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52
“오늘 밤에 함께 자도 될까?”
유혹적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이성이 내가 오늘 밤 자기로 한 장소가 어딘지 떠올렸고, 간신히 고개를 고정했다.
“저, 저는, 여기서, 안젤라 방에서 자려고 했는데요?”
“알아.”
테오도르의 입술이 귓가에 좀 더 바싹 붙으며 속삭였다. 덕분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나고, 귓불의 털이 곤두섰다.
“어, 어린애 방이라서 방이 좁아요. 그리고 침대도 작아서 테오도르 님은 발이 삐져나갈걸요?”
“난 바닥도 괜찮아.”
은근슬쩍, 어느새 테오도르의 손이 어깨에서 허리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큰 손이 내 허리를 부드럽게 누르며 내 몸을 자신 쪽으로 당겼다.
“모처럼 침대에서 주무실 기회인데요?”
“하지만 모처럼 둘만 있을 기회이기도 하잖아?”
테오도르의 손이 좀 더 은밀히 움직였다. 허리에 있던 손이 조금 아래로 내려가며, 내 골반을 그러잡고 더욱 진득하게 내 허리 아래를 감쌌다.
그 손길에 저절로 허리가 젖혀지고, 목이 젖혀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 내 귓가에 있던 테오도르의 숨이 미끄러지듯이 턱선을 따라 목으로 흘러내렸다.
뜨거운 숨이 목 언저리에 닿자, 이번에는 진짜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레나티스 언니!”
집 안에서 안젤라가 뛰쳐나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으아아아! 나 여기 있어!”
나는 재빨리 테오도르를 밀치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젠장…….”
테오도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난 못 들은 척을 했다.
‘……쳇.’
속으로는 나도 약간 아쉬웠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대신 침착하게 안젤라를 기다렸다.
“방에, 제 방에! 이상한 게 있어요!”
헐레벌떡 달려온 안젤라가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이상한 것?”
“네! 생전 첨 보는 이상한 건데, 분홍 분홍하고, 엄청 귀여워요! 근데 표정은 험악하고, 으르렁거리는데, 그것도 귀여워요!”
안젤라의 설명에 아이가 뭘 본 건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방에 혼자 놀라고 두었던 스기엔을 봐 버린 것이다.
자기 방이니 안젤라가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 그거…….”
애한테 몬스터란 게 있고, 근데 사실은 없고, 하지만 스기엔은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더불어 그게 비밀이라고도 설명해야 했다.
“그게 뭐냐면……. 음…….”
“마녀의 부하야.”
스기엔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는 와중에, 불쑥 테오도르가 끼어들었다. 스기엔이 들었으면 길길이 날뛸 설명으로.
“마녀는 검은 고양이나, 박쥐 같은 이상한 걸 늘 데리고 다니잖아? 네가 방에서 본 그게, 레나티스가 데리고 다니는 이상한 거야.”
테오도르의 제법 그럴듯한 설명에 안젤라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자, 봐. 이 머리카락 색이랑 똑같은 분홍이잖아?”
이게 바로 그 증거라는 듯, 테오도르는 내 머리카락을 들어서 안젤라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안젤라의 눈이 커졌다.
“맞네요!”
순진한 아이는 이 미흡한 증거에 홀라당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마녀란 엄청나게 좋은 거였네요! 사람 병도 고치고, 귀여운 것도 데리고 다니고, 멋진 남자친구도 있고요!”
안젤라는 집에서 뛰어나올 때보다 더 상기된 뺨과 높아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런데 맨 뒤에 나온 결론은 어떻게 안 거지?
“아직 어머니가 다 나으신 건 아니잖아.”
아직 무슨 병인지도 모르는데, 아이에게 괜한 희망을 불어넣은 것일까 봐 살짝 말을 정정해주었다.
“물론, 의사 선생님이 오시면 고쳐주시겠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괜히 희망을 꺾을 필요도 없는 것 같아, 앞선 말도 얼른 정정했다.
“하지만 이제 옛날처럼 건강해 보이는데요? 조금 전에 엄마를 보고 왔는데, 기침도 안 하고, 덜덜 떨지도 않고, 얼마나 잘 자고 있는데요!”
환하게 웃으며 안젤라는 말했다.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고, 장작을 팍팍 때어 집안에는 온기가 가득하고, 남아도는 장작으로 물을 한 솥 끓여서 따뜻한 물로 개운하게 목욕하고, 그동안 내가 침대 시트와 이불까지 새것으로 갈아 놓은 곳에 누웠으니, 당연히 잠을 잘 잘 수밖에 없었다.
“전부 레나티스 언니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손을 가지런히 배꼽에 모으고, 안젤라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마도 고마운 일이 있으면, 이렇게 인사하는 거라고 엄마가 가르쳐준 모양이었다.
“그 분홍색 덩어리가 좋으면, 가서 같이 놀지 그래?”
“그래도 돼요?”
테오도르의 제안에 안젤라가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내 생각엔 스기엔의 성질머리 상 안될 거 같은데…….
“물론이지. 그 분홍색 덩어리도 아주 좋아할 거야.”
하지만 나보다 테오도르의 대답이 더 빨랐다. 그리고 안젤라도 그 대답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예 오늘 밤에 같이 자는 건 어때?”
