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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143화 (143/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43

내가 내 의지대로 엘리자베스 3세를 뛰고, 걷고, 서게 만드는 데는 딱 3일이 걸렸다.

그리고 인스트는 그동안에 우리가 갈 경로를 정했고, 필요한 짐을 꾸렸다.

나 역시 온종일 엘리자베스를 타느라 얼얼한 엉덩이와 온몸에 힘을 줘서 약간의 근육통 있는 몸으로 틈틈이 내 짐을 꾸려야 했다.

이런 여행을 떠나는 것은 처음인지라 이것 역시 인스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드디어, 내일이네요.”

나는 고개를 돌려 테오도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침대에 모로 누운 테오도르는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제 와서 가지 말라고 해도, 너 말고 다른 사람을 보내겠다고 해도, 듣지 않겠지?”

“당연하죠.”

스기엔이 다른 사람과 함께 그 먼 곳을 갈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스기엔을 빼면, 의미가 없는 여행이 될 터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는 이전에도 어려운 계획을 성공시켰잖아요? 이번에도 잘 될 거예요.”

“알아. 하지만 그때는 이렇게 불안하지 않았어.”

테오도르가 내 손을 끌어당겨, 제 가슴 위에 놓았다.

“지금 절 유혹하시는 건가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네가 유혹되었다면 그런 걸로 하지. 어때?”

그 말 역시 유혹적이었다. 내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내 심장이 뛰는 게 느껴져?”

그의 말에 좀 더 내 손의 감촉에 집중했다. 단단한 가슴의 너머로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주 강하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불안하고, 두려운 듯이.

“24년을 너 없이 살았어. 하지만 지금은 너 없이는 24시간도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야.”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듯이 토해낸 테오도르의 고백은, 그의 단단한 가슴 근육보다 내게 더 유혹적이었다.

나 없이는 못 살겠다고 고백하는 이 사랑스러운 남자에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어디 맞추고 싶을 게 입만일까? 찡그린 눈가에도,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 저 입에도, 역시나 뿌리치긴 힘든 유혹인 저 단단한 가슴과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허리에도 전부 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다녀올게요.”

나는 그의 이마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댔다.

아쉬웠다. 하지만 다녀와서는 아쉽지 않기를 바랐다.

* * *

화창한 날이었다. 여행이나 모험을 떠나기에 좋을 날씨였다.

하지만 내 얼굴은 화창하지 못했다.

“어…….”

날씨 OK. 이동 수단 OK. 준비물 OK. 그리고 함께 떠날 일행……. 여기서 NG가 나고 말았다.

“테오도르 님이 왜 여기서 나와요?”

나는 매우 자연스럽게 자신의 말과 얹힌 짐을 체크하고 있는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아무리 내가 대공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여행길에서는 수행 받기란 어려울 테니, 내 짐은 내가 챙겨야 하지 않겠어?”

“그건 매우 옳으신 말씀이십니다만, 제 질문은 왜 짐을 챙기고 계시냐는 건데요?”

“나도 갈 테니까.”

“네?”

당황스러웠다. 어제 그렇게 애틋하게 이별 인사를 해놓고, 거의 둘 다 눈물 흘리기 직전까지 갔으면서, 같이 간다고요?

“아까도 말씀하셨듯, 테오도르 님은 카르오 대공이시잖아요? 그런데 이 여행은 그냥 발루텍스 산을 발 도장만 찍고 와도 열흘이 넘게 걸리는 길인데, 같이 가신다고요? 그렇게 오래 업무를 비우셔도 되나요?”

최근 일이 좀 줄긴 했지만, 그래도 할 일이 많은 테오도르였다.

“내 업무 대행이 잘 처리해 줄 거야.”

테오도르는 엄지만 내민 주먹으로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주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오르디가 서 있었다.

“일은 그렇다고 해도, 테오도르 님이 그렇게 오래 대공 가를 떠나 있어도 되나요?”

“그 역시 내 업무 대행이 잘 처리 할 거야.”

테오도르는 다시 엄지로 오르디를 가리켰다. 고개를 다시 돌려서 오르디를 보자, 이번에는 검은색 가발을 쓴 오르디가 보였다.

“그러니까, 오르디 님이 테오도르 님인 척한다는 건가요?”

“물론 자세히 보면 티가 나겠지만, 언뜻 보면 모를 거야. 2층 창문에서 본 모습이나,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옆모습 같은 건 괜찮을 거로 생각해. 카르오 대공이 수도를 떠났다는 소문만 나지 않으면 되니까.”

“들킬걸요?”

100% 들킬 게 분명했다. 검은 가발을 쓴 채, 거의 울 듯이 미소 짓고 있는 오드리 역시 내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 분명했다.

“오래는 못 가겠지. 그러니까 들키기 전에 돌아오던가, 들키고 나서 소동이 일어나기 전에 돌아와야 하겠지.”

테오도르는 훌쩍 말에 올랐다.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긴 다리로 말에 올라타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쳐다보고 말았다.

“그러니, 빨리 출발해야겠지?”

싱긋이 웃으며 테오도르는 외려 나를 재촉했다.

