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56
“스기엔!”
내가 스기엔의 이름을 부르며 다급하게 그쪽을 향해 갔을 때는, 이미 스기엔은 내 허리까지 오는 관목을 넘어 빽빽한 숲으로 들어간 참이었다.
“레나티스! 왜 그래?”
나 역시 당장 그 속으로 들어가려는데 테오도르가 내 팔을 잡았다.
“스기엔이 저쪽으로 가버렸어요.”
“뭐? 왜?”
“어디로? 저쪽?”
이야기하는 데에 집중해서인지, 아니면 말에 가리어 보이지 않았던 것인지 테오도르와 인스트는 스기엔이 가는 것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 다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내가 가리킨 쪽을 쳐다보았다.
“스기엔! 돌아와!”
테오도르가 소리 높여 외쳐보지만, 스기엔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더 멀리 가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어요. 뭐에 홀린 것처럼 흐리멍덩한 눈으로 가야 한다고 중얼거렸거든요.”
“스기엔!”
내 말에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스기엔을 불렀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인스트! 여기서 말을 지키고 있어.”
테오도르는 인스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바로 관목을 몸으로 헤치며 스기엔이 사라진 쪽으로 달려갔다.
“엘리자베스도 부탁해요!”
“아니, 잠깐!”
내 말에 인스트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나 역시 테오도르와 마찬가지로 이미 그의 뒤를 따라서 숲으로 들어간 뒤였다.
인스트의 말을 듣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랬다가는 안 그래도 작은 스기엔을 놓칠지도 몰랐다.
“스기엔!”
“스기엔!!”
테오도르의 굵은 목소리와 나의 높은 목소리가 번갈아 가며 울렸지만, 스기엔의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스기엔의 이름을 부를 기력으로 다리를 더 빨리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조금 전에는 그래도 나무 기둥과 관목들 사이로 스기엔의 반투명한 분홍색 뒤통수가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 언뜻언뜻 보였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다리도 0개이면서 무슨 속도가 이렇게 빠르담?
“잠깐만, 레나티스.”
“네?”
앞서 달리던 테오도르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나도 멈추라는 듯이 손을 뻗었다.
달려오던 속도 때문에 테오도르보다 몇 걸음을 더 가버리긴 했지만, 어쨌든 멈췄다.
“왜 그러세요?”
“안개가 짙어.”
안개? 갑자기 무슨 안개를 말하는…….
“어?”
테오도르의 말대로였다. 어느새 우리 주위로 뿌연 안개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정신없이 스기엔의 뒤통수만 쫓으며 달려오느라 눈치채지 못했었다.
어쩌면 스기엔이 더는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 멀리 가버려서가 아니라 이 안개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슨 안개가 이렇게 갑자기…… 테오도르?”
당황스러워서 주변을 한번 살피고, 다시 테오도르를 본 순간이었다. 그 역시 주변을 살피다가 내가 자신을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
테오도르의 보라색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가 본 것과 똑같은 것을 보고 그런 것이 틀림없었다.
어느새 짙어진 안개가 테오도르를 감싸고 있었다.
그의 옷은 빛바랜 것처럼 흐려졌고, 그의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스미어 검은 머리카락에 눈이 내린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짙은 안개가, 이렇게 빠르게 생기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자연현상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개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마치 안개가 테오도르를 테두리에서부터 조금씩 좀먹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반대로 내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레나티……!”
안개 사이로 테오도르가 나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안개가 더욱 빨랐다.
테오도르의 손은 마치 눈더미 속으로 손을 뻗은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의 목소리마저도.
“테오도르 님!!”
분명 눈앞에 있었던 사람이 순식간에 없어졌다. 나는 얼른 테오도르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침착해. 그냥 안개잖아. 바로 이 앞에 있을 거야.”
속으로 해도 되는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낸 것은 두려움 때문이리라.
앞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과 바로 눈앞에서 테오도르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에 저항하듯,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앞으로 뻗었다.
“테오도르 님?”
그리고 분명 서너 걸음 앞에 있어야 할 테오도르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새 내 발끝마저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는 짙어져 있었다. 그저 하얗기만 한 공간 속으로 무섭지만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내 발걸음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보폭이 너무 작았던 걸까?
분명 이쯤 왔으면 테오도르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테오도르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고, 팔을 휘저어 보아도 무엇하나 만져지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테오도르 님? 거기 계세요?”
여전히 들리지 않는 대답과 보이지 않는 모습에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꾹 참았다. 지금 우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 테오도르도 날 찾는 중이라 서로 어긋난 것일지도 몰라.’
