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58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내 선택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엔기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성급하게 엔기스가 물었다.
“그게 분명 너의 소원일 텐데? 나는 인간의 삶과 욕망을 똑똑히 볼 수 있어.”
“잘못 보신 건 아니에요. 그게 제 소원 맞아요.”
나는 엔기스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의 말이 틀려서 제안을 거절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한때는 엔기스 님이 말씀하신 것을 원했어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죠. 보호본능을 일으킬만한 가녀린 몸과 어여쁜 미모를 가지고 싶었어요. 다정한 부모님과 풍족하고 안락한 삶을 당연히 원했죠.
가끔은 혼자 상상하기도 했어요. 사실은 난 귀족 가의 버려진 사생아고, 귀족인 진짜 아빠가 커다란 마차를 타고 저를 찾으러 올 거라고요.”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나를 매일 때리는 아버지의 친딸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난 귀족 가의 마차에 올랐고, 내가 살던 집을 떠났다.
그건 갑자기 요정이 나타나 내 소원을 이루어 준 것도, 사악한 드레곤의 유혹도 아니었다.
나의 선택이었고, 나의 의지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아뇨. 지금도 원해요. 기왕이면 예뻐지고 싶고, 돈이 많아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예쁜 옷도 사고 싶어요.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제 가정을 꾸리고 싶어요.”
“그런데 왜 내 제안을 거절한 거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들어 엔기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의 검은 비늘은 번쩍거리고 있었고, 눈에서는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하지만 나는 이전처럼 그가 두렵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지금의 내 심정과 내 마음을, 그리고 내 소망을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진정으로 내가 바라는 것을.
“제가 원한 건, ‘온전한 나’의 가정이에요. ‘아무나’와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이 되고 싶은 거고요. 그리고 그 사람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에게 사랑을 주며 키우고 싶어요.”
“‘온전한 나?’”
내가 말하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은 듯, 엔기스의 커다란 머리가 갸우뚱했다.
우습게도 처음에는 그렇게 무서웠던 엔기스가 조금 귀엽게 보였다.
아무래도 저 동작에는 어떤 생물이든 귀엽게 보이게 하는 마성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정한 부모님은 없었지만, 대신 아스텔라 언니가 있었어요.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다정한 언니였어요. 전 부모님의 사랑은 받아보지 못했지만, 언니가 그보다 절 덜 사랑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은 제 힘으로 돈도 벌고 있어요. 그 돈으로 제가 필요한 것을 살 수도 있고, 언니를 도울 수 있었고, 고마운 사람에게 선물을 할 수도 있었죠.
전 가녀리지도 예쁘지도 않지만, 대신 아주 튼튼하고 힘이 세요. 그래서 활을 배울 수 있게 되었죠. 그 활로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도울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저 자신도 도울 수 있었어요.”
이상한 일이었다. 무엇 하나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한 삶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족이 있고, 살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살아가는 지극히 보통의 삶.
하지만 엔기스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는 순간, 내가 너무도 잘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무언가를 이룬 것은 없지만, 그저 평범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만, 바라는 것은 그저 내 가정을 이루겠다는 소소한 미래였지만, 나는 만족스러웠다.
“저는 지금의 제가 좋아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잘하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더 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
나는 웃었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입 밖으로 나의 포부를 말하자 그것이 정말로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 잘 될 거라고?”
“네.”
“하지만 너 자신도 그 남자와는 결혼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 아이마저 낳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면서?”
“그건 그렇죠.”
“그런데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네 소원은 평생 이루지 못할 텐데?”
엔기스의 목소리에는 억지로 부정하지 말라는 듯한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또한, 감히 자신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노여움도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두렵지 않았다. 내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으니까.
“오직 그것만이 저를 살게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한 손을 내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내 말이 진짜라고 맹세하는 것인지, 나의 진심은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것인지는 나도 몰랐다. 그저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결혼하지 못하더라도, 테오도르는 저를 계속 사랑할 거라고 믿어요. 아이를 낳지 못하더라도, 저는 테오도르를 계속 사랑하리라고 믿어요.”
