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47
순간 나는 내가 환생자가 아닌, 회귀자인가 생각했다.
우는 꼬마를 간신히 진정시키고, 작은 손에 이끌려서 그 아이의 집으로 갔다.
삐거덕거리는 낡은 문을 여는 순간, 나는 20살 이전의 레나티스로 회귀한 줄 알았다.
그만큼 아이의 집은 예전 우리 집과 닮아 있었다.
삐거덕거린 지 오래되었지만, 고칠 사람이 없어서 내버려 두고 있는 것 같은 문부터 시작해서,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낡은 식탁과 의자, 몇 개 되지도 않는 것 같은 볼품없는 세간살이. 그야말로 가난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집이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 집보다 이 집이 더 했다.
적어도 우리 집은 아스텔라 언니가 매일 깨끗이 청소해서 뽀얀 먼지 따위는 없었고, 내가 든든히 장작을 패어두는 덕에 추운 겨울에도 장작만큼은 마음껏 때 공기가 늘 훈훈했으니까.
하지만 아스텔라 언니도, 나도 없는 이 집은 먼지가 뿌옇게 앉은 가구들과 바깥만큼이나 싸늘한 공기로 채워져 있었다.
“이쪽이에요.”
내가 꼼짝하지 않고 서서 집을 둘러보고 있자, 조급했던지 아이가 작은 손으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 작은 손에 이끌려 낡은 방문 앞에 섰다.
“엄마!”
아이가 문을 열자, 침대에 누운 여자가 보였다.
얼굴은 창백하고 파리했으며, 이불 위에 다소곳이 내민 두꺼운 옷 소매는 안에 팔이 있는지도 모를 만큼 납작했다. 누가 봐도 그녀는 환자였다.
“안젤라?”
자신을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에 여자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자, 파리한 낯빛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딜 갔다 왔니? 손이 차구나.”
여자는 앙상하게 마른 손을 꺼내 안젤라의 손을 꼭 쥐더니, 얼른 이불 안으로 넣었다.
바람만 덜 불뿐, 집안의 공기는 바깥과 거의 다를 바가 없이 차가웠다.
저 이불 속이라고 따뜻할까 싶었지만, 적어도 아이 엄마는 자신의 체온을 나눠주려 했다.
아이의 얼굴만 봐도 생명력이 불어넣어지고, 야윈 손으로 아이의 차가운 손을 잡아주는 모습을 보자, 어쩐지 뭉클해져서 울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저게 진짜 모정이라는 걸까?
“엄마, 이제 금방 나을 수 있어요.”
“그래. 우리 안젤라를 위해서 그래야지.”
“진짜예요. 여기 마녀님이 엄마 병을 고쳐줄 거예요!”
“뭐?”
아이의 말에 그제야 안젤라의 엄마는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보았다.
안젤라의 목소리에 겨우 눈을 뜨고, 차가운 손을 잡아주기에 바빴던 그녀는, 방에 안젤라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보통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라는 뜻을 담아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듯, 눈을 찌푸리고 초점을 맞춰보던 그녀의 안색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욱 창백해졌다.
“마, 마녀!”
* * *
“마녀라니, 요즘 세상에 그딴 걸 믿는 사람이 어딨지?”
테오도르는 눈앞에 뻔히 그런 걸 믿는 사람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당연히 그 믿음을 비웃는 말이었다.
누구보다도 진실로 마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녀가 마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마력의 혜택을 받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고립된 시골의 폐쇄적인 마을이니까요.”
생전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수도의 귀족을 처음 본 촌장이 차마 테오도르의 말에 무슨 대꾸를 하지 못하자, 그를 대신해서 인스트가 대답했다.
수도 출신이 아닌 인스트는 어느 정도는 촌장을 이해했다.
이런 폐쇄적인 마을에, 나이도 많으며,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방어적인 위치에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멍청하긴.”
물론, 테오도르에게는 그따위 이해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테오도르는 촌장에게 그보다 더 심한 말을 쏘아붙이고 싶었다.
‘감히 레나티스에게 그따위 반응을 해?’
무슨 엄청난 괴물이라도 보듯이 그 남자가 레나티스를 향해서 비명을 질러대는 것을 바로 옆에서 본 테오도르였다.
커튼을 친 여자도, 문을 닫아버린 남자도, 노크에 모른 척하던 노인도, 모두 보았다.
그리고 생전 처음 받아보는 대접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내 풀 죽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레나티스까지 테오도르는 보고야 말았다.
자신이 어깨를 쓰다듬어주자, 괜찮다는 듯이 레나티스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진짜 미소는 그런 힘없는 미소가 아니었다.
레나티스의 진짜 미소는 밝고, 환했으며, 보는 사람까지 기분 좋아지는, 그런 미소였다.
‘감히 네까짓 놈들이…….’
레나티스의 힘없는 미소를 떠올리자, 테이블 아래에서 테오도르의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성질 같아서는 이 마을의 대표라는 저 작자의 면상을 후려치고, 다시는 그따위로 문을 닫지 못하도록 집들을 다 불태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이 역시 레나티스 때문이었다.
그런 망나니 같은 행태를 착한 레나티스가 좋아할 리 없으며, 오히려 저 때문이라고 자책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그녀가 원했던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여기서 구해야 했고, 노숙이 아닌 지붕과 벽이 있는 곳의 침대에서 레나티스를 재우고 싶었다. 불침번 없이 밤부터 아침까지 푹.
“거기다가 여기는 발루텍스 산의 인근이잖아요. 전설의 악룡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전설도 일종의 미신 아니겠습니까?”
