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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142화 (142/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42

“저와 테오도르 님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광증을 가지고 태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레나티스.”

흔들리던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향해서 똑바로 고정되었을 때, 또다시 알았다. 내가 해왔던 고민을 테오도르도 이제 시작했다는 것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내 불찰이야.”

내가 솔직했듯, 테오도르 역시 솔직하게 말문을 텄다.

“그저 네가 좋았어. 너와의 시간이 너무 좋아서, 이런 적은 처음이라서, 내가 너무 서툴렀어.”

테오도르가 내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나도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네가 걱정하는 것은, 그 아이가 나처럼 괴로워하며 자랄까 봐 걱정이겠지. 아무리 우리가 그 아이를 사랑하고, 보호하며 키운다고 해도, 광증만을 어떻게 할 수 없을 테니까.”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동의했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내 손을 들어 올린 테오도르가 가볍게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저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나와의 미래를 꿈꾸고 있어 줘서, 정말로 고마워.”

조금 전에 입을 맞춘 나의 손등에 테오도르는 제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마치 성스러운 축복을 받는 것처럼.

“저는 카르오 가문의 저주를 풀고 싶어요.”

고개를 숙인 채, 테오도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테오도르 님의 곁에 있고 싶어요.”

그 말을 하는 순간, 갑자기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생전 처음 가져본, 나를 위한 진정한 소망이었다.

내일은 아버지가 기분이 좋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아니라, 오늘 저녁 먹을 것을 많이 발견해내야 굶지 않을 거라는 살기 위한 기대가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이루고 싶은 소망이기도 했다.

“나도 그래, 레나티스.”

테오도르가 고개를 들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아마 내 눈 역시 지금 그러리라 생각했다.

“너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

나를 껴안은 테오도르가 한 단어, 한 단어를 힘주어서 말했다. 저 중에서 무엇 하나도 빼놓을 수 없다는 듯이.

* * *

“으아아아아아!”

나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사정없이 바닥에 처박혔던 탓에 마른 잔디잎들이 따라 올라왔다가 하늘하늘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놈의 말시키!!”

나는 고개를 확 돌려 조금 전에 날 떨어뜨린 말을 노려보았다.

당연하겠지만 말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푸라락 거리며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어허, 우리 엘리자베스 3세에게 무슨 그런 교양 없는 발언을.”

내게 궁술에 이어서 승마를 가르쳐주고 있는 인스트마저 내가 아니라, 말의 편을 들었다.

“말 이름이 너무 과한 것 아닌가요? 거기다가 말 주제에 3세는 또 뭐예요?”

“이 아이의 할머니가 매우 명마였거든. 대대로 그 이름을 물려받고 있지.”

“그럼, 말 주제에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가진 말이 3마리째라는 거예요?”

“무슨 소리야? 엘리자베스 4세도 있어. 우리 엘리자베스 3세가 워낙에 미모가 출중해서 진작에 결혼했지.”

인스트는 아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엘리자베스 3세를 바라보았고, 엘리자베스 3세 역시 그윽한 눈으로 인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둘을 아주 아니꼽게 쳐다보았다.

“내가 오늘 안에 저 말을 못 타면, 제가 엘리자베스 5세로 개명하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나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지금 우리 리지에게 협박하는 거야?”

“리지는 또 누군데요? 쟤 손녀?”

“이 아이의 애칭이야. 엘리자베스 3세는 너무 기니까.”

“말 주제에…… 애칭도 있어요?”

“말 주제에 라니! 우리 엘리자베스 3세 들어!”

인스트는 엘리자베스 3세의 귀를 손을 소담스럽게 오므려서 막았다. 어째 인스트가 점점 개그 캐릭터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오늘 안에 타겠어요! 제가 쟤를 타지 못하면, 발루텍스 산으로 출발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랬다. 어찌어찌 테오도르의 허락을 받아 냈지만, 발루텍스는 바로 옆에 있는 뒷산이 아니었다.

수도에서 북쪽으로 말을 타고 일주일은 가야 도착할 거리에 있었다.

마차를 타고 간다면 더 오래 걸릴 뿐만이 아니라, 산길은 마차가 올라가지도 못할 게 뻔했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면, 말마저도 매어두고 걸어야 할 거라고 했고.

걸어서라면 내년 봄에나 도착할 거라는 인스트의 말에 나는 승마를 배워야만 했다.

내가 승마를 배우는 동안, 여정을 체크하고 짐을 꾸리면 될 거라고 했다.

“잘 좀 해보자? 어?”

문제는, 저 콧대 높은 엘리자베스 3세인지, 엘지라레스 3세인지 하는 말이 제 등에 날 태우려고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스트의 말에 따르면 자존심 센 엘리자베스가 초보자인 날 태우기 싫어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럼 다른 순한 말을 타면 되지 않겠냐고 누군가는 생각하겠지만, 명문가에 부자인 카르오 저택의 승마용 말들은 다들 엘리자베스 3세만큼 명마였고, 콧대가 높았다.