두렵지 않을 이유를 찾아내고, 억지로 그것을 믿었다.
“테오도르 님, 어디세요? 테오도르 님!”
그리고 다시 허공을 마구 휘저으며, 그를 찾으려고 했다.
“…….”
하지만 한참이나 그 이름을 부르고, 한참이나 주변을 헤매고 나서야 마침내 나는 인정해야 했다. 테오도르는 여기에 없었다.
아니,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여긴…… 어디지?”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내가 아는 발루텍스 산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테오도르를 찾지 못하는 것은 그럴 수 있었다. 서로를 찾아서 헤매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데, 나무 기둥 하나도 내 손에 걸리지 않았다.
내 발치에 돌부리 하나도 채이지 않았고, 관목에 한 번도 부딪히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맨땅을 발로 차보았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푹신한 낙엽이나 부러진 나뭇가지, 혹은 자잘한 돌멩이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텅 비어버린 드넓은 곳에 나만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누구신가요?”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디에 계신가요?”
그리고 물었다.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를 향해서.
“제법 똑똑한 아이로군.”
그리고 자신이 낸 문제를 푼 아이가 기특하다는 듯이 싱긋이 웃는 목소리가 저 위에서 들려왔다.
“누가 널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연륜 있어 보이는 목소리였지만, 나이 든 목소리는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근엄함이 느껴졌지만, 동시에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 깃든 말투이기도 했다.
“지금 제가 있는 환경은 너무 부자연스러우니까요. 분명히 누군가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고,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면, 분명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19금이긴 하지만, 로판 독자였던 전생을 지닌 사람이 마음속으로만 덧붙여 말하자면, 보통은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은 초월적 존재들이었다.
인간을 시험하고자 할 때, 혹은 도와주고자 할 때, 또는 유혹하여 절망에 빠트릴 때, 그들은 이런 환경을 만들곤 했다.
신, 악마, 혹은…… 드래곤 같은 존재들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목소리에게 누구인지 물으려고 했다. 어쩌면 나의 각성은 신의 뜻인지도 몰랐다.
혹은, 이 세계에 나를 태어나게 한 것부터가 운명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건 악마의 유혹일 수도 있었다. 애초에 테오도르로부터 날 떼어놓은 것 자체가 사악했다.
또 다른 가능성은, 그리고 내 생각에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악룡, 엔기스라는 것이었다.
“실례라고 생각하면 입을 열지 말도록.”
……아무래도 너그러운 신은 아닌 모양이었다. 저렇게 싸가지없이 단칼에 내 말을 자르는 것을 보면.
나는 너무나 단호한 말에 더 묻지 못하고, 입만 몇 번 벙긋하다 그냥 다물어 버렸다.
이렇게 짙은 안개를 불러낼 정도라면, 누군지 몰라도 큰 힘을 가지고 있을 터였고,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하찮은 인간이여. 여기에 왜 왔지?”
“…….”
“이 산은 나의 것이며,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어떻게 온 것이지?”
“…….”
“인간, 왜 대답하지 않지?”
그야, 네가 입을 열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조용히 그가 시키는 대로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이건 질문이 아니라 대답을 하는 거니까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입을 열어도 되나요?”
“말을 하는 걸 봐선 이미 입을 열은 것 같다만?”
“아, 네. 위대하신 존재께 대답을 올리자면, 저는 말을 타고 왔습니다.”
“…….”
갑자기 안개 속이 침묵에 휩싸였다. 조금 전에 내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것과는 뭔가 다른 침묵이었다. 매우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
“너는 참 신기한 인간이구나. 똑똑한 듯하면서 멍청한 대답을 하고 있어.”
“제가요?”
“그래. 내가 위대한 존재인 것을 아는 걸 봐선 눈치가 빠른 것 같은데, 말을 타고 왔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맹한 대답이라니. 특이한 인간이야.”
퍽 흥미롭다는 듯이 목소리가 말했다.
만약 그가 내 눈앞에 있었다면, 손가락으로 제 턱을 문지르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면, 이게 네 작전인가?”
“별다른 작전을 세운 것은 없습니다. 저는 위대한 존재께서 이렇게 제 앞에 나타나실 줄도 몰랐는데요.”
“흐응~.”
살짝 콧방귀가 섞인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아무래도 ‘위대한 존재’라는 단어가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제가 당신의 위대한 존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그가 기분 좋은 틈을 타서, 나는 재빨리 아까 물으려는 것을 물었다.
“말을 예쁘게 하는 기특한 아이이니, 특별히 내 이름을 알려주지.”
그의 대답에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가서 주먹이 쥐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