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61
테오도르의 표정은 더없이 단호했고, 또 진지했다. 평소처럼 스기엔을 놀리거나, 이죽거리는 모습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레나티스의 말에 따르면, 너는 이 세계에서 유일한 몬스터라고 하더군. 괴물이라는 뜻이긴 하지만, 어쨌든 유일한 존재잖아.”
테오도르의 말에 스기엔도 어느새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위대한 마족이야. 넌 분명히 방법을 알 거야.”
“모른다고 말했잖아.”
“아니. 넌 알아.”
테오도르의 말에 스기엔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살짝 허리를 구부려 스기엔과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긍지를 가져. 네 안에는 위대한 마족의 피가 흐르고 있어. 비록 몸은 공같이 둥그렇고, 젤리처럼 탱글탱글하지만, 네 실체는 엔기스와 똑같은 드래곤이야.”
“…….”
“드라고니아가 불완전한 반쪽이지만 악마와 같은 지략을 가졌다면, 너도 똑같이 그럴 수 있어. 그가 카르오 가문을 세우고, 제국의 개국공신이 되었다면, 그의 반쪽인 너 역시도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가 위대한 마족이라고 말한 건, 너야. 지금이야말로 하찮은 인간에게 위대한 마족의 지혜를 빌려줘.”
“…….”
테오도르의 말을 들은 스기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뭔가 바닥을 보며 골똘히 생각하던 스기엔은 불쑥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내가 답을 알고 있을 거라는 듯이.
“아휴! 당연히 우리 스기엔은 할 수 있지!”
스기엔과 눈이 마주친 나는 거의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스기엔은 지금 이 세계에서 유일한 마족이잖아. 완전 유니크하지. 거기다가 정말 귀엽고, 최고 멋지고, 세상에서 제일 훌륭해! 전에 나한테 조언을 해준 적도 있잖아. 그때도 엄청나게 똑똑하고 지적으로 보였어. 거기다가 전에 날 도와준 적도 있었잖아? 지붕이 엄청 높아서 무서웠을 텐데도, 무척 용감했지. 그뿐이야? 내 걱정을 해서 나무 열매를 따다 준 다정함도 있지, 툴툴거려도 내 부탁은 다 들어주는 착한 마음을 가졌지, 진짜 세상에서 제일 완벽해!”
그리고 숨도 쉬지 않고 스기엔의 칭찬을 줄줄 늘어놓았다. 솔직히, 스기엔과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던 게 맞았다.
“스기엔이 최고야!”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던 스기엔이 한참 만에 되물었다.
“만약에 내가 그럴듯한 해답을 찾지 못하면? 내가 말한 방법이 실패하면? 그래도 내가 최고야?”
“당연하지!”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세계에서 유일한 마족이니까?”
“아니.”
이번에는 고개를 흔들었다.
“스기엔은 내 친구이니까. 나는 지금 그냥 내 친구를 응원하는 중이야.”
카르오 저택에서 처음 사귄 내 친구를 향해서 나는 씨익 웃어주었다.
그리고 내 미소를 본 스기엔이 갑자기 입술을 꾹 다물더니, 파르르 떨었다.
처음 본 표정이라 자신은 없지만, 슬라임의 안면구조가 사람이랑 동일히다면, 그건 분명 감동으로 이를 앙다물고 눈물을 참는 표정이었었다.
“카르오의 저주를 풀 방법이 있어.”
몸체를 한번 꿀렁이고 나서, 그러니까 아마도 나오려는 눈물을 꿀꺽 삼키고 나서, 스기엔에 말했다.
“정말?”
반가운 소식에 나는 반색을 하며 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지만, 테오도르도 눈을 조금 크게 뜨며 스기엔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순전히 내 생각일 뿐이야.”
스기엔이 덧붙이긴 했지만, 나와 테오도르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아까 말했듯, 엔기스는 마지막 순간에 흔들렸어. 아직 온전히 분리된 상황이 아니었는데, 마법진을 이탈하는 바람에 불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졌어. 그래서 나는 마력이 부족해서 이렇게 되었고, 드라고니아는 광증을 지니게 된 거지.”
“응, 응. 그래서?”
“그러니까 내 생각에 방법은…….”
스기엔은 심각한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드라고니아의 후손이자, 그의 피를 이어받았고, 현재 광증을 지닌 인간을.
“카르오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엔기스의 미련을 마저 없애 버려야지.”
.
.
.
“읏차!”
