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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160화 (160/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60

“엔기스는 스스로를 잡아먹기로 했어.”

스기엔의 말을 들은 나는 눈을 깜박였다. 이 질문을 몇 번째 했는지 이제는 지겨울 법도 했지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도대체 자신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한낱 인간인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위대한 마족인 엔기스에게는 한가지 권능이 있었어. 그건 바로 자신이 잡아먹은 생명체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이었지.”

“아까 나에게 제안했던 것처럼 말이야?”

“그래. 맞아. 엔기스는 아이테르에게 너무 매료된 나머지, 자신을 잡아먹어 그와 같은 인간이 되고자 했어.”

“자기가 자기를 잡아먹을 수가 있어? 어떻게?”

아주 잠시 나는 자기 손부터 깨물어 먹는 커다란 용을 상상했다.

그 큰 몸을 다 먹으려면, 아주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거기다가 대체 자기 머리는 어떻게 먹는 거지?

“레나티스, 설마 마족인 엔기스가 입으로 잘근잘근 씹어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나 보다.

“아까 말했듯, 마족인 엔기스는 당연히 마법을 부릴 줄 알았지.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죽이고 다시 태어날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진을 그렸고, 스스로 그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어. 참고로, 그 마법진을 그린 장소가 바로 여기야.”

“뭐? 여기?”

나는 깜짝 놀라서 내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상한 문자나 갑자기 빛나는 기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낙엽과 평범한 돌멩이 그리고 아주 평범한 버섯만이 보였다. 뭐, 평범하지 않은 독버섯일 수도 있지만.

“저기, 내가 인간이라서 여기 있는 마법진을 못 보는 거야?”

“몇백 년 전의 일이잖아. 마법진은 세월의 아래에 묻혀있겠지. 훼손도 좀 되었을 테고.”

스기엔의 말에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저 평범하게 보였던 겨울 숲의 풍경이 갑자기 비범해 보였다.

이 아래에 드래곤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마법진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위에 서 있었다.

“초대 카르오 대공인 드라고니아가 가지고 있던 엄청난 부나 지략은 그가 악룡 엔기스였기 때문이라는 건가?”

테오도르가 진지한 표정으로 스기엔에게 물었다.

“그래. 세간에서는 드라고니아에게 악마 같은 지략을 가진 자라고 했는데, 사실은 그의 본질을 꿰뚫어 본 수식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럼 스기엔도 그때부터 드라고니아를 따라서 수도에 오게 된 거야?”

스기엔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내가 물어보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때는 수도가 아니었어. 드라고니아가 아이테르를 도와서 제국을 건국하기 전에는 그냥 작은 도시였지. 어쨌든 내가 드라고니아를 따라간 것은 맞아.”

“그럼, 스기엔의 나이는…….”

“안 세어봐서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엔기스 때부터 나이를 세어야 할지, 아니면 분리된 이후부터 세야 할지도 모르겠고.”

나는 주름살 하나 없는 탱글탱글한 스기엔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최소한 제국력보다 나이가 많다는 건데…….

이렇게 귀여운데 나이는 아득할 정도로 많다니! 부럽다고 해야 할지,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미묘했다.

“그럼, 말이야. 엔기스가 나뉘어서 드라고니아는 인간이 되고, 스기엔은…… 음…… 어…….”

나는 무슨 단어를 써야 할지 고민했다.

스기엔은 자신이 슬라임이라는 것을 바득바득 부정했고, 그렇다고 지금의 모습은 드래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외견이 달랐다.

“나는 엔기스의 순수 마족 혈통을 물려받은 셈이지.”

탱탱한 젤리 같은 몸체를 뽐내듯이 앞으로 쑤욱 내밀며 스기엔이 말했다.

나도 마족이 가장 적당한 호칭이다 싶었다. 슬라임이든 드래곤이든 크게 보자면 몬스터고, 어쨌든 마족의 한 종류이니까.

“그래. 엄청 위대하고, 대단히 순수 혈통 같고, 어마어마하게 근엄해 보이네.”

얼떨결에 나온, 거의 스기엔이 뽐내면 반사적으로 나오는 나의 칭찬에 나의 이번 발언만은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테오도르가 날 쳐다보았다.

그는 스기엔에게 시달려보지 않아서 모를 거다. 내가 왜 이런 발언을 자동반사적으로 하는지.

“됐어. 내 외모가 그렇게 마족적이지 않다는 것은 사실 나도 알아.”

뻐기듯이 부풀었던 스기엔의 몸체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푸시식 내려앉았다. 사람으로 치자면 어깨가 축 처진 모습이었다.

“아, 아니야! 우리 스기엔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마족이지!”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스기엔이 이 세계에 유일한 마족이었으까 가장 멋진 마족도, 가장 귀여운 마족도 전부 스기엔이었다.

