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53
이건 위험했다. 너무 가까웠고, 너무 유혹적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테오도르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껴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다 들릴 거예요.”
“뭐가?”
“그게…….”
“뭐가 들릴 거라는 건데?”
음흉하게 웃으며 테오도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은근하게 풍기던 백단향이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덮쳤다.
이건 반칙이었다! 테오도르는 씻은 게 분명했다. 야영 생활 동안 거의 나지 않던 백단향이 갑자기 풍겨오자 나는 그만 어찔어찔해져 버렸다.
“괜찮아, 레나티스. 네가 조용히 하면 다 괜찮을 거야.”
그사이에 테오도르가 더 가까이에 다가왔다. 어두운 그림자가 내 얼굴을 전부 뒤덮고, 테오도르의 백단향이 내 몸을 전부 감쌌다.
내 몸은 옴짝달싹하지 못했고, 내 정신은 그저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다.
“레나티스…….”
테오도르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피부에, 그리고 입술에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까.”
내 목덜미에 닿은 것은 입술이 아니었다. 물론, 혀도 아니었다. 내 어깨를 살짝 베고 누운 테오도르의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닿았을 뿐이었다.
“아직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잖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은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고민하고, 걱정할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아.”
꽉 쥐어졌던 주먹이 저절로 스르륵 풀렸다. 테오도르가 한 말에 안심이 되어서인지, 부드러운 그 목소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너와 함께 있고 싶었어. 너랑 단둘이 있고 싶었어.”
테오도르의 숨소리는 편안했고, 목소리는 나른하게 들렸다. 마치 내 품속이 너무나 아늑해 금방이라도 잠이 들것 같은 목소리였다.
“테오도르 님!”
나는 그가 잠이 들기 전에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테오도르의 머리가 내 어깨에서 침대로 툭 떨어졌다.
놀란 듯, 살짝 눈을 크게 뜬 테오도르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도 지금 이렇게 단둘이 있어서 너무 좋아요!”
나는 허리를 구부려 테오도르의 이마에 입술을 꾹 찍었다.
솔직히 말해서 입술에 하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뒷일이 생길까 봐 참았다.
“설마 이게 이마 키스인가?”
테오도르는 눈동자를 굴려 제 이마를 쳐다보려 했다. 물론, 그런다고 사람이 자기 이마를 볼 수 있을리는 없었지만.
“전 그런 의미로 한 거긴 한데…… 뭐가 잘못됐나요?”
“너무 박력이 넘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테오도르는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내가 말한 적 있는지 모르겠지만, 너 같은 사람은 처음이야.”
칭찬인지 아닌지 아리송했다. 테오도르가 내 험담을 할 리 없으니, 아마도 칭찬이겠지만?
“너는 강해, 레나티스.”
“제가 힘이 좀 세죠.”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테오도르는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넌 착하고, 다른 사람을 동정할 줄 알지. 그리고 누군가를 늘 도와주고자 하고.”
“글쎄요. 딱히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요.”
“그럼 저 아이는 왜 도와주었지?”
“그야…… 저 애가 도와 달라고 했고, 제가 어느 정도는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진짜 병을 고쳐줄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의사 정도는 불러 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게 바로 강하다는 거야.”
마침내 할 말을 다 정리한 듯, 테오도르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을 멈췄다. 대신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약자를 동정하고, 그들을 도와주는 건, 강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거야.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마음이 약한 자는 자신의 재물만을 탐할 뿐이야. 아무리 힘이 세더라도, 용기가 없는 자는 남을 지켜줄 수 없어.”
처음이었다. 테오도르의 칭찬에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 것은.
순간, 너무 큰 칭찬에 멍해졌고, 그다음에는 가슴 속에 커다란 무언가가 들어간 것처럼 뻐근해졌으며, 마침내 테오도르와 눈이 마주치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토록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널 만나고 사랑할 수 있어서 영광이야.”
* * *
우리는 아침 일찍 발루텍스 산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테오도르와 나는 일찍 일어나 짐을 꾸리고, 빨간 지붕 집에서 인스트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물론, 스기엔도 함께였다.
“이 빵 맛있죠? 여기 특산물인가?”
“옥수수가 들어간 빵이 맛있다고?”
인스트는 내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인스트의 접시에는 빵이 없었다.
“고소하고, 옥수수가 톡톡 씹히는 게 맛있지 않아요?”
“전혀. 그러다간 건포도가 들어간 빵도 맛있다고 하겠군.”
“아! 그것도 맛있죠!”
“그게 맛있다고? 건포도가 들어간 빵이?”
“네. 달달~하니 맛있지 않아요?”