“아니,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나는 내 편을 들어주기를 바라며 인스트를 쳐다보았다. 인스트는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테오도르가 카르오 대공이었다. 이 저택 안에서 그의 의견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저택 밖의 황제쯤 돼야 테오도르에게 반대표를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어느새 인스트도 자신의 말에 올랐다.

“히힝!”

그리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는 듯이 엘리자베스 3세가 내 옆에서 울었다. 저 멀리에서 손톱만큼 보였던 해가, 어느새 반쯤 떠올라 있었다.

“레나티스.”

테오도르가 아직 엘리자베스의 고삐를 쥐고만 있는 나를 불렀다.

“내가 함께 가는 게 싫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히 싫지 않았다. 오히려 나야 테오도르와 함께 간다면 좋았다.

낯선 곳에 간다는 것은 사실 무서웠다. 테오도르의 말대로 무서운 산짐승이라도 만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기까지 갔는데 아무것도 발견해내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무섭고, 실망한 순간에 테오도르가 곁에 있다면, 분명 나는 괜찮으리라.

“함께 하자, 레나티스.”

* * *

“인간! 식사는 안 하는 거냐?”

우렁차게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내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방 안에서 나는 스기엔의 목소리였지만, 그 가방을 엘리자베스의 목 언저리에 매어두었다 보니 꼭 엘리자베스가 내는 목소리 같았다.

“슬슬 점심때이긴 하네요.”

인스트가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는 해를 보며 말했다.

“적당한 곳에서 대충 먹고 가도록 하죠.”

오늘로 길을 떠난 지 5일째였다. 이제 나는 인스트가 말하는 용어를 제법 알아듣게 되었다.

적당한 곳이란, 말을 매어둘 수 있으면서도 사람이 앉을만한 자리가 있는 곳을 뜻했다.

대충 먹자는 말은 불을 피우지 않고 가지고 있는 빵이나 육포, 그리고 아침에 먹고 남은 차 정도로 간단하게 먹고 바로 출발하자는 뜻이었다.

“어째서 이런 것만 먹는 거지?”

인간들은 별다른 불평불만이 없었건만, 슬라임은 아닌 모양이었다.

내 빵을 조금 떼어서 나눠주자 스기엔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몸통을 찌푸렸다가 더 맞는 말인가?

“이런 말라비틀어진 빵만 먹다가는 영양실조에 걸려서 쓰러지고 말 거야!”

“오늘만 참아 줘, 스기엔. 내일 오전에는 작은 마을에 도착할 테니까, 거기선 맛있는 걸 사줄게.”

“맛있는 거, 뭐?”

“음……. 네가 원하는 맛있는 과일?”

“정말이냐, 인간?”

“응!”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먹고 싶었다.

첫날에는 저택에서 싸 온 샌드위치와 과일 같은 것으로 맛있게 먹었지만, 부피와 보존의 이유로 계속 그런 것을 들고 다닐 수는 없었다.

중간에 마을에 하루 묵었던 날 외에는 빵이나 육포, 차 같은 것을 먹을 뿐이었다.

그나마 요리라고 부를만한 것은 저녁에 인스트가 재주를 부려 육포와 말린 버섯 같은 것을 넣은 야영식 수프를 끓여주는 것이 다였다.

“내일 도착하는 곳은 아주 작은 마을이야. 과일 같은 건 없을 수도 있어.”

“뭐?”

불쑥 끼어든 테오도르의 말에 스기엔의 눈이 커졌다.

“이제 한낮인데도 입김이 나올 기온이잖아. 우리는 지금 북쪽으로 가고 있으니, 내일 도착할 곳은 이것보다 더 추운 곳일 거야. 이 계절에 제대로 된 저장소도 없을 작은 마을에 과일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그럼, 그 마을 사람들은 과일을 안 먹어요?”

“이 계절에는 못 먹겠지. 당절임이나 말린 과일 같은 것은 있겠지만.”

“그럴 수가!”

테오도르의 말에 스기엔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안됐군.”

그리고 그런 스기엔을 보며 테오도르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정말 안됐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스기엔과 테오도르는 아직 사이가 별로인 듯했다.

“아쉽네요. 아삭아삭한 양상추를 넣은 샌드위치나 싱싱한 과일을 먹고 싶었는데…….”

“마을에 당도하면 양상추를 구해봐, 인스트.”

실망한 내가 중얼거리자, 테오도르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인스트에게 말했다.

“네? 제가요?”

육포를 뜯고 있다가 갑자기 지명을 받은 인스트는 그야말로 당황해서 되물었다.

“아까 싱싱한 채소나 과일을 찾기 어려울 거라고 하셨지 않나요?”

“하지만 레나티스가 먹고 싶다고 하잖아. 작은 마을이지만, 잘 찾아보면 과일이나 채소가 있을지도 모르지.”

마치 전국을 다 뒤져서 불로장생의 명약을 찾아오라는 폭군과 같은 자세로 테오도르는 말했다.

조금 전에 스기엔에게 말한 것과는 천양지차의 태도였다.

“어이, 하찮은 인간!”

“왜 그러지, 뇌 없는 몬스터?”

그리고 바야흐로 제2차 인간 VS 몬스터 대전이 시작될 분위기였다.

그사이에 낀 나는 머리가 아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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