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39
고개를 들어 테오도르를 쳐다보자, 그는 왜 그러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왜?”
“뭔가 연관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무슨 연관?”
“스기엔과 초대 카르오 대공요!”
나는 뭔가 중요한 것을 발견해낸 사람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랬다. 뭔가 중요한 것을 발견해낸 것 같았다.
“보세요. 일단 스기엔의 이름은 발루텍스 산에서 산다고 알려진 악룡 엔기스의 이름을 거꾸로 한 거랑 똑같잖아요. 그리고 스기엔도 원래 여기 카르오 저택에 오기 전에 산에서 살았다고 했었어요.
그리고 스기엔은 옛날이야기를 물었을 때,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안 난다고 했었어요. 지금은 제국력 475년이죠. 거의 500년 전이라면, 확실히 아주 옛날이죠.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게 정상일 만큼요.”
지난번에 스기엔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을 때, 스기엔은 분명히 그렇게 대답했었다.
당시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질문과 대답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거기다가 스기엔은 항상 자신이 고위 마족이라고 말해요. 제가 보기에는 그냥 귀엽고, 하찮은 슬라임인데 말이에요. 그리고 사람들이 악룡이라고 부를 정도의 드래곤인 엔기스와 이름이 드라고니아인 초대 카르오 대공.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셋이 뭔가 연관이 있어 보이지 않나요?”
나는 동의를 구하는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크게 내 의견에 동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무시하거나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다.
“슬라임과 악룡의 이름에 연관성이 있고, 초대 카르오 대공의 이름에 드래곤과 비슷한 철자가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다는 건가?”
“네.”
“이름은 보통 어떤 단어나 다른 사람의 이름에서 따오기 마련이지. 가령 내 이름 테오도르는 공포라는 고대어의 어원을 가지고 있어. 아마도 내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내가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 모양이야.”
“갓 태어난 아기에게 공포라는 이름을 붙인다고요? 대체 천사 같은 아기에게 누가 그런 이름을 붙이는 거죠?”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나라면 아기에겐 기쁨이나, 행복 같은 사랑스러운 이름을 붙일 텐데.
“당연히 내 이름을 지은 사람은 내 아버지지.”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음과 동시에 납득해버렸다.
니제르 드 카르오 대공이라면 자기 아들에게 그런 이름을 붙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뭐, 뜻은 그렇지만, 멋있어 보이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테오도르 님과 썩 어울리고요.”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지만, 이십여 년이 지나 무럭무럭 자라나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넓은 어깨, 검은 머리카락과 신비한 보라색 눈동자, 거기다가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테오도르에게는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어쨌든, 이름은 그렇게 새로운 무언가에서 창조하는 법은 잘 없어. 네가 아까 말했듯 스기엔의 부모님이, 그러니까 스기엔에게 부모님이 있다면, 그리고 그 이름을 그의 부모님이 지은 것이라면, 유명한 악룡처럼 훌륭한 몬스터가 되라는 마음에서 지은 것일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긴 하죠.”
사실, 그럴 가능성이 더 크긴 했다.
“마찬가지로 초대 카르오 대공, 그러니까 드라고니아 역시 자신을 위대한 존재에 빗대고 싶어서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일 수도 있어. 만남의 장소가 하필 그 발루텍스 산이었으니까. 그 이전에 알려진 사실이 그렇게 없는 사람이니 그의 진짜 이름이 그것인지, 자신이 스스로 지은 가명인지도 알아낼 방도는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죠.”
테오도르의 이 말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서로 연관되어 있지 않나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내 이론을 포기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아주 가느다란 고리였다.
거기다가 거의 추측뿐이고, 느낌일 뿐이긴 했지만, 처음 잡은 단서이기도 했다. 나는 결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혹시 초대 카르오 대공의 초상화가 여기에 있나요?”
“당연히 있지. 그것도 응접실에 아주 크게. 굉장히 오래된 데다가 당대 최고의 화가가 그리고 보석으로 장식된 액자에 걸려 있어서 카르오 가문의 보물인 초상화거든.”
“그걸 볼 수 있겠죠?”
“당연하지.”
테오도르는 당장 가자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뇨. 저 말고 스기엔이요.”
* * *
“아, 모른다니깐!”
나는 스기엔에게 혹시 발루텍스 산을 아느냐고, 드라고니아라는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그럼, 나랑 같이 가서 그림 하나만 볼래?”
“내가 가서 볼 것 같아?”
“아니…….”
