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38
따사로운 오후였다.
급한 일은 얼추 다 처리했다는 테오도르의 말은 사실인 듯, 이제는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지는 않았다.
제법 정상적으로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만 일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집무실에서 각자의 할 일을 하는 동안 손을 놓지는 않았다.
여느 때처럼 테오도르는 서류를, 나는 서재에서 가져온 책을 살피던 중이었다.
“어?”
막 시작한 책의 앞 페이지를 본 순간, 내 입에서 저절로 놀란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왜 그래?”
내 목소리에 테오도르는 보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나를 쳐다보았다.
“여기에 나온 이름 때문에요.”
“이름?”
“네. 지금 보는 책은 제국의 건국 신화 이야기인데요. 뭔가 이게 가능해? 뻥 아니야? 싶긴 하지만, 그럭저럭 재밌게 읽던 중이거든요.”
초대 황제가 태어나자마자 걷고, 3살에 말을 타고, 9살에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였지만, 그런 뻥 덕분에 재밌게 읽던 중이었다.
“아, 그 책. 나도 읽었어. 10%의 사실을 기반으로 한 90%의 허구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애초에 신화라고 제목을 지은 것 자체가 초대 황제를 신격화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책이니까 말이야.”
테오도르의 말에 대체 이 집에서 그가 읽지 않은 책은 뭘까 생각했다.
별채의 책만 다 읽은 것이 아니라, 본채의 서재까지 다 섭렵한 모양이었다.
“지금 성인이 된 초대 황제가 명성을 얻기 위해서 악룡을 무찌르러 가려는 참이거든요?”
“애초에 그 에피소드 자체가 허구겠지. 세상에 용이 어디 있겠어?”
테오도르는 클레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 용이 어디 있느냐고.
“그런데 여기 그 용의 이름이 나와요.”
나는 책을 펴서 테오도르에게 보여주었다.
“알아. 악룡 엔기스. 발루텍스 산 근처의 전설에서는 빠지지 않고 나오는 존재지.”
책을 보지도 않고, 테오도르는 말했다.
“네. 맞아요. 그런데 그 악룡의 이름 말이에요.”
나는 테오도르에게 한번 보라는 듯, 좀 더 책을 그의 쪽으로 내밀었다.
“뭔가 익숙하지 않나요?”
내 말에 테오도르는 그제야 책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테오도르는 내가 본 뭔가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엔기스를 거꾸로 하면 스기엔이잖아요.”
“아…….”
내 말에 그제야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죠?”
“……그렇군.”
테오도르의 대답이 한 템포 느렸다. 그는 그게 별로 신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드디어 뭔가 스기엔과 아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걸 찾은 것 같아서 신기했는데 말이다.
“별로 안 신기하신가 봐요.”
“아니. 그것보다는 처음에 스기엔의 이름을 들었을 때 뭔가 기시감이 느껴졌었거든. 그게 바로 이것 때문인가 해서.”
“아, 맞아. 그때 뭔가 익숙한 느낌이라고 하셨죠? 그런데 주변에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은 없다고.”
“맞아.”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글에 적혀 있는 악룡의 이름을 보았다.
“스기엔이 만날 자기는 고위 마족이니, 뭐니 했는데, 어쩌면 이 이름을 어디선가 듣고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니면, 처음부터 스기엔의 부모님이 훌륭한 슬라임이 되라고 유명한 몬스터의 이름을 따서 지었던가요.”
“스기엔에게 부모님이…… 있나?”
“아, 없다고 했나?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모른다고 했던 것 같네요. 고향도 모르겠고, 이곳에 살기 전에 무슨 산에서 살았다고 했는데, 무슨 산인지도 모르겠다고 했고요.”
“그래? 뇌가 없어서 기억력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건가?”
스기엔이 들었으면, 분명 펄펄 뛰었을 소리를 테오도르는 아무렇지 않게 했다.
“좀 더 읽어봐야겠네요. 어쩌면 슬라임이 나올지도 몰라요. 용의 부하 같은 것으로!”
“아쉽지만, 그렇지는 않아.”
아까보다 더 전투적인 자세로 책을 읽으려는 나에게 테오도르는 매우 안타깝다는 말투로 조언했다.
“그리고 기대하는 것 같아서 말하는데, 용도 나오지 않아.”
“에엑? 정말로요?”
테오도르의 말에 높이 쌓여 있던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드디어 뭔가 실마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스기엔 이름의 출처라도 밝혀냈다고 말이다.
그런데 슬라임도, 용도 나오지 않는다니!
“말했잖아. 용은 존재하지 않고, 그 책은 90%의 허구로 이루어진 글이라고. 적어도 10%의 사실을 기반으로 하긴 하니까, 존재감 0%의 용으로 글을 쓸 수는 없지.”
“그럼 이 뒤에 뭐가 나오는데요? 여기 챕터에는 분명히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쓰여있고, 아직 페이지가 이만큼이나 남아 있는데요?”
“카르오 대공.”
“네?”
네가 왜 거기서 나오세요?
뜻밖의 이름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으로 테오도르를 가리켰다.
“아니. 나 말고.”
