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51
“이! 멍청하고! 이! 나쁜 인간아!”
내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스기엔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론 그럴 만도 했다.
내가 안젤라의 손에 이끌려 다니고, 마을의 경매 아닌 경매를 참관하는 동안, 불쌍한 스기엔은 내내 엘리자베스의 목에 매달려있어야 했다.
그게 끝난 뒤에 안젤라의 집으로 스기엔을 데려와서도 안젤라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스기엔이 든 가방은 작은 방에 슬쩍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 오랜 시간을 가방에 갇혀 있다가 지금에야 꺼내줬으니, 스기엔은 충분히 화낼만한 권리가 있었다.
“정말 미안해. 데리러 갈 시간이 없었어.”
“시간이 없긴 왜 없어? 마음이 없었던 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 상황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자꾸 흘러갔단 말이야.”
“생은 원래 예측불허야! 그것도 모르고 살았어? 한심한 인간!”
슬라임이 너무 똑똑해서 싫은 사람 있나요?
일단 저요. 구구절절 맞는 소리만 해서, 늘 말로 처맞고 있거든요.
“아니, 그렇게 답답했으면 틈으로 충분히 나올 수 있었잖아. 원래 그렇게 잘 다니더니만? 막 지하 감옥에서도 벽돌 틈으로 들어가고, 방에서도 창문 틈을 막 넘나들고 그랬잖아.”
나는 어떻게든 스기엔의 잔소리를 피하고자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네가 절대 가방에서 나가지 말라며!”
아…….
“여기는 카르오 저택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곳이라고, 나갔다가 길이라도 잃으면 영영 너 못 본다고, 절대로 가방 안에만 있으라고 했잖아!”
맞다. 내가 그랬었다.
“잘못했습니다.”
나는 허리를 거의 170도로 굽혀 깍듯하게 스기엔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건 진짜 거의 368% 내 잘못이었다.
“이 바보 같은 인간!”
“맞습니다.”
“멍청한 인간.”
“위대하신 고위 마족 님의 말씀이 무조건 옳습니다.”
“마족을 학대하는 나쁜 인간 같으니라고!”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나는 머리를 조아리며 정수리로 스기엔의 잔소리와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내었다.
“위대하신 고위 마족 님.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멍청하고 미천한 인간이 바치는 공물을 받아 주시지요.”
그리고 스기엔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재빨리 가지고 왔던 것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그동안 좀 바빠서 스기엔을 잊은 것은 사실이지만, 진짜 까맣게 잊은 것은 아니었다.
마을 주민1 정도 되는 사람이 푸짐하게 차려온 식사 바구니를 받자마자 이렇게 달려온 것이 그 증거였다.
안젤라와 안젤라 엄마가 같이 식사하자는 것을 뿌리치고, 스기엔과 같이 먹으려고 스기엔이 좋아할 만한 것과 내 몫을 적당히 담아온 것이었다.
비록 존재는 잠시 잊었으나, 배고픔은 잊지 않았다!
“내가 네 성의를 봐서, 진짜 이번 한 번만 봐준다.”
다행히 스기엔은 나의 성의를 봐서 용서해주었다. 아니면, 공물을 봐서 용서해준 것이던가.
“헤헷.”
뭘 봐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나는 실실 웃으면서 스기엔의 곁으로 다가갔다. 내가 쟁반에 담아온 음식은 소박하긴 했지만 푸짐했다.
갓 삶은 파근파근한 감자와 고구마, 역시나 갓 구운 듯한 따끈한 빵, 아마도 닭이 들어간 것 같은 따끈한 스튜, 살짝 절인 오이와 달걀, 콩으로 만든 샐러드, 당절임한 여러 종류의 베리와 몇 가지의 과일, 그리고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우유까지.
집에 있는 괜찮은 재료들을 총동원한 듯 보이는 푸짐한 식사였다. 거기다가 이런 풍성한 식사가 오랜만이기도 했다.
“자, 자! 배고플 텐데, 얼른 먹어. 스기엔.”
그렇게 말하며 과일을 스기엔의 앞에 놔주었다. 그리고 스기엔이 싫어하는 오이가 든 샐러드는 얼른 내 앞으로 놓았다.
“근데, 아까 보니까 막 인간이 비명을 질렀다가, 조용해졌다가, 멀리서 또 시끄러워졌다가, 누가 미친놈처럼 웃으면서 말을 끌고 가더니 말한테 높임말을 쓰면서 마음에 드시는지요? 이러던데 대체 여긴 어디야? 미치광이 마을이야?”
“미치광이 마을은 아니고, 그냥 평범한 마을이야.”
“이 누추한 집은 또 어디고?”
“여기는 그냥 평범한 마을 애가 사는 집.”
“여기서 오늘 자는 거야?”
“응.”
“흐응~.”
내 말에 스기엔은 방의 구석구석을 쳐다보았다.
으리으리한 카르오 저택에서 살던 스기엔의 눈에는 아마 이런 작고 낡은 집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방이 너무 작지?”
나는 선수를 치기로 했다. 씹고 있던 닭고기를 꿀꺽 삼키고, 스기엔에게 말을 걸었다.