그렇다고 험한 산을 타야 할 수도 있는데, 승마 훈련되어 있지 않은 순한 마차용 말을 탈 수도 없었다.

“히이이잉~!”

이번에도 역시나 내가 제 등에 오르자마자, 엘리자베스는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앞발을 힘차게 들었다.

내가 5번째와 8번째, 그리고 12번째 떨어졌을 때와 같은 패턴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떨어질 수 없었다.

“이익!”

나는 고삐를 단단히 쥐고, 동시에 발에 힘을 줘서 엘리자베스의 옆구리를 불편하리만큼 꽉 눌렀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까지는 얼마만큼 세게 해도 엘리자베스가 괜찮을는지 알 수 없어서 살살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약 18번 떨어져 본 결과, 말이라는 동물은 내 생각보다 꽤 튼튼했다.

“히잉!!”

제 맘대로 내가 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가 발로 제 옆구리를 강하게 누르자, 엘리자베스는 당황했는지 이번에는 뒷발을 하늘 높이 쳐들었다.

‘질 수 없지!’

재빨리 손에서 말 고삐를 한 바퀴 돌려 더욱 바싹 잡으며, 동시에 내 쪽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엘리자베스의 머리가 내 쪽으로 딸려오는 것이 느껴지고, 동시에 올라갔던 뒷다리가 아래로 내려왔다

‘미안하지만, 나는 꼭 널 타고 가야겠어!’

내가 너무 세게 잡아당겨서 엘리자베스가 아프지는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좀 더 단단히 손에 힘을 줬다. 엘리자베스의 머리가 단단히 고정되어 제 의지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푸흐흐!”

불편한지, 엘리자베스의 입에서 침을 뱉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앞발이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몇 번이나 위로 떴다가 바닥을 내디뎠다.

“제발 가만히 있어 줘!”

다시 들썩이려는 엘리자베스의 궁둥이에 나는 손에 힘을 꽉 주며 부탁했다.

“푸흐흐흐!”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엘리자베스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하늘 높이 쳐들 것 같던 앞발을 가만히 바닥에 내려 두었다.

“된 거 같은데?”

옆에 서 있던 인스트가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게 드디어 엘리자베스를 탄 나에게 보내는 것인지, 초보자에게 제 등을 내어준 엘리자베스를 기특해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가? 된 건가?

18번이나 떨어졌던 터라 그 말이 미심쩍긴 했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꽉 잡고 있던 고삐를 조금 느슨하게 풀어보았다.

“…….”

엘리자베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살짝 발을 차 봐. 신호를 주는 정도로.”

인스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랴!”

그의 말대로 발에 힘을 빼고 살짝 엘리자베스를 찼다.

“어어?”

그러자 엘리자베스가 움직였다. 이전처럼 앞발을 높이 든다거나, 마구 몸부림을 쳐서 나를 떨어뜨리려는 움직임이 아니라, 그저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되, 된 건가요?”

나는 고개를 돌려 인스트를 쳐다보았다.

“그래. 이제 엘리자베스가 네가 타는 것을 허락한 모양이야.”

참으로 착한 아이라는 듯, 인스트는 엘리자베스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이제 달리는 법을 좀 익히고, 서는 법도 좀 배우면, 출발할 수 있겠어.”

“저, 정말요? 언제요?”

“너와 엘리자베스 하기에 달렸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다졌다.

“아, 참. 여기에 커다란 바구니 같은 걸 달아도 엘리자베스가 불편해하지 않을까요?”

“바구니? 바구니를 왜?”

“스기엔을 태우려고요. 아무래도 스기엔은 저와 함께 타는 걸 원할 것 같아서요. 안장에 함께 앉아가기는 무리일 테니까, 바구니 같은 것을 달아서 태우면 어떨까 해서요.”

인스트는 발루텍스 산으로 함께 갈 예정이기에 당연히 스기엔이 우리의 일행이 된다는 것을 말해두었다.

출발 전에 인사도 시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바구니는 마찰 때문에 엘리자베스가 불편해할 것 같고, 가방 같은 안장이나 목에 달 수 있게 해보지. 대충 사람 머리만 하다고 했나? 그 슬라임이란 것?”

“네. 하지만 스기엔에게 너무 좁으면 안 되니까, 사이즈는 조금 여유가 있으면 좋겠어요.”

“일단은 알겠어.”

인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다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테오도르 님에게 대충 내용은 듣긴 했는데, 네가 말한 건 너무…… 비현실적인 것 같은데. 거기다가 아무리 우연은 없다지만, 그 슬라임이라는 것과 카르오 대공 가의 저주도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고.”

살짝 이마를 긁으며 인스트가 말했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천천히 엘리자베스를 인스트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걷게 만들며 나는 대답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보고 싶어요. 조금의 실마리라도 된다면, 약간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전부 시도해보고 싶어요.”

테오도르를 위해서라면, 나는 그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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