다.

조금 창백하긴 했지만, 손을 코에 가져다 대자 따뜻하고 약한 숨이 느껴졌다.

“하아…….”

제대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저절로 한숨이 쏟아져나왔다.

아직 작게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테오도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레나티스?”

눈을 뜨고, 몇 번 깜박인 다음, 테오도르는 내 이름을 불렀다. 그 호명에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누구인지 테오도르는 똑바로 기억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보기에 아주 아파 보이셨는데요.”

“맞아. 그런 고통은 처음이었어.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은 느낌이더군.”

테오도르는 순순히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았다. 떠올리기만 해도 싫은지 살짝 인상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그런 테오도르를 보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내가 다정하게 그의 뺨을 쓸어주자, 테오도르의 찌푸려졌던 인상이 풀어졌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마저 감돌았다.

“기분은 어때요? 뭔가 달라진 것 같아요?”

“그게 제일 문제인 것 같은데…… 뭐가 달라진 건지 모르겠어. 별 느낌이 없거든.”

테오도르는 자신의 손을 들어 눈앞에서 앞뒤를 뒤집어 보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별로 달라진 점은 없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고, 손은 여전히 컸으며, 손가락은 이전과 똑같이 가지런했다. 피부색도, 몸도, 똑같았다.

“아무 느낌도 없어?”

어느새 다가온 스기엔이 물었지만, 테오도르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너무 오래돼서 마법진의 위력이 없어진 건가? 아니면, 엔기스의 마력으로 움직이는 것이라서 잘되지 않았을지도…….”

말끝을 흐리는 스기엔의 안색은 어두웠다. 마치 테오도르에게 아무 변화도 없는 것이 자기 탓인 것처럼.

“효과가 없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우리는 할 만큼 한 거잖아.”

나는 테오도르의 손을 꼭 잡으며, 스기엔에게 말했다.

“어쩌면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발루텍스 산이나 이 마법진에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고. 적어도 이 저주의 근원이 뭔지는 알았으니까, 한 발자국 나아간 것이기는…….”

“피이~?”

스기엔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 우리가 한 것이 헛수고는 아니었다고 말하는 중에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는 스기엔이 낸 소리인가 싶어서 말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지만, 왜 말을 하다가 마냐는 듯한 표정을 봐선 스기엔은 아니었다.

그럼 방금 그런 귀여운 소리를 낸 게 테오도르라고?

“……왜?”

나는 고개를 돌려 테오도르를 쳐다봤지만, 그 역시 왜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냐는 듯이 날 쳐다볼 뿐이었다.

“아, 아녜요. 제가 뭔가 잘 못 들은 것…….”

“피이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아기들이 가지고 노는 삑삑이 소리 같기도 하고, 어린 새가 지저귀는 것 같기도 한, 작은 휘파람 같은 소리가 분명히 내 귀에 들렸다.

거기다가 이번에는 나만 그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 소리가 들린 순간 스기엔은 눈을 깜박였고, 테오도르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뭐…… 죠?”

“분명 이쪽에서 소리가 난 것 같은데?”

나와 테오도르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스기엔은 숫제 폴짝 뛰어올라서 그쪽으로 갔다.

테오도르의 망토 아래에 무언가 볼록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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