“그럼 왜 물어봐?”
“하지만 이게 있다면?”
나는 오늘 아침에 나왔던 크림치즈 베이글을 꺼내들었다.
그걸 보고, 그리고 킁킁 냄새를 맡은 스기엔은 슬쩍 관심을 보이는 듯 했지만, 홀라당 넘어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것도 있다면?”
나는 다른 손으로 블루베리 잼을 꺼내 들었다.
이 잼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신선한 블루베리에 아주 소량의 설탕을 넣고, 물 한 방울 넣지 않고, 오로지 정성으로 3천 번 저어서 만든 블루베리 잼이었다.
물론, 나 말고 주방에서 일하는 누군가.
확실히 스기엔은 반응했다.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콧구멍이 더욱 커지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림 보러 갈래?”
“…….”
스기엔은 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대체 무슨 그림인데 그래?”
“보면 알지~.”
라고 말하며 나는 무릎담요를 펼쳐 보였다.
“그건 뭐야?”
“음…….”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테오도르가 응접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말은 해둔 상태였지만, 가는 길까지 모든 고용인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가 본채는 별채보다 사람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응접실까지 내가 스기엔을 숨겨서 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스기엔은 이 세계에 없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 이유를 스기엔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넌 이 세계에 없는 존재인지라, 사람들이 보면 깜짝 놀랄 테니까 몰래 가야 한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게 스기엔은 위대하신 고위 마족이잖아?”
“그렇지.”
“그런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하찮은 인간이잖아?”
“당연하지.”
“하찮은 인간이 갑자기 복도에서 위대한 고위 마족을 만나면 어떻게 되겠어?”
“당장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지.”
이건 왕자병도 아니고, 마족병이라고 해야 하나? 대체 어디까지 자신의 위치를 높일 수가 있는 걸까?
“어쩌면 그래야겠지만, 하찮은 인간은 갑자기 위대한 존재를 만나게 되면 너무 깜짝 놀라게 될 거야. 그럼 막 소리를 지른다거나, 호들갑을 떨지도 몰라.”
나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하지만 선의의 거짓말은 통하지 않았다. 스기엔은 그게 뭐 어떻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어쩌면, 너무 놀라서 오줌을 지릴지도?”
“윽! 더러워.”
“아주 어쩌면 똥도…….”
“블루베리 맛 떨어지게 자꾸 더러운 이야기 할래?”
결국, 스기엔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조용히, 은밀하게,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어?”
나는 손에 든 담요를 나름대로 유혹적으로 흔들며 말했다. 스기엔은 똥 씹은 표정을 하고 그 담요를 향해서 폴짝 뛰어올랐다.
“조금 갑갑하겠지만 참아.”
재빨리 담요를 덮으며 말했다.
안에서 투덜거리는 스기엔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못 들은 척을 하고 얼른 테오도르가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향했다.
* * *
“…….”
내 품에 안긴 채, 스기엔은 멍한 표정으로 초상화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그 초상화는 초대 카르오 대공인, 드라고니아의 초상화였다.
그리고 나 역시 스기엔과 함께 그 그림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테오도르와 닮아 있었다.
눈은 테오도르보다 더 작은데다가 살짝 찢어져 있었고, 살짝 턱을 치켜들고 그림임에도 사람을 내려다보는 모양새는 어딘지 모르게 오만해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 때문인지, 혹은 테오도르의 조상님이라서 그런지, 이목구비는 달랐지만, 뭔가 테오도르와 공통으로 느껴지는 느낌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내려 이번에는 스기엔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스기엔은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아무 말이 없었지만, 나는 스기엔이 뭔가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오래 쳐다보고 있지 않았을 테니까.
평소라면 하찮은 인간의 그림 따위를 왜 자기에게 보라고 했냐며, 혹은 감히 고위 마족이신 자신을 담요에 싸서 온 게 고작 여기냐며, 다 봤으니 당장 간식을 내놓으라고 벌써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을 스기엔이었다.
하지만 벌써 몇 분째, 스기엔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드라고니아의 초상화를 보고 있었다.
“저기, 스기엔?”
이 시간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조심스럽게 스기엔을 불렀다.
초상화에 고정되어 있던 스기엔의 눈동자가 또르르 위로 올라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알겠어?”
“응.”
역시!
“이 사람이…… 누군데?”
지나가면서 봤어. 라던가, 하찮은 인간. 같은 대답이 아니길 바라며 나는 물었다.
“이미 죽어버린, 나의 반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