“과연, 이 위대하신 고위 마족 님을 모시기에는 너무 누추하고 작은 방이로군.”
아, 예…….
“하지만 너같이 조그만 인간에게는 딱 맞는 방이야.”
나보다 더 작은 스기엔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스기엔은 한 86명 정도가 와서 자도 괜찮을 것 같은데!
가만, 슬라임은 명으로 세는 게 맞나? 아니면 마리로 세야 하나? 그렇게 세면 왠지 스기엔에게 혼날 것 같은데……. 슬라임은 세는 단위가 어떻게 되는 거지?
“이 누추한 곳에, 이 귀하신 몸이, 하룻밤 기거하면서 빛내주도록 하지.”
입가에 당절임 베리를 묻힌 채, 조금의 근엄함도 없이 스기엔이 으스대며 말했다.
진짜 하찮고 귀여웠다.
* * *
“이 정도면 됐나?”
내가 쌓은 장작을 보며 뿌듯하게 중얼거렸다. 안젤라네 집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도 뿌듯했다.
저렇게 연기가 난 지 꽤 되었으니, 제아무리 웃풍이 있는 집이라도 집안은 훈훈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러고 있을 줄 알았어.”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황급히 뒤를 돌았다. 그러기도 전에 목소리만으로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쉬고 있겠다고 하더니, 장작을 패고 있었군?”
“그냥, 뭐, 점심 먹은 것 소화도 시킬 겸 했죠.”
테오도르의 핀잔 아닌 핀잔에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변명했다.
“이 정도 장작이면, 아침에 먹은 것도 다 소화가 되겠군.”
테오도르는 자기 키보다 높게 쌓인 장작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별로 힘도 안 들었는데요, 뭐. 오히려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개운했어요.”
나는 팔뚝보다 두꺼운 자루와 머리만 한 도끼날을 가진 도끼를 한 손으로 번쩍 들며 말했다.
이렇게 큰 도끼를 안젤라 엄마가 다룰 수 있을 리 없으니, 아마도 죽은 안젤라의 아버지가 쓰던 도끼였던 듯했다.
“그 애 엄마의 상태는 어떻지?”
다행히 테오도르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넘겨주었다.
“지금은 자고 있어요. 따뜻한 방에서요. 들어보니, 남편이 죽고 나서는 장작을 아끼느라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불을 땠다고 하더라고요. 식사도 이제껏 제대로 못 해서 그런지 정말 조금밖에 못 먹더라고요.”
도끼를 제자리에 두며 나는 테오도르의 말에 대답했다.
당분간은 쓸 일이 없을 테니, 안젤라가 만지지 못하도록 구석에 숨겨둬야겠다.
“어느 정도 먹던데?”
“제가 먹는 것의 반도 못 드시던데요?”
“…… 일반 성인 여자 기준으로는 적당히 먹은 것 같군.”
“네? 그게요?”
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내가 좀 많이 먹는 편이긴 하지만, 일반인 기준 정도는 알았다.
“클레어만 해도 제 반 정도는 먹어요.”
“클레어는 몸 쓰는 일을 하는 하녀이니까, 보통보다는 잘 먹겠지.”
그런…… 거였나? 나는 이제까지 아스텔라 언니는 적게 먹는 편이고, 클레어가 보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나는 보통보다 조금 많이 먹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아니, 잠시만. 클레어가 보통보다 많이 먹는 편이라면, 그 클레어보다 많이 먹는 나는…….
“저, 혹시, 저는 굉장히 많이 먹는 편인가요?”
나는 짐짓 심각하게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
테오도르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 침묵 속에 긍정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저기, 혹시, 저…… 좀 뚱뚱한 편인가요?”
“그건 절대 아니야.”
다행히 이번 대답은 매우 빨랐다.
“휴우.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이전에 누가 저더러 손목이 통통하다고 한 적이 있어서, 조금 신경 쓰였거든요.”
나는 내 손목을 내려다보며 심각하게 말했다. 솔직히 그때는 내가 봐도 좀 손목이 통통하긴 했다.
카르오 대공 가에서 식사가 좀 잘 나왔어야 말이지. 심지어 무한 리필이나 다름없어서 그동안 못 먹었던 것을 실컷 먹느라 조절이 힘들었었다.
하지만 이후에 인스트와 여러 가지 훈련을 하면서, 근육이 붙고, 힘들어서 그때보다는 살이 빠졌다.
오히려 거울을 보면, 내 인생에서 지금이 제일 나이스 바디라고 생각했는데!
“누가 그런 소리를 했지?”
테오도르의 낮은 목소리에 손목에서 손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주 싸늘한 눈빛이었다.
내가 이름을 말하면 당장 그놈의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 글쎄요? 누구더라…….”
나는 누군지 잊어버린 척을 했다.
……어라? 진짜 누구였지?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그 사람을 감싸는 건가?”
“아뇨. 그게, 진짜 기억이 안 나는데요.”
“착해빠져선…….”
테오도르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레나티스.”
조용히 내 이름을 부르는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무언가 아까와는 달랐다.
“네?”
“오늘 밤에 함께 자도 될까?”
테오도르가 내 귓가에 은밀한 제안을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