그의 대답에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내 목을 싹둑 하는 손짓을 보여주었다.
“그 카르오 대공도 말고. 아, 뭐, 이미 죽긴 했지.”
내가 말한 사람은 테오도르의 아버지인 카르오 대공 이야기였지만, 그의 말대로 현 카르오 대공인 테오도르 외의 카르오 대공은 전부 죽은 사람이긴 했다.
“뒤에 나올 사람은 초대 카르오 대공이야. 발루텍스 산에서 초대 황제와 초대 카르오 대공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니까, 그 챕터의 소제목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
“그…… 혹시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게…… 서로 첫눈에 반하게 되는…… 그런 내용인가요? 저자는 살아 있나요?”
19금 피폐물이라면 열심히 보았던 ‘전생의 나’덕분에 그쪽에 대한 지식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그리고 현생의 나도 편견은 없었다.
다만, 한 제국의 초대 황제와 그 제국의 제일 권력 가문인 초대 대공의 야한 오빠 이야기가 과연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었다.
더불어 그런 이야기를 쓴 사람의 목이 과연 아직 붙어 있는지도.
“응? 저자야 당연히 이미 죽었지.”
역시……. 목숨과 예술혼을 바꾼 저자를 위해 묵념을.
“나온 지 120년이나 된 책이니, 저자는 당연히 죽었겠지.”
아, 그런 거였나? 어쩐지 책이 좀 누리끼리하더라니.
“그리고 첫눈에 반했다는 건……. 그래, 두 사람의 만남은 어쩌면 그런 느낌일지도 모르겠군.”
역시! 그런 내용이었어! 시류를 앞서 나가는 저자였어!
“당시 초대 황제는 그야말로 유명해지고 싶다는 패기만 있는 젊은 풋내기 기사에 불과했지. 그래서 존재하는지도 정확하지 않은 악룡을 물리쳐서 명성을 얻고자 했고.
그런데 막대한 자산과 그야말로 악마 같은 지략을 가진 초대 카르오 대공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게 되면서, 자신의 군대를 이끌게 되지.
그 군대로 크고 작은 전투에 이기게 되면서, 마침내 그가 그토록 바라던 명성을 얻게 돼.
그리고 그 명성과 군대로 부패한 왕국에 반기를 들어 마침내 황제가 되었지.”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나는 20년을 이 나라에 살면서도, 건국에 그런 역사가 있는지 미처 몰랐었다.
카르오 대공 가가 개국공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막대한 공이 있는지도 몰랐고.
“카르오 가문이 대단한 가문이었군요.”
“그렇다기보다는 초대 카르오 대공이 대단한 거지. 심지어 초대 황제와 만나기 이전의 과거는 완벽히 베일에 싸여 있어. 그의 막대한 자금의 출처에 대해서도, 어디서 태어나고, 자랐는지 아는 사람도 없어.”
“이렇게 유명한 사람인데, 그게 전혀 알려지지 않을 수 있나요? 만약에 우리 마을 출신이라면, 나같이 입이 싼 애는 틀림없이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을 텐데?”
“그래서 초대 카르오 대공이 이민족 출신이라는 설도 있어. 혹은 숨겨진 보물을 찾아낸 노예 출신이라는 설도 있고. 모든 것이 베일이 쌓인 인물이라는 건, 사실은 그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는 거야. 대단한 카르오 가문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사실은 이민족 노예의 가문일 수도 있다는 거지.”
만약 테오도르가 이민족 노예라면 다들 돈을 싸 들고 와서 서로 사겠다고 난리가 날 것 같은데? 그리고 나도 있는 재산을 다 모아서 갈 거다! …… 몇 푼 안 되겠지만.
“숨겨진 보물을 찾아냈다는 건, 초대 카르오 대공이 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가요?”
“비슷해. 그가 초대 황제에게 지원해준 자금력이라는 게, 거의 오래된 금화나 보석 같은 것이라고 들었거든. 마치 동굴에서 몇백 년이나 묵은 것 같은 오래된 보물 같은 느낌말이야. 그래서 그의 정체가 더욱 신비하게 느껴지는 거지.”
어느 날 갑자기 오래된 보물을 가지고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라면 그렇게 느껴질 법도 했다.
“어떻게 보면 서로 윈윈인 셈이야. 초대 황제는 초대 카르오 대공의 지원으로 황제가 되었고, 초대 카르오 대공 역시 초대 황제가 아니었더라면 카르오라는 이름을 인정받지 못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정말 운명적인 만남이긴 하네요. 서로의 인생을 바꿔준 사람을 만난 셈이니까요.”
나는 새삼스럽게 책을 다시 쳐다보았다. 초대 황제는 이제 막 발루텍스 산의 초입에 발을 디뎠을 뿐이었다.
그는 이때 알았을까? 자신의 인생을 바꿀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아! 그런데 초대 카르오 대공의 이름은 뭐예요?”
초대 황제의 이름인 이니티에의 이름을 보며, 나는 아직 초대 카르오 대공의 이름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드라고니아 드 카르오.”
테오도르의 입에서 초대 카르오 대공의 이름이 나온 순간, 갑자기 내 팔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