테오도르의 살벌한 눈빛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인스트는 다시 한번 마을의 입장을 전했다.
“미, 미신이 아닙니다.”
테오도르의 살벌한 분노와 귀족의 위엄을 동시에 받아내기가 버거워서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떨고만 있던 촌장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악룡 엔기스는, 정말로 있습니다.”
자신을 향한 빈정거림과 비웃음은 묵묵히 견뎌낼 수 있었지만, 악룡 엔기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만은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촌장은 항변의 말을 내뱉었다.
“왜? 네가 실제로 보기라도 했나?”
“그, 그건 아닙니다만…….”
여전히 빈정거림이 섞인 테오도르의 말에 촌장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제가 본 것은 아닙니다만, 촌장에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문서에 따르면, 발루텍스 산에 분명히 악룡 엔기스가 살았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가서 좀 불러와 보지? 내가 그 악룡 엔기스와 좀 나눌 말이 있어서.”
“지, 지금은 보이지 않은 지 꽤 되었긴 합니다. 말씀드렸듯, 저도 본 적은 없습니다.”
엔기스를 당장 불러보라는 테오도르의 말에 촌장의 기가 또 슬그머니 죽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악룡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희 마을은 대대로 엔기스에게 공물을 바쳤고, 의식을 치러왔습니다. 저희가 분홍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를 마녀라고 부르고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왜? 엔기스가 분홍 머리 마녀를 죽이지 않으면, 마을을 불태워버리기라도 했나?”
“아뇨. 그 반대입니다.”
촌장은 진지했다. 그는 수백 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문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다.
“엔기스 님은 분홍 머리 여자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촌장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테오도르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악룡에게 취향이 있단 말인가? 설사 취향이 있다 하더라도 드래곤이 왜 인간 여자를 좋아한단 말인가? 그것도 특정 머리카락 색깔의?
“그래서 마을에 분홍 머리카락의 여자가 태어나거나, 그런 여행자가 마을에 들리게 되면 저희는 반드시 그 여자를 발루텍스 산으로 보내야 했지요.”
“분홍 머리카락이 그렇게 흔한 머리카락은 아닐 텐데?”
“네, 네. 그렇지요. 하지만 옛날에는 종종 있던 색입니다. 요즘처럼 희귀하지는 않았지요. 이 작은 마을에서도 가끔 분홍 머리카락의 아이가 태어나기도 했으니까요.”
촌장의 말에 갑자기 테오도르는 입이 썼다.
과거보다 현재에 분홍 머리카락을 지닌 사람이 희귀하게 될 만큼 줄어든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카르오 가문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에멘스같이 위험한 인물이 그 하나뿐이었으리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힘들었고, 레나티스의 어머니같이 희생된 사람이 그녀뿐이라고 생각하기는 더욱 힘들었다.
“어린애를 험한 산에 올려보냈다는 건가?”
“아,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 크고 난 뒤에 올려보냈지요. 그러니까 성인이 되면 말입니다.”
촌장은 자신들은 어린애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분명 그가 그 먼 과거에 살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자신과 이 마을의 역사를 동일시하는 듯했다.
“여자를 키워서 제물로 바쳤다는 이야기로군.”
테오도르는 촌장이 곱게 포장한 이야기의 포장지를 찢어발겼다.
단박에 핵심을 파악 당한 촌장은 대번에 입을 다물었다. 악룡의 존재를 피력하기 위해서 들고 있던 고개가 처음처럼 수그러들었다.
테오도르는 그가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
그리고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인스트 역시 이번만은 마을의 편에 서서 테오도르와 그 사이를 중재하려 들지 않았다.
“그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깊은 침묵 끝에 촌장이 작게 중얼거렸다.
“분홍 머리 여자를 숨겨두면 마을에 재앙이 닥쳤습니다. 갑작스러운 화재로 숲이 불타거나, 키우던 가축이 감쪽같이 사라지거나, 어떨 때는 힘들게 가꾼 밭에 산짐승들이 몰려와서 엉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모두 악룡 엔기스가 저질렀다고 보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혹은, 그저 우연이 겹쳤거나.
“저희에게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는 악룡의 신부였습니다. 신부를 숨기면 악룡의 진노를 받게 되니, 저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악룡의 신부로 발루텍스 산으로 보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마침내 테오도르의 공감을 산 것 같아지자, 촌장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것은 촌장의 조상들이 맞닥뜨린 재앙에 동정을 보내는 시선이 아니라, 그들을 인간만도 못한 취급을 하는 듯한 싸늘한 시선이었다.
“그래서 분홍색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를 마녀라고 부르는 거로군?”
그리고 테오도르의 실제 심정도 그러했다.
“같은 사람을 악룡의 제물로 보내자니 양심에 가책이 느껴져서, 아예 자신들과 다른 종족인 것처럼 취급한 거잖아.”
“…….”
“아주 대단한 생물학자가 나셨군. 마녀라는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내다니 말이야.”
테오도르는 촌장을, 그의 조상을, 이 마을을 비웃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 마을을 다 불태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레나티스가 싫어할 테니까. 지금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그런 것이 아니라며 편들 테니까.
“이 좁아터진 마을에도 사람들이 모일만한 장소는 있겠지? 마을 사람들을 전부 모아. 하나도 빠짐없이.”
“무, 무슨 일로……?”
테오도르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자리에서 반쯤 일어는 났지만,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눈빛인지라 촌장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의 썩어빠진 미신을 없애주겠어.”
테오도르의 눈빛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