“그래도 돼요?!”
테오도르의 제안에 안젤라는 더욱 흥분된 음성으로 물었다. 질문이 아니라 거의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어쩌자고 일을 키우는 거냐는 뜻을 담아서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내 시선을 분명히 느꼈으면서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었다.
“대신, 그 분홍색 덩어리가 좋아하는 말을 해줘야 해. 귀엽다는 말은 하지 마.”
그는 친절하고 상냥한 가게 주인이 자신이 판 물건의 사용법을 알려주는 것처럼 안젤라를 대했다.
어떻게 보면 스기엔을 팔아넘기는 것은 맞긴 했다.
“네? 그렇게 귀여운데, 어떻게 귀엽다는 말을 안 해요?”
“귀엽다는 말 대신 멋있다고 말해줘.”
“멋있다……. 멋있다…….”
어째 그 말이 입에 붙지 않는 것처럼, 안젤라는 되뇌었다.
“진짜 그래요? 멋있다는 말을 좋아하나요?”
안젤라는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응. 맞아. 위대하다는 말이랑, 똑똑하다는 말도 좋아해.”
스기엔이 그 말을 좋아하는 건 사실인지라, 나는 그가 좋아하는 다른 단어들도 함께 알려주었다.
“일단 무조건 칭찬해 줘. 그러면 좋아할 거야.”
테오도르는 마지막 사용법을 알려주듯, 덧붙였다.
“자, 그럼 들어가서 같이 놀아. 단, 집 밖으로 나가면 안 돼.”
“왜요?”
“이 마을 사람들은 마녀를 무서워하잖아? 마녀가 데리고 다니는 것도 무서워할 테니까. 괜히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고 싶지는 않지?”
“네.”
착하게도 테오도르의 당부에 안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기엔에 대해서 의외로 너무 잘 아는 것 아니에요?”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안젤라의 뒷모습을 보며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지금 며칠째 계속 붙어 있었는데, 그 정도도 모르겠어? 거기다가 그 슬라임은 워낙에 단순하잖아.”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자꾸 싸워요?”
“싸워? 내가?”
내가 은근히 눈을 흘기면서 말하자, 테오도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래요. 서로 시비를 못 걸어서 안달인 것처럼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잖아요. 스기엔이 칭찬에 약하다는 걸 알았으면, 자주 칭찬해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 건방진 슬라임이 칭찬받을 짓을 해야 칭찬해 주지.”
테오도르는 스기엔에게 칭찬이 과분하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나야말로 너에게 칭찬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제가 테오도르 님을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뭘 잘했다고 칭찬을 해달라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테오도르를 쳐다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약간, 음흉하게.
“이렇게 멋진 남자친구랑 단둘이 있을 수 있게 만들어 줬잖아? 그 찰거머리 같은 슬라임도, 재잘거리는 어린애도 없이.”
어느샌가 테오도르의 손이 내 허리에 착 감겨있었다.
은근히 자신의 쪽으로 나를 끌어당기자, 아까처럼 테오도르의 입술이 내 귓가에 바싹 붙었다.
“밤새도록 말이야.”
* * *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저기, 아마도, 이러면 안 되지 않을까요?”
살짝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뭐가?”
양손으로 각각 내 오른쪽과 왼쪽을 짚고, 내 위로 몸을 겹쳐 누운 채,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머금은 테오도르가 대답했다.
미소는 알 듯 말 듯하였지만, 역설적으로 그 미소가 뜻하는 바는 테오도르가 내가 말한 뜻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옆방에 안젤라와 안젤라 엄마가 자고 있잖아요. 바로 이 벽 너머예요.”
나는 힐끗 시선을 위로 올려 침대 헤드라고 하기에는 너무 옹졸한 나무의 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바로 이 벽 너머에 그 두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슬라임도 빼놓으면 안 되지.”
한쪽 어깨를 까딱이며 테오도르가 말했다. 그러면서 그의 팔이 슬쩍 내 어깨에 닿은 것은 고의인지, 우연인지 알 수 없었다.
테오도르가 안젤라에게 스기엔과 놀라고 말하고, 밤에도 같이 자라고 꼬신 것은 고의인 것이 분명했지만.
예상대로 스기엔은 안젤라를 보며 처음엔 툴툴거렸지만, 이내 자신을 찬양하는 말에 우쭐거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아이와 놀아주기까지에 이르렀다.
조그만 구멍을 통과한다거나, 쭉쭉 늘어나는 걸 보여준다거나, 말랑말랑한 촉감이 좋다며 안젤라가 만지는 대로 가만히 있어 주면서.
그리고 마침내, 실컷 놀아서 졸린 안젤라가 피곤한 눈을 한 스기엔을 품에 안고 제 엄마의 곁으로 자러 갔다.
테오도르와 나를 이 작은 방의 이 작은 침대 위에 두고서!
“네 말대로, 셋 다 이 벽 너머에 있어. 여기엔 없지.”
테오도르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팔에 힘이 풀어진 척을 하며 슬쩍 아래로 내려왔다.
거짓말! 이제껏 내가 많이 봤는데, 이 자세로 팔에 힘 풀어진 적 없잖아요!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밤새도록 이고, 이 자세로 잘도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