“넌 대체 싫어하는 음식이 있어?”
“어…….”
나는 인스트의 말에 내가 싫어하는 음식을 떠올려보려고 했다.
“음…….”
그러니까 내가 싫어하는, 맛없는 음식…….
“흐음~.”
“됐다. 그만하자.”
옆에 지켜보고 있던 인스트가 나보다 먼저 백기를 들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 식성을 봤을 텐데도, 여전히 인스트는 내 먹성이 신기한 듯했다.
“힘의 원천이 그건가? 나도 내일부터 식사량을 늘려볼까…….”
중얼거리는 인스트는 내버려 두고, 나는 재빨리 스기엔을 챙겼다.
“많이 먹어, 스기엔. 이제 산에 가면 이렇게 맛있는 것 없단 말이야.”
“그럴 줄 알고, 이미 배가 터질 것처럼 먹었지.”
스기엔은 마치 계략 남주처럼 웃었다.
“짐은 다 꾸렸나?”
“안 그래도 준비가 다 되면 촌장이 곧 찾아오기로 했습니다. 어제 이상한 할망구 때문에 미처 정산이 다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것에 대한 셈도 치러야 하고요.”
-똑똑.
“귀신같은 타이밍이네요.”
마침 들린 노크에 인스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귀찮아.”
스기엔은 투덜거리며 식탁에서 뛰어내려, 알아서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 않아요?”
“여기에서 누가 우릴 찾아오겠어?”
인스트의 말이 옳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촌장이었다.
“편하게 쉬셨습니까?”
사람 좋은 웃음을 띤 촌장이 꾸벅 인사를 한 뒤에 물었다. 말은 대공님이라고 했지만, 그게 우리 일행 전체에 대한 인사라는 것을 알았다.
“어땠어, 레나티스?”
갑자기 테오도르의 질문이 훅 들어왔다.
“어…….”
그러자 모든 시선이 갑자기 나에게 쏠렸다. 특히나 한 40년 전 첫사랑을 바라보는 듯이 애절한 촌장의 눈빛이 아주 부담스러웠다.
“식사가 맛있었어요. 어제 숙소에서도 따뜻하게 잘 잤고요.”
따뜻하게 만든 것은 셀프였지만, 어쨌든 그렇게 대답했다. 내가 제법 후한 평을 내리자, 그제야 촌장의 표정에 안도가 깃들었다.
“내 일행이 아주 만족스러웠던 모양이야.”
테오도르는 그렇게 말하며 인스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인스트는 품 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테오도르의 손 위에 착! 내려놓았다.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렇게 다 알아듣지?
나는 신기해서 입 모양만으로 ‘올~’하며, 인스트를 바라보았다. 인스트는 피식 웃으며, 나의 칭찬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포상으로 약속했던 금액의 두 배를 주도록 하겠지.”
으잉? 두 배?
나는 깜짝 놀라서 ‘올~’하고 있던 입 모양 그대로 고개를 홱 돌려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어제 테오도르가 제시한 금액은 충분히 후한 금액이었다.
전문적인 식당도, 여관도 아닌 것까지 고려한다면, 거의 횡재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거기서 두 배라고?
“두, 두 배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기뻐해야 하는 것도 잊은 듯, 촌장은 말까지 더듬으며 테오도르에게 되물었다.
“또한, 어려운 처지에 놓인 모녀를 외면하지 않고 도와준 마을 사람들의 정에 나의 일행이 매우 감동했어.”
“모녀라면, 어제 말씀하신 안젤라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맞아. 그래서 양심을 지닌 마을 전체에 대한 포상금으로 천만 루나를 기탁하도록 하지. 자네가 알아서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 쓰도록 해.”
“처, 처, 천만 루나를요?”
이제 촌장의 눈은 커질 대로 커졌고, 입은 벌어질 대로 벌어져서 저러다가 턱이 고장이라도 나면 연세도 있으신데 어쩌나 싶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천만 루나라면, 어지간한 평민 가정이 1년은 먹고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그런 큰돈을 갑자기 포상으로 내린다고 하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기 계신, 내 일행의 뜻이야.”
저요?
테오도르의 손이 깃털처럼 가볍게 나를 가리키자, 나는 눈이 동그래졌고, 그의 손을 따라서 촌장의 시선이 나를 향하자,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테오도르의 체면이 있는데, 이 상황에서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가,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머리가 허연 촌장이 내게 고개를 숙이자, 급하게 불편해진 나는 얼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와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아닙니다.”
내가 고개를 숙인 것을 본 촌장이 더 깊게 고개를 숙이자, 나도 어쩔 수 없이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 이러다가 무릎에 이마가 닿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