“믿는다고?”
“네. 부족하지만, 완벽하지 않지만, 모두가 선망하는 그런 삶은 아니겠지만, ‘레나티스 그라티아’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저는 믿어요.”
과거의 나라면, 나를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매일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쓸모없는 애라는 말만 들었던 나는 도저히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를 만나면서 나는 변했다.
그는 나에게 강하다고 말했다. 예쁘다고 말했으며,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나를 좋아하게 되어 영광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그 말들이 정말로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전설 속의 악룡 앞에서도 이렇게 또박또박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그것이 너의 선택인 것인가? 훌륭한 타인으로 사는 것보다, 부족한 너 자신으로 사는 것?”
“네. 제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저의 인생은 계속될 테고, 살아있으면 행복한 날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갑자기 친구가 건네주는 달콤한 푸딩처럼.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 받은 노란 리본처럼.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만난 언니의 따뜻한 품처럼.
평범한 ‘레나티스 그라티아’의 인생에는 작지만 소중한, 반짝반짝 빛나는 행복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렇구나.”
한숨 섞인 엔기스의 목소리와 함께 천천히 나를 둘러싸고 있던 안개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시야에 가득 차 있던 검은 드래곤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아니, 작아지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새까만 엔기스의 비늘의 색은 점점 연해지고 있었고, 날카롭게 빛나던 붉은 안광은 점점 빛을 잃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주변의 모든 안개가 사라지고, 어딘지 모를 공간이 다시 빽빽한 침엽수와 두꺼운 잎을 가진 관목들로 변하고, 바닥이 몇 년을 묵은 낙엽들로 푹신하게 변했을 때, 그 위에 자리한 것은 나의 귀여운 분홍색 슬라임 친구였다.
“스, 스기엔?”
아직 온전히 정신이 돌아온 것이 아닌지, 약간 멍한 눈빛의 스기엔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멍한 스기엔의 눈에 아주 조금 생기가 어리는 듯하더니 내 쪽을 향하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 스기엔?”
“레나티스!”
내 이름을 부른 것은 스기엔이 아니었다.
“테오도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놀란 얼굴로 다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테오도르가 보였다.
“레나티스!”
테오도르는 손이 닿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지자 내 이름을 부르며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테오도르는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살짝 떨리고 있는 그의 손과 머리카락 사이로 흐르는 그의 거친 호흡에 테오도르가 날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 나를 다시 봐서 얼마나 안도하고 있는지가 다 느껴졌다.
엔기스와 대화하느라 몰랐는데 어쩌면 제법 시간이 오래 흘렀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테오도르의 떨림과 호흡에 내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살짝 몸을 떼어낸 테오도르가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걱정으로 잔뜩 굳어 있던 테오도르의 얼굴이 조금 풀리면서 그의 얼굴에도 살짝 미소가 어리는 것이 보였다.
“테오도르 님은요? 별일 없었어요? 괜찮으세요?”
재빨리 눈으로 테오도르의 몸을 훑으며 물었다.
넘어지기라도 한 것인지 옷에 자잘한 낙엽과 흙이 묻어 있는 것을 빼면 테오도르는 괜찮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달려올 때도 굉장히 빨랐지?
“네 걱정에 가슴이 터질 뻔한 것만 빼면, 괜찮아.”
테오도르의 다정한 말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내가 엔기스에게 했던 말들이 생각나 더 얼굴이 붉어졌다.
“레나티스.”
부드럽고, 다정한 음색이었다. 그동안 걱정했던 것을 보상받기를 원한다는 듯, 테오도르는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보상이 어떤 형태인 것을 아는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테오도르의 체온이, 그리고 숨결이 가까이 다가온 것이 느껴졌다. 싸늘한 겨울 산의 온도를 헤치고 은은한 열기가 내 입술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작작 해라, 좀.”
앙칼진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자 코앞에 다가온 테오도르의 얼굴과 나와 마찬가지로 놀란 보라색 눈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