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40
방금 그 이야기를 들었냐고 묻기 위해서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물을 필요도 없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말해놓긴 했지만, 혹시나 누가 들어올까 싶어서 입구 참에 서 있던 테오도르의 눈은 이미 커져 있었고, 내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스기엔,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말하는 게 들릴 만큼 테오도르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스기엔에게 물었다.
다시 드라고니아의 초상화에 눈이 가있었던 스기엔은 내 목소리에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혹은 과거를 떠올리는 듯, 스기엔의 눈동자는 아직도 몽롱해 보였다.
“뭐가?”
“방금 네가 한 말. 드라고니아 대공이 네 반쪽이라는 말.”
“드라고니아 대공? 그게 누군데?”
“이 사람 말이야.”
나는 손가락으로 초상화를 가리켰다.
“아아…….”
스기엔이 내 손끝의 드라고니아 드 카르오를 바라보았다.
여기 오기 전에 드라고니아라는 인간은 모른다고 하더니, 어쩌면 이름은 모르는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니면, 스기엔은 그를 다른 이름으로 알고 있던가.
테오도르가 말했듯, 드라고니아라는 이름은 가명일 수도 있었다.
“이 사람이 네 반쪽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야?”
“몰라.”
“뭐?”
“기억나지 않아.”
스기엔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이 슬라임아! 조금 전에는 천년의 사랑을 만난 것처럼 몽롱한 눈을 하고 자기 반쪽이라는 이야기를 해놓고선, 기억이 안 난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기억이 나지 않으면, 이 사람이 네 반쪽이라는 것은 어떻게 아는데?”
“그건 기억이 나니까.”
“…….”
어이없지만, 확실한 대답에 나는 그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
“역시 뇌가 없어서 기억력이 엉망인 모양이군.”
테오도르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어느새 바로 옆에 선 그가 스기엔을 보며 중얼거렸다.
“뇌가 없긴 누가 뇌가 없어!”
“누구라니? 여기 뇌가 없는 생명체는 하나뿐인데.”
“이런 멍청한 인간을 봤나! 뇌가 없으면 어떻게 생각을 해?”
“뇌가 있는 거야?”
“당연하지!”
“어디에?”
테오도르의 물음은 매우 합당했다. 반투명한 스기엔의 몸 안에는 뇌라고 추정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긴 어디야? 내 머리에 있지!”
그러니까…… 어디가 머리인데? 너는 머리밖에 없잖아. 아니면 몸밖에 없던가.
“머리가 어딘데?”
나는 차마 하지 못한 질문을 테오도르는 툭 내뱉었다. 내가 그 질문을 왜 하지 못 했냐고 하면…….
“뭐? 어딜 보나 여기가 머리잖아! 그게 무슨 무례한 질문이야? 아무리 하찮은 인간이라 지식이 없다지만!”
이렇게 스기엔이 화를 내기 때문이었다. 스기엔의 신체에 관한 질문은 금기나 다름없었다.
“하찮은 인간의 머리는 이렇게 분명하게 구분이 되게 달려 있는데, 귀하신 슬라임의 머리는 당최…….”
테오도르의 눈이 스기엔의 몸을 훑었다. 솔직히 그리 길게 훑을 것도 없었다. 스기엔의 몸은 동그랗고, 짜리몽땅했다.
“미물인 곤충도 머리, 가슴, 배로 분명하게 구분되는데 말이지.”
“뭐라고?”
“아, 눈사람도 머리만은 정확하게 구분이 되지.”
“눈사람? 지금 감히 이 위대하신 고위 마족 님을 그따위 얼음덩어리와 비교하는 건가?”
테오도르의 중얼거림에 스기엔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어째 인간 vs 슬라임의 싸움이 과열되는 분위기였다.
스기엔은 이제 핑크 슬라임이 아니라 레드 슬라임이 되기 직전이었고, 테오도르는 별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계속 이죽거리는 것이 자신에게 빽빽 소리를 지르는 스기엔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하찮은 미물 주제에 고개를 빳빳하게 드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어. 네 놈의 주제에 어울리게 바닥에서 꿈틀대게 만들어 줄까?”
“과연. 빳빳이 들 고개가 없는 처지에서는 그게 부러울 수가 있겠군. 들 목이 없으니까 말이야.”
“이 인간이!”
“이 몬스터가?”
“두 사람 다, 아니, 두 생물 다 그만 하세요.”
나는 재빨리 두 생물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싸울 것 같아서였다.
이미 싸운 것이나 다름없는 감정 상태이겠지만, 적어도 육체적 충돌은 아직이니 지금 멈춰야 했다.
“지금은 서로 싸울 때가 아니에요. 힘을 합쳐야죠.”
“왜?”
“응?”
“내가 왜 이 재수 없는 인간이랑 힘을 합쳐야 하지?”
“그야 스기엔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지.”
“내가 무슨 비밀이 있는데?”
스기엔은 자신은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다는 듯이 당당한 태도로 물었다. 네 존재 자체가 비밀이라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저기 있잖아, 스기엔. 스기엔은 늘 자기가 고위 마족이라고 하잖아?”
“그렇지.”
“왜 그런 거야?”
