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55
“대충, 여기서부터 발루텍스 산인 것 같습니다.”
한참이나 지도를 노려보던 인스트가 말했다.
“대충이라는 건 뭐지?”
“여기서부터 발루텍스 산입니다! 라고 누가 정해놓은 것은 아니라서요. 보통은 산도 주인이 있기 마련인지라 경계를 쳐놓거나 외부인 출입을 금지하는 푯말이 있기 마련이지만, 발루텍스 산은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임자가 없는 땅이 있을 리가 있나?”
“굳이 말하자면 국유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수도에서 먼데다가 춥고, 화전민도 없는 산이다 보니 제국에서도 거의 방치하고 있는 산이나 다름없어서요. 아주 가끔, 기사단이나 용병들이 북쪽의 야만족들과의 싸움을 대비해서 전지 훈련을 오기는 합니다. 저도 그때 와봤고요.”
인스트는 들고 있던 지도를 착착 접어 넣으며 말했다.
“그러니, 길이 좁아지고 있는 여기쯤이 대충 발루텍스 산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여기가 발루텍스 산이래, 스기엔.”
“그럼, 다 온 거야?”
가방을 열고 말하자, 스기엔이 안에서 바로 점프해 내 앞으로 튀어 올랐다.
“흐음…….”
제법 심각한 얼굴로 주변을 보던 스기엔은 엘리자베스에게 시야가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튀어 올라 내 머리 위로 올라갔다.
먹을 만한 것이 없다며 내내 툴툴거렸던 스기엔이었는데, 몸무게는 조금도 빠지지 않은 건지 제법 묵직했다.
“어때? 뭐가 좀 보여?”
하지만 스기엔의 시야가 넓어진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뭔가를 기억해낸다면, 상관없었다.
“마른 풀이 보여.”
아주 심각한 목소리로 스기엔이 말했다.
“앙상한 나뭇가지도 보이는군.”
“그리고?”
“뾰쪽한 초록색 가시가 달린 나무도 보여.”
“그래서?”
“겨울이었다…….”
스기엔의 아련한 목소리가 내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
“…….”
“…….”
그리고 세 명의 인간은 그 목소리를 듣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한마디로, 아무 생각이 없군?”
“응.”
테오도르의 냉철한 평가절하에 스기엔은 담백하게 말했다.
“기억이 없을 정도로 옛날이라면, 그때는 이렇게 숲이 울창하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스기엔은 잘 모를 수도 있죠.”
스기엔의 헛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깊은 빡침이 순간적으로 올라온 것 같은 테오도르의 표정을 보고, 나는 재빨리 스기엔을 두둔하는 말을 했다.
“스기엔의 그 기억이 제국력 이전이라는 네 주장이 옳다면 그럴 수도 있겠어. 이 나무들의 수령은 기껏해야 2, 30년 정도로 보이니까.”
다행히 인스트는 스기엔의 말에 별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등산을 시작해야겠군요.”
우리의 안내자는 가볍게 말하며 먼저 말의 고삐를 쥐고 산길로 들어섰다.
“뭔가 기억이 나면 말해줘, 스기엔.”
나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
그리고 테오도르가 말없이 내 뒤에 따라오는 것이 소리로 들렸다.
좁은 산길을 말 세 마리와 세 명의 인간, 그리고 한 마리의 몬스터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 * *
오늘로 발루텍스 산을 오른 지 사흘째였다. 날은 더욱 추워졌고, 연이은 노숙과 부실한 식사로 우리 일행은 지친 상태였다.
제일 불평불만이 많았던 스기엔마저도 조용해졌다. 말을 하면 배가 꺼진다고 하면서.
‘어쩌면, 이게 답이 아닐지도 몰라.’
피곤해 보이는 인스트와 테오도르, 그리고 조용해져 버린 스기엔을 보며, 나는 조금 자책이 되기 시작했다.
스기엔의 존재도, 초대 카르오 대공의 이름도, 발루텍스 산의 전설도, 전부 그냥 우연일 수 있었다.
“이상하네요.”
갑자기 들린 인스트의 말에 자책하고 있던 나는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인스트는 멈춰서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앞선 인스트가 멈췄으니, 나도 얼른 말을 멈췄다. 내 뒤에 선 테오도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빼꼼히 고개를 옆으로 내밀고 인스트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왔던 길로 되돌아온 것 같아요. 이 나무, 이 갈림길, 분명히 눈에 익거든요.”
인스트는 심각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저 눈만 끔벅였다.
그냥 나무인데 대체 어떻게 구분하는 거지?
“길을 잃은 건가? 아니면, 지도를 잘못 본 건가?”
“그냥 길을 잃었다고 하기엔, 좀 이상합니다. 분명 오르막이 훨씬 많았는데 제자리로 돌아왔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인스트는 지도를 꺼내 다시 살폈다. 그러다 지도를 내려놓고, 가방을 뒤적거려 구급함에서 붕대를 꺼내 조금 잘라냈다.
