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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157화 (157/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57

“내 이름은 엔기스. 위대한 마족이자, 이 세계의 유일한 드래곤 이시다.”

역시!

그 이름을 듣자 주먹 쥔 손에 더욱 세게 힘이 들어갔다.

‘내 생각이 맞았어!’라며 휘두를 뻔했지만, 꾹 참았다. 나름대로 드래곤의 앞이라고 나는 행동을 자제하고 있었다.

“놀라지 않는구나, 인간. 내가 위대한 드래곤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냐?”

“조금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이 산을 찾은 이유는 바로 엔기스 님을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 나를? 아직도 인간들이 나를 기억하고 있던가?”

“물론입니다. 위대한 존재의 이름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법이지요.”

“흐응~. 다시 봐도 똑똑하고 예의 바른 인간이로구나.”

다시 기분 좋은 듯한 콧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아무래도 엔기스는 아부와 칭찬에 약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에게 좋은 첫인상을 선사한 것 같아, 흐뭇했다.

적어도 좋은 첫인상으로 물꼬를 텄으니, 이어질 대화의 분위기가 부드러우리라 예상했다.

다시 듬뿍 칭찬하고, 아부도 좀 떨면서, 드라고니아 드 카르오라는 인간을 아느냐고 물어봐야겠다. 혹은 스기엔이라는 귀여운 슬라임을 아느냐고…….

“내 특별히 상으로, 너를 잡아 먹어주지.”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차분하게 머릿속으로 ‘세상에서 제일 잘생기고 위대한 엔기스 님, 다름이 아니오라 한 가지 질문할 것이 있사온데, 부디 그 멋진 목소리로 대답을 해주시길 바랍니다.’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위에서 들린 말에 나는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만, 제가 뭔가 잘 못 들은 것 같은데요.”

“무얼 말이냐?”

“그러니까, 위대하신 엔기스 님께서 멋지고 잘난 목소리로 방금 저를 잡아먹으시겠다고…….”

“옳게 들었구나.”

“아니, 상이라면서 왜 잡아먹으신다는 거죠? 상이면, 보물을 하사한다거나, 축복을 내려준다거나, 하다 못해서 무사히 집에 돌려보내 주겠다고 말씀을 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니다.”

엔기스는 나의 항변을 깔끔하게 부정했다. 그 깔끔한 대답에 나는 입을 쩍 벌리고 허공을 쳐다보았다.

“아, 그래. 내가 설명이 좀 부족했구나.”

그런 내 표정을 본 것인지, 다시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너를 잡아먹기는 하겠지만, 너는 다시 태어날 거야. 아, 다시 태어난다는 게 뭔지 아느냐? 환생이라고 한단다.”

엔기스는 아주 귀중한 지식을 전달한다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적어도 이 세계에서 환생이 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일 것이다.

실제로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환생을 했으니 말이다.

“네 말대로 나는 위대한 존재이지. 나의 영역에 들어선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두 알고 있다.”

갑자기 허공에서 검은 형상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희디흰 안개 속에서 둥그렇고 시꺼먼 무언가가 떠오른 듯했다.

그러다가 쑥! 그야말로 그 안개를 힘으로 뚫은 것처럼 순식간에 또렷하게 그 형상이 보였다.

“레나티스 그라티아.”

“!!”

드래곤이었다.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형상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길쭉한 얼굴은 검은 비늘로 뒤덮여 있었고, 날카로운 이빨이 입 안으로 미처 다 넣지 못한 것처럼 비쭉 비쭉 튀어나와 있었다.

눈에서는 붉은 안광이 빛나고 있어, 동공이나 홍채가 무슨 색이고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는 아주 두껍고 굵은 뿔이 위엄있으면서도 유려하게 뻗어 있었다.

“불행한 삶을 살았구나.”

그제야 알아차렸다. 나는 엔기스에게 이름을 물었지만, 그는 내 이름을 물은 적이 없었다.

그는 알려준 적 없는 내 이름을 부르며 나타났다.

“어미는 얼굴도 모를 정도로 일찍 죽고, 네 존재를 의심하는 아비 아래에서 춥고, 배고프고, 얻어맞으면서 자랐구나. 불쌍한 인간.”

그리고 그는 내가 말한 적 없는 나의 과거를 읊었다. 마지막에는 불쌍하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차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의 권능이라면, 너를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 줄 수 있지. 아주 대단한 귀족 가의 영애로 만들어 줄 수도 있고, 재물이 가득한 부잣집의 귀염받는 외동딸이 되게 해줄 수도 있어.”

“그, 그게 가능한가요?”

“날 의심하는 거냐?”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살짝 기분이 상한 것 같은 목소리에 나는 손사래까지 치며 황급히 대답했다.

“네가 원한다면, 존경할 만한 멋진 아버지와 세상에서 너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만들어 줄 수도 있지.”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귀족 영애보다, 부잣집 딸보다,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말에 더욱 귀가 솔깃했다.

