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59
황급히 얼굴을 돌리자, 매우 아니꼬운 표정을 한 스기엔이 이끼가 낀 바위 위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흐리멍덩하던 눈동자는 오간 데 없이 매우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스기엔!”
반가운 마음에 스기엔의 이름을 불렀다.
“쳇!”
작게 혀 차는 소리가 테오도르의 입에서 들렸지만, 나는 못 들은 척을 했다.
솔직히 나도 기회가 조금 아깝기는 했지만,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다.
“도대체가 너희는 왜 안에서고 밖에서고 간에, 입술을 맞붙이지 못해서 안달이 난 거야?”
“아, 안달이 나지는 않았어.”
“그럼 방금 그건 뭔데? 둘이 입술을 붙이려고 했어, 안 했어?”
“하, 하긴 했는데…….”
“으으! 다른 생명체의 눈은 신경 안 써? 인간들은 어쩌면 그렇게 이기적이야? 도대체가 말이야, 자기밖에 몰라요!”
스기엔의 말이 맞기는 해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잔소리를 들었다.
“아니, 어떻게! 내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생식 활동을 할 수가 있어?”
“생식 활동이라니! 그 정도로 진행하지는 않았어! 그냥 가볍게 뽀뽀 정도만 할 생각이었다고!”
“정말? 확실해?”
“당연하지! 그냥 서로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안심해서 나오는 안부 인사 같은 거였다고!”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스기엔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진짜로 억울했다.
원작은 19금이었지만, 난 아니라고! 내가 야외에서 막! 그런 짓을 하는! 누가 볼 수도 있는데! 막 밖에서 어! 그런 걸 막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가려줄 지붕이 있고, 벽이 있어야지!
“그렇게 꼴 보기 싫으면, 눈을 감았으면 됐잖아.”
옆에 서 있던 테오도르가 툭, 말을 던졌다. 그러자 조금 진정된 것 같던 스기엔의 눈에 다시 불이 번뜩였다.
거의 안광이 흐를 것 같은 그 기세에서 살짝 아까 엔기스가 보이는 듯했다.
“눈 감으면, 그 행위가 없어져? 소리는 어쩔 건데?”
“소리는 무슨 소리가 난다고 그래?”
“안 난다고? 아무 소리도 안 난다고? 확실해? 어? 그리고 그 이상얄략꾸리딱한 그 공기는 어쩔 건데? 아! 전체적으로 공기가 다르다고, 공기가! 대체 인간들은 왜 그렇게 생식 활동에 집착하는 거냐고!”
스기엔은 돌 위에서 펄쩍펄쩍 뛰며 본인의 기분 나쁨을 어필했다.
테오도르는 잔뜩 불만 어린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그냥 이 무의미한 언쟁만 길어질 것 같았다.
‘테오도르 님.’
나는 테오도르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제발 조금만 참아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테오도르의 벌어졌던 입이 다시 꾹 다물어졌다.
얼굴엔 불만이 잔뜩 이었지만, 테오도르는 조용히 내 옆에 섰다. 마치 선생님에게 혼나는 두 명의 학생처럼.
그 이후로도 스기엔의 인류 비판은 이어졌고, 나와 테오도르는 인류를 대표해서 잠시 그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저기, 그래서 스기엔!”
잠시 스기엔이 숨을 고를 때, 나는 재빨리 치고 들어갔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영혼 없는 눈으로 오른쪽 나무의 옹이구멍을 응시하고 있던 테오도르가 내 질문을 듣고 재빨리 영혼을 회수해서 스기엔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에 나랑 이야기했던 엔기스가 너인 거지? 그러니까, 네가 엔기스인 거야?”
엔기스가 점점 줄어들어 스기엔이 된 것을 똑똑히 보긴 했지만, 조심스럽게 스기엔에게 물었다.
“그래. 맞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쉴 새 없이 잔소리를 날렸던 가벼운 입이 진중한 목소리로 무거운 진실을 내뱉었다.
아주 조금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스기엔이 엔기스일지도 모른다고. 적어도 둘이 관련이 있긴 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진짜로 작고 귀여운 내 친구 슬라임이 커다랗고 사악한 드래곤이라는 사실에 나는 놀라서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정확하게는 나의 반쪽이 남겨둔 기억으로 만들어낸 과거의 내 형상과 넌 대화를 한 거야.”
“반쪽?”
그러고 보니, 스기엔이 드라고니아 드 카르오 대공의 초상화를 보고 그런 말을 했었다. 죽어버린 자신의 반쪽이라고.
“드라고니아 드 카르오 대공이 여기에 자기 기억을 남겨두고 갔다는 거야?”
“그래.”
“어떻게?”
궁금했다. 기억이라는 것을 그렇게 쉽게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거였던가?
“마법이지.”
너무나 쉬운 결말이라는 듯이 스기엔이 말했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은 바로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드라고니아 드 카르오가 마법사였다는 거야?”
이 세계가 몬스터와 마물은 없지만, 마법은 있는 세계관이었나? 내가 살면서 마법사를 보거나, 마법을 본 적이 있었나?
나는 잠시 헷갈렸다. 하지만 결론을 내는 것은 아주 짧았다.
전혀 없었다. 마법도, 마법사도, 마법이 걸린 물건을 본 적도, 한 번도 없었다.