“그건 뭐 하시게요?”
“혹시 몰라서 표시해볼까 하고. 어쩌면 테오도르 님 말씀대로 내가 지도를 잘못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인스트는 말에서 내려 앞에 있는 나무의 나뭇가지에 흰 붕대를 대충 묶었다.
저렇게 하면 나같이 나무 구분을 못 하는 사람도, 이곳에 왔었다는 구분이 확실히 될 것 같았다.
“일단, 다시 가보도록 하죠. 오른쪽입니다.”
.
.
.
“제자리네요.”
인스트의 말에, 그리고 나뭇가지에 묶인 흰 붕대를 보며, 내 팔에서는 닭살이 오소소 돋아났다.
인스트의 말이 옳았다. 우리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얌전히 몰이를 당하는 양 떼처럼 인스트를 그저 졸졸 따라갔던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나도 나름대로 길도 보고, 나무의 생김새도 유심히 눈에 새겼었다.
인스트의 말대로 우리는 압도적으로 오르막길을 더 걸었고, 한쪽으로만 길을 꺾거나 그쪽만을 향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제자리로 올 수 있는 거지?
“뭐에 홀린 듯한 기분이군요.”
인스트는 말에서 내려 자신이 묶어둔 붕대가 맞는지 확인했다.
“동방에서는 진법이라고 해서 방향과 길을 착각하게 만드는 전술이 있다고 하던데, 그런 것과 비슷한 건가?”
어느새 테오도르도 말에서 내려있었다.
“저도 그런 것이 있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그건 보통 돌이나 나무의 간격 등으로 속이는 수법이지 않습니까? 여기에 그런 것을 할 이유가 없을 텐데요.”
“우리가 아직 이유를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 아직 드래곤의 보물이 남아 있다거나?”
“그래서라면 오히려 의욕이 불타네요. 혹시나 보물을 발견하게 되면, 공평하게 3등분 어떻습니까?”
인스트의 말에 나도 아주 살짝 의욕이 타오르긴 했다. 제국을 건설하고, 카르오 대공 가를 세울 만큼 엄청난 드래곤의 보물은 엄청났다.
그런데 그게 아직 남아 있다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남아 있다면!
잘은 모르지만, 서랍장에 꼬박꼬박 월급을 모으는 지금보다는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 부자가 되면 뭐 하지? 일단 집을 사야겠지? 그리고 소소하게 내가 먹을 채소를 가꿀 텃밭 조금이랑 과수원 조금이랑, 아! 그래! 마차도 사야지! 근데 나는 마차 면허가 없잖아? 그럼 마부를 고용해야 하나? 그건 좀 낭비인 것 같기도 하고…….
“아마 지금 위치는 이 정도쯤인 것 같습니다.”
“그럼 중턱 정도는 되는 건가?”
“아마도요.”
“초대 카르오 대공과 초대 황제가 만난 곳이라고 전해지는 곳까지는 얼마나 남은 거지?”
“그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어서요. 일단 출발 하기 전에 여러 사료들을 봐서 짐작한 위치는 이 정도쯤입니다만…….”
“그렇다면…….”
테오도르와 인스트가 심각한 목소리로 의견을 주고받는 동안 나는 심각하게 가상으로 생긴 돈을 어디에다가 써야 할지 고민했다.
어차피 나는 지도 보는 법을 몰랐고, 초대 카르오 대공과 초대 황제에 대한 정보는 테오도르가 훨씬 잘 알았으니, 두 사람의 의논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스기엔, 좀 일어나 봐.”
그래서 대신 스기엔을 깨우기로 했다. 이제 산을 제법 올랐으니, 스기엔이 밖을 보면 뭘 좀 기억해낼지도 몰랐다.
가방의 뚜껑을 열자, 동그란 스기엔의 몸과 바싹 솟아 있는 뿔이 보였다.
‘어? 자는 게 아니었네?’
아까부터 가방 속에서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아서, 나는 당연히 스기엔이 자는 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 때의 스기엔은 보통 뿔이 옆이나 뒤로 자연스럽게 넘어가 있었다.
“스기엔?”
“…….”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스기엔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여전히 스기엔은 대답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가방에서 스기엔을 꺼내자, 멍한 눈동자의 스기엔이 허공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숲 쪽이었다.
“가야 해…….”
스기엔의 입에서 중얼거리듯이 툭, 말이 내던져졌다.
“응? 뭐라고?”
내가 다시 물었지만, 스기엔은 내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그곳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저기야. 저기에 있어.”
“뭐? 저기에 뭐가 있는데?”
스기엔은 대답 대신 바닥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스기엔!”
거기에 그치지 않고, 통통 튀어서 숲으로 가려 했다.
마치, 무언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