“내가 이런 모습으로 남아 있는 건, 다 엔기스때문이야.”

“그가 인간이 되고자 했으니까?”

“그게 아니야.”

스기엔이 나의 공감을 싹둑 잘라먹었다.

“엔기스는 마지막 순간에 망설였어.”

순간, 스기엔의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튀었다. 귀여운 외모와 그렇지 못한 눈빛에 보고 있던 내가 움찔할 정도였다.

평소에도 퉁명스럽게 말하고, 툴툴거리는 스기엔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해서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인간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마법진까지 그려 놓고, 그 안에 서서 막상 빛나는 마법진을 보자, 그는 갑자기 두려워진 거야. 불꽃같이 타오르는 인간을 보며 그렇게 되고 싶어 했지만, 그 불꽃이 다 타버리고 나서 어떻게 될지 그제야 두려워졌어.”

스기엔은 보이지 않는 마법진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위에 선 엔기스도 보이는 듯,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흔들렸어. 온전한 자신을 잃기 전에 마법진에서 뛰어나오려 했지.”

“하지만 드라고니아와 스기엔으로 나뉘었으니, 마법은 잘 이루어진 것 아니야?”

일단 결과만 보자면 엔기스가 원하는 대로 된 것이 아닌가? 비록 엔기스가 스기엔과는 의논하지 않았고, 스기엔은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내가 말했잖아. 드라고니아는 나의 반쪽이라고. 마지막에 도망치려 했기에 마법은 온전히 완성되지 못했어. 드라고니아는 불완전한 반쪽짜리 인간이 되었고, 나 역시 반쪽짜리 마족이 되었기에 우리는 영원한 서로의 반쪽이 된 거야.”

스기엔의 말에 테오도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의 실마리를 잡았다는 듯이.

“불완전하다는 말은 드라고니아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뜻인가?”

드라고니아의 후손이 자신의 조상을 의심하는 발언을 던졌다.

“아! 그럼 혹시! 카르오 가문의 저주가 그래서 이어지게 된 거야? 그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서?”

그가 던진 말을 덥석 받은 것은 나였다. 테오도르가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발루텍스 산을 오른 이유였다.

테오도르의, 카르오의 저주를 밝혀내는 것.

“그래. 맞아. 드라고니아의 안에 남은 마족의 기운은 잠잠히 있지 못하고 가끔 발현되곤 했지.”

“그게 바로 광증이구나!”

드디어 저주의 근원을 알아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테오도르가 광증 상태 일 때의 날카로운 송곳니와 손톱은 내가 보았던 악룡 엔기스와 어느 정도 닮은 점이 있었다.

그것의 미니미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강렬했던 붉은 안광까지 더해지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드라고니아는 원래 자신이 마족이었으니 그 광증을 어느 정도 컨트롤했지만, 그저 인간인 그의 자손들은 전혀 통제하지 못하더라고. 어릴 적 마족의 기운이 강하지 않을 때나, 나이가 들어서 그 기운이 온전히 인간의 육체에 적응하면 괜찮아지는 모양이었지만.”

스기엔의 말에 카르오의 저주가 청소년기에 발현되어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잠잠해지는 이유가 설명되었다.

“그럼, 방법은 없는 거야?”

하지만 중요한 건, 저주의 원인이 아니었다. 결과도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풀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마법이 있으면, 되돌릴 수 있는 마법도 있지 않아? 그게 아니면 드라고니아는 자기 광증을 컨트롤했다며. 그럼 그 비법 같은 게 있지 않을까?”

“글쎄.”

이제까지 자세히 우리에게 설명해주었던 스기엔이 갑자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왜! 이게 제일 중요한데!

“잘 생각해봐. 엔기스는 당연히 이제 없고, 드라고니아도 죽고 없어. 그 일에 대해서 제일 자세히 아는 사람은 스기엔이야.”

“말했잖아. 나는 그냥 반쪽짜리 마족이라고. 능력이 있으면 이따위 우스꽝스러운 겉모습부터 어떻게 했겠지. 난…… 지금의 난…….”

스기엔은 우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스기엔…….”

카르오 가문의 저주를 풀기에 급급하고, 먼 과거의 신비한 이야기를 그저 홀린 듯이 듣고 있던 나는 그제야 스기엔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누구나 두려워하고, 거의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드래곤이 어느 날 갑자기 바닥에서 통통 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게 되어버린다면, 그야말로 자괴감이 들 것 같았다.

나는 스기엔이 이제까지 꼭 자신을 위대한 마족이라고 스스로 말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스기엔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심이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그럴 리가.”

내가 풀죽은 스기엔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불쑥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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