내 몸통만 한 커다란 돌을 굴리자, 그 아래에 묻혀있던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드러났다.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다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모습을 드러낸 문자와 비슷한 것들이 꼬리처럼 내 뒤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분주하게 낙엽을 치워내고, 돌에 낀 이끼를 긁어내고 있는 스기엔과 테오도르가 보였다.
여기에 있는 모든 세월의 흔적을 걷어내고, 엔기스가 사용했던 마법진을 찾아내어, 테오도르에게서 광증의 원흉인 마력을 분리해내는 것이 스기엔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은 거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기, 테오도르 님.”
나는 칼로 이끼를 긁어내고 있는 테오도르의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응. 왜?”
테오도르를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을까요?”
“…….”
내 질문에 테오도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끼를 긁어내던 칼을 내려놓고 내 손을 잡을 따름이었다.
“스기엔이 그랬잖아요. 몇백 년이 지난 마법진이라 문자가 훼손되었을 수도 있고, 엔기스가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낸 마법이라서 테오도르 님에게도 잘 들을지 알 수 없고, 마법진을 구동하기에는 스기엔의 마력이 부족할 수도 있다고요.”
나는 스기엔이 말했던 부작용을 다시 읊었다.
낙엽을 치우고, 흙을 걷어내고, 굴러들어온 돌들을 치우면서 내내 내 가슴에 걸려 있었던 말이기에 나는 긴말을 전혀 더듬지 않고 단숨에 말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하지만 마지막 말만은 목구멍에 탁 걸려서 말할 수 없었다.
“광증이 폭주할 수도 있겠지.”
내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테오도르가 대신해서 말했다.
그것은 스기엔이 말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마법진이 테오도르를 자극해 오히려 광증이 폭주하는 것.
그의 형이었던 에멘스처럼.
나는 그것이 테오도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악몽이 그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너무 위험한 것 같아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테오도르는 그저 가볍게 웃을 뿐이었다. 마치 그게 별것 아닌 문제인 듯.
“어쩌면 그냥 시도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요. 적어도, 지금은 한두 달에 한 번씩 광증이 발현될 뿐이고, 제가 있으니까 광증을 가라앉힐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평생 이렇게 살아야겠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예요. 스기엔의 말대로 나이가 들어서 마력이 인간의 육체에 적응하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동안 나는 너를 안고 싶을 때 안을 수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나를 피하는 것을 감수해야겠지.”
“그거야…….”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소원은 영영 이루어지지 않겠지.”
테오도르가 말하는 사랑하는 여자가 누군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원이 무엇인지도 말았다.
“절 위해서 이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전…… 싫어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테오도르 님을 잃느니, 차라리 영원히 제 소망을 이루지 못하는 쪽을 택하겠어요.”
“레나티스.”
테오도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고, 그만큼이나 부드러운 손길로 내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게 왜 너만의 소원이라고 생각해?”
차분한 목소리로 테오도르는 물었다. 아니, 이건 묻는 것이 아니었다. 질문을 가장한 고백이었다.
“너와 결혼하고 싶어, 레나티스. 내 한평생을 너와 함께하고 싶어. 너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 물론, 내가 낳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낳아야겠지만.”
마지막 말을 하며 테오도르는 웃었다. 흔치 않은 그의 농담에 나는 웃을 법도 했지만, 쉽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벌써 궁금해. 그 아이가 너만큼이나 복스럽게 먹을지, 너처럼 사랑스럽게 웃을지, 그리고 그 아이가 나를 사랑해줄지. 물론, 난 널 닮은 아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겠지만.”
대신, 나온 것은 눈물이었다. 뭔지 모를 벅찬 감정이 가슴속에서부터 치밀어올라 목구멍을 지나고 눈물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 마법진 위에 서는 것보다 이게 더 무서워. 네가 과연 내 청혼을 받아들여 줄지가.”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 마음은 이미 알면서.”
“마음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아니까.”
테오도르는 웃으며 슬쩍 눈을 자신의 아래로 향했다. 그곳에는 마법진의 일부인 문자가 있었다. 낡은, 희미해진, 불확실한 형태로.
“널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행복을 말하는 테오도르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들렸다. 마치 흔들렸던 엔기스의 마음처럼.
“그리고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고개를 들어 테오도르가 나를 바라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갑자기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마치 처음으로 그것을 바라본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래요. 우리 함께 행복해져요.”
툭. 가슴속에 있던 뜨거운 감정이 눈물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