“왜라니? 고위 마족이라서 고위 마족이라고 하는데, 왜 고위 마족이냐고 하면, 내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지?”
“마족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고위 마족이라면 엄청 높고, 대단한 거잖아? 하지만 스기엔은…… 물론, 엄청 대단하게 귀엽긴 하지만, 마족적으로 엄청나고 대단해 보이지는 않잖아.”
“마족적으로 대단하다는 게 뭔데? 난 뭐든 다 할 수 있어!”
“그럼 날 수 있어?”
“왜 날아야 하지?”
“그럼 마력으로 뭘 막 부순다거나?”
“…….”
“마법진 같은 것을 그려서 악마를 소환한다거나?”
“…….”
“막 사람을 꼬셔서 정기를 빨아 먹는다거나, 계약해서 목숨을 빼앗는다거나?”
내가 아는 마족이 하는 일을 늘어놔 보았지만, 스기엔의 입에서는 시원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외려 테오도르와 입씨름을 할 때와는 달리 굳게 닫혀있기만 할 뿐이었다.
당연했다. 스기엔은 사람의 정기나 목숨을 먹는 것이 아니라 달콤한 과일을 좋아하는 무해한 슬라임이었다.
“혹시 말이야, 스기엔이 엔기스가 아니었을까? 아주 아주 옛날에 말이야.”
“이 슬라임이 그 악룡 엔기스였다고?”
옆에 있던 테오도르가 불쑥 끼어들었다. 테오도르는 당사자인 스기엔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추측이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대공 가의 후계자로 주입식 교육을 받은 테오도르는 스기엔=하찮음, 엔기스= 엄청남이라는 공식을 깨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제 생각에는요.”
하지만 배운 게 별로 없는 나의 유연한 사고방식으로 추측한 바로는 그랬다.
물론, 이 세계가 전생에서 읽은 책의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유 없는 설정은 없었고, 쓸데없는 디테일은 많았다. 나는 스기엔의 존재 역시 이유는 있지만, 쓸데는 없었던, 작가의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용 같은 건 세상에 없어. 악룡 엔기스는 그저 전설일 뿐이야.”
“하지만 슬라임이 여기에 있잖아요. 슬라임이라는 몬스터가 있다면, 용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가 슬라임이야! 고위 마족이라니까!”
스기엔의 외침에 나는 테오도르에게 보란 듯이 눈썹을 위로 올렸다.
저렇게 자신이 고위 마족이라고 주장하는 몬스터가 당당하게 존재한다고.
“좋아. 있다고 쳐. 용이 존재하고, 전설 속의 악룡 엔기스가 존재한다고 쳐. 하지만 그 악룡이 어떻게 이 몰골이 되는 거지?”
“그 부분에서 초대 카르오 대공이 등장하는 거예요. 애초에 초대 황제가 발루텍스 산에 간 이유가 뭐였죠?”
“악룡 엔기스를 잡아서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명성을 얻기 위해서…….”
테오도르는 대답을 하다 말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대답 대신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깨달은 듯했다.
“지나친 비약이야.”
“맞아요. 지나친 비약이죠. 하지만 드래곤이 들어간 이름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오래된 보물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렇게 엄청난 비약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거기다가 테오도르 님도 말씀하셨잖아요. 테오도르 님의 선조가 아주 뛰어난, 마치 악마와 같은 지략을 가진 사람이었다고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테오도르는 여전히 내 가정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드라고니아 드 카르오가 선수를 친 거예요. 그가 초대 황제보다 먼저, 악룡 엔기스를 잡은 거죠. 그것을 기리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에 드래곤을 넣었고, 드래곤의 보물로 엄청난 부자도 된 거예요!”
“카르오 가문이 드래곤의 유산 위에 세워진 가문이라는 건가?”
“어쩌면요.”
“좋아. 다 그렇다고 치자고. 어차피 가정이니까.”
테오도르는 매우 너그럽게 이해한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아직도 전설의 악룡이 이 몰골인 것은 설명이 되지 않아.”
테오도르가 말한 몰골은 물론, 스기엔이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악룡이 처지 당하고 마력을 잃어버려서 변한 것이 아닐까요?”
“마력을 잃었다고 쳐도, 용이 갑자기 이런 액체 덩어리가 된다는 건 말이 안 돼. 하다못해 도마뱀이 된 거라면 차라리 이해되겠어.”
“아니면, 엔기스의 부하였을 수도 있죠. 최측근요.”
“누가 부하라는 거야!”
이제껏 잠자코 있었던 스기엔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제까지 조용했다가 지금 소리를 치는 걸 봐선 자신이 전설의 용이라는 가정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왜 스기엔이 초대 카르오 대공을 자신의 반쪽이라고 부르는 거지?”
“그건…….”
“네 가정이 옳다면, 스기엔은 그를 자신의 반쪽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원수라고 불러야겠지. 자신을 처치한 원수. 혹은, 자신이 섬기던 악룡을 처치한 원수.”
테오도르의 말이 옳았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순순히 자백했다. 나의 어설픈 추론은 그야말로 어설퍼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러니까 알아보러 가야겠어요.”
“뭐? 어딜 간다는 거지?”
“발루텍스 산이요.”
“레나티스!”
“당장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