작은 시골에서는 앞서 말한 것들이 없을 법도 했지만, 커다란 대도시인 수도에서도, 그중에서도 매우 부유하고 권력을 쥔 귀족 가문인 카르오 대공 가의 저택에서도, 그런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소리야? 마법사라니?”
“방금 스기엔이 그랬잖아. 드라고니아 드 카르오가 마법으로 자신의 기억을 여기 남겨두고 갔다고.”
“그래.”
“마법을 쓰는 사람은…… 마법사 아니야?”
“하찮은 인간 따위가 마법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참으로 빈곤한 지식을 지닌 한심한 인간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스기엔이 나를 바라보았다.
“말했잖아. 드라고니아는 내 반쪽이었다고.”
“그래. 네가 초대 카르오 대공과 각별한 사이였다는 건 알겠는데…….”
“내가 말한 반쪽은 인간들이 보통 말하는 반려나, 친우 같은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스기엔이 내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싹둑 잘랐다. 그 뒤에 말은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내가 말한 드라고니아가 내 반쪽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그가 내 반쪽이라는 뜻이야.”
나는 여전히 스기엔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혹시나 이해했으면 내게 설명을 좀 해주었으면 해서 나의 반쪽,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똑똑한 테오도르도 그다지 스기엔의 말을 이해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미 이 세계의 상식이나 세계관을 뛰어넘고 있었다. 별수 없이 나는 스기엔을 다시 바라보았다.
“나와 드라고니아는 원래 하나였어. 하지만 그야말로 반으로 쪼개진 거야. 우리가 하나였을 때의 이름은 엔기스였어. 그러니까 나는 반쪽짜리 엔기스고 드라고니아도 반쪽짜리 엔기스인 셈이지.”
스기엔의 설명에 겨우 다물어졌던 내 입은 다시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대로 입을 벌린 채 테오도르를 쳐다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꾹 다물어져 있던 테오도르의 입도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놀람이 가득했다.
당연했다. 제삼자로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도 이렇게 놀랐는데, 본인 조상의 일이니, 테오도르는 더 놀랐을 것이다.
자기 조상이 드래곤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설명해줬잖아.”
스기엔은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줘도 모르겠냐는 듯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 거야.”
나는 테오도르를 대신해서 스기엔에게 물었다.
“용이 어떻게 반으로 갈라지고, 반쪽은 사람이 되고, 또 나머지 반쪽은 슬라임이 되는 건데? 그게 가능해?”
“위대한 마족, 악룡 엔기스에게는 불가능이란 없어.”
스기엔은 딱 잘라서 대답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에는 한점의 거짓과 약간의 허풍도 없다는 듯이.
당연했다. 자신이 직접 겪고, 한 일이니까.
“이 이야기의 시작은 엔기스가 악룡이라고 불리던 때부터 시작돼.”
아주 아득히 먼 이야기를 시작하는 음유시인처럼 스기엔은 입을 열었다.
“하찮은 인간에 비하면, 엔기스는 너무나 강하고 완벽한 피조물이었어. 압도적인 힘으로 인간 위에서 군림했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요구했고, 공물을 바치지 못하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었지.”
스기엔이 한 이야기는 나도 책에서 본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발루텍스 산에 있는 드래곤 레어에는 값비싼 보물이 넘쳐났고, 반대로 인간은 그 근처를 얼씬도 못 했다는 이야기를.
“그러다 문득, 그는 궁금해졌어. 풀잎같이 연약한 손으로 어떻게 단단한 광물을 쪼개고, 우둔한 머리로 섬세한 세공을 어떻게 하고, 그 조그만 머리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묘한 화법이었다. 마치 남의 일처럼, 하지만 너무도 잘 아는 것처럼, 스기엔은 말했다.
“위대한 엔기스는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어. 때로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때로는 작은 아이로, 또 어떨 때는 늙은 현자로 엔기스는 인간들 사이로 스며들었어.
퍽 즐겁고, 제법 재밌는 놀이였지. 한 인간을 만나기 전까지는.”
“한 인간?”
“그래. 엔기스는 너희들이 아는 제국의 영웅이자 초대 황제인 아이테르를 만나게 되었어. 터무니없을 정도로 긍정적인 야심가이자,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만은 가슴에 가득 들어찬, 눈부실 만큼 해맑은 미소를 가진 멍청이에게 그는 한없이 빠져들고 말았어.”
내가 본 책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없을 찬사인지 신랄한 비난인지 모를 말들로 스기엔은 초대 황제를 묘사했다.
그리고 목소리에서도 애증이 들끓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테르에게 완전히 빠져버린 엔기스는 더없이 멍청하고 위대한 결심을 하고 말았어.”
스기엔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거기서 말을 멈췄다.
“무슨 결심을 했는데?”
뒷이야기가 궁금했던 나는 그 침묵을 참지 못하고, 스기엔를 채근했다.
스기엔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 시선을 테오도르에게로 옮겼다.
그 모습은 테오도르에게서 자신의 반쪽, 드라고니아를 찾고 있는 것도 같았고,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결심을 한 엔기스에게 책임을 묻는 것 같기도 했다.
테오도르를 바라보며, 스기엔은 입을 열었다.
“엔기스는 스스로를 잡아먹기로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