솔직히 말해서, 어린 시절에 내가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이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멋진 아버지와 나를 사랑해주는 어머니가 아니어도 좋았다.

그저 나를 때리지 않는 아버지와 어떤 사람이든 그저 있기만 하면 좋았을 어머니. 어린 시절에 내가 바랐던 것은 그렇게 평범한 부모님이었다.

“어떠냐, 레나티스?”

새까만 밤과 같은 엔기스의 입이 벌어지고, 새빨간 혀가 길게 허공을 훑었다.

“네가 그토록 바랐던 것을 나는 줄 수 있다. 내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기만 하면, 너는 네가 원했던 것을 가질 수 있어.”

인간과는 조금도 닮지 않은 얼굴에서, 인간보다 유려한 말과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고개만 끄덕이면요?”

“그래.”

“그럼, 제가 잃을 건 뭔가요?”

아주 잠시, 엔기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살짝 벌렸다. 날카로운 이가 측면에서 번뜩였다.

드래곤의 표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쩌면 그건 웃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똑똑하구나. 이런 것을 물을 줄은 몰랐는데?”

“세상에는 공짜가 없으니까요.”

그건 이미 일찍이 내가 깨달은 세상의 섭리였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언니를 따라서 일하러 나갔던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일을 하면, 조금이라도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

특히나, 이런 제안을 한 것이 악명높은 악룡이라면 당연히 의심해야 했다.

“네가 잃는 것은, 아까 말했듯이 내가 널 잡아먹을 테니 너의 육신이 되겠지.”

스윽, 엔기스의 머리가 아래로 내려왔다. 정확하게는 그가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는 것이 맞겠다.

마치 물건을 감정하는 것처럼 그는 고개를 살짝 비틀며, 나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붉은 안광 때문에 그가 정확히 무엇을 쳐다보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육신요?”

“그래. 그 뽀글뽀글한 분홍 머리와 하얗고 통통한 몸은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거야. 원래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잖느냐? 네가 가지고 싶은 것은 찰랑거리는 생머리와 마른 몸, 그러니까 부러질 듯 가는 손목과 발목, 그리고 한 줌에 잡히는 허리였지? 그리고 예쁘고 청순한 얼굴도.”

엔기스가 너무나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말하자 이제 무서울 지경이었다.

특별히 내 몸에 불만은 없었지만, 할 수 있다면 아스텔라 언니처럼 예쁘고 가녀린 몸을 가지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무서웠다.

어릴 때부터 그려왔던 평범한 가정도, 아스텔라 언니의 미모도, 가지고 싶기는 했지만, 드래곤에게 산 채로 잡아 먹히는 것은 손이 저절로 덜덜 떨릴 만큼 두려웠다.

“아니, 그래도 잡아 먹히는 건 너무 무서울 것 같…….”

“아니, 잠깐만. 지금 네가 가장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니야. 그렇지?”

나의 거절을 막으며 엔기스가 웃었다. 표정이라고는 없는 드래곤의 얼굴이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분명히 웃음기가 느껴졌다.

자칫 놓칠뻔한 것을 자신이 잡아냈다는 즐거움과 함께.

“그래. 사랑받는 딸이 되는 것과 미모는 예전에 네가 가지고 싶었던 거야. 지금 네가 간절하게 가지고 싶은 것은…….”

드래곤의 붉은 눈이 더욱 붉게 빛났다. 나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눈빛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너의 가정이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기. 같은 성을 쓰는 행복한 가정.”

그리고 그는 정확하게 맞췄다.

“나는 그것 또한 이뤄줄 수 있단다.”

“어, 어떻게요?”

나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분명 조금 전에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으면서도.

“너는 비참하고, 불쌍한, 레나티스 그라티아를 버리고, 새로운 이름과 육체로 새로운 삶을 가지게 되는 거야. 어떤 남자라도 유혹할 수 있는 미모를 주마. 누구라도 탐낼 재산과 신분도 주겠다. 어떤 남자라도 널 거절하지 못 하게 해주지.”

붉은 혀가 다시 날카로운 이빨들 사이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가히 악마의 유혹이라고 할 만큼, 유혹적인 말이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나는 그런 가정을 가지고 싶었다. 행복한 가정.

하지만 그 안에서 나의 역할은 사랑받는 딸이 아니었다. 난 이미 다 커버렸고,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나의 꿈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임을 깨달은 나의 새로운 꿈은, 내가 엄마가 되어 꾸리는 나의 가정이었다.

“…….”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번뜩이는 붉은 안광도, 어지럽게 번쩍이는 검은 비늘도, 나를 유혹하던 붉은 혀도 모두 사라졌다.

내 앞에는 그저 검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사랑하는 남편과 그 사이에서 낳은 귀여운 아이와 누구보다도 행복한 가정을.

“싫어요.”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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