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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136화 (136/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36

조심스럽게 테오도르의 바지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레나티스.”

내 위에서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막 시작하려는 순간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맑고 산뜻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자, 목소리만큼이나 산뜻한 표정의 테오도르가 보였다.

욕정 어린 눈이라거나, 음욕에 젖은 탁한 목소리 따위는 그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손이 떨고 있어.”

테오도르의 말에 놀라서 얼른 고개를 돌려 내 손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이 옳았다. 테오도르의 바지 단추를 잡은 내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어? 이거 왜 이렇지?”

당황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웃음소리가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테오도르가 웃고 있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

테오도르는 아직도 떨고 있는 내 손을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감쌌다. 그제야 떨림이 멈췄다.

“하, 하지만…….”

“물론, 난 하고 싶어. 널 만지고 싶고, 안고 싶어.”

아주 잠깐, 그리고 아주 살짝, 테오도르의 눈동자에서 욕망이 비쳤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테오도르는 이내 다시 더없이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난 이렇게 널 만지는 것도 좋고.”

테오도르는 엄지로 내 손등을 슬쩍 문질렀다. 그러다 빙긋 웃더니 손을 잡은 채 잡아당겼다.

엉거주춤 일어난 나는 테오도르를 올려다보다가, 어느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안는 것도 좋아.”

그는 다른 한 손으로 내 허리를 잡고, 슬쩍 자신을 향해서 당겼다. 내 배에 제 뺨을 댄 체, 테오도르는 잠시 내게 기대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내가 가만히 테오도르의 등을 감싸 안으려는 찰나였다.

“그리고.”

테오도르가 제 몸을 떼어냈다. 나를 올려다보며, 여전히 잡고 있던 내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촉-.

가볍게 내 손등에 테오도르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렇게 키스하는 것도 좋아.”

눈을 맞추며, 테오도르는 웃었다.

“난 너와 함께라면 그 무엇이라도 좋아.”

* * *

“어떻게 생각해, 스기엔?”

“뭐가?”

“아이, 참! 내가 테오도르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없을까?”

“응. 없어. 몰라.”

만약 슬라임에게 귀와 손이 있었다면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비적거리며 말했을 것 같은 말투로 스기엔이 말했다.

아, 생각해보니 내 말을 다 듣는 것 보면 귀는 있을 것 같은데…… 대체 어디가 귀인 거지?

“너무한 거 아니야? 테오도르가 이렇게 매일 맛있는 걸 주는데?”

나는 조금 전까지 스기엔이 먹던 과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테오도르가 스기엔의 존재를 알게 되어서, 나는 이제 식사 때 스기엔이 좋아할 것 같은 것이 나오면 몰래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챙길 수 있게 되었다.

테오도르는 따로 스기엔이 먹을 것을 챙겨주겠다고 했지만, 카르오 대공이 된 테오도르의 식사는 우리 2명이 아니라 20명쯤 먹어도 될 만큼 푸짐하게 나왔기 때문에 스기엔의 몫은 충분했다.

오늘 아침에는 스기엔이 좋아하는 사과가 나왔고, 점심에는 푸딩이, 저녁에는 포도가 나왔다.

당연히 나는 전부 조금씩 챙겼고, 스기엔은 볼이 빵빵해지도록 먹었다.

“이건 고위 마족인 내가 하찮은 인간들을 도와준 대가로 공물을 받는 거지.”

아주 당당하게 스기엔은 말했다. 언제부터 고위 마족 님이 푸딩을 공물로 받았는지 모르겠네.

“테오도르가 엄청나게 피곤해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이런 맛있는 건 하나도 안 나오고 식사로는 수프만 나올걸?”

“…….”

“네가 종이 씹는 맛이 난다고 한 오트밀 수프나 건더기는 거의 없는 멀건 토마토수프나 비린내가 나는 오이 수프 같은 것만 나올지도 몰라.”

오이 수프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스기엔이 싫어하는 재료들이 들어가는 수프를 늘어놓았다.

진짜로 테오도르가 쓰러진다면 소고기가 흐물흐물할 정도로 푹 끓인 수프나 몸에 좋다는 해산물을 잘게 다져 넣은 맛있는 수프를 주방장님이 지극정성으로 맛있게 끓일 것 같지만, 스기엔은 아직 인간들의 세상 물정은 모르니까 말이다.

“자세하게 말해봐. 그 인간, 어디가 어떻게 아프지?”

역시나 스기엔은 갑자기 진지한 태도로 내 고민에 임했다.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데, 너무 바쁘고, 피곤해 보여.”

“좋아. 일을 줄이고, 푹 쉬도록 해.”

스기엔의 진단은 아주 단순명료하면서도, 확실했다. 문제는 모두가 그걸 알지만, 실천을 할 수 없는 방법이라는 것에 있었다.

“막 대공이 된 터라 일을 줄일 수가 없어.”

“그렇다면, 제한된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푹 쉬도록 네가 도와줘.”

“어떻게?”

“엄청나게 피곤하게 만들어야지.”

“피곤하게?”

나는 테오도르를 어떻게 피곤하게 만들어야 하냐는 뜻을 담아서 되물었다.

그러자 스기엔은 슬라임이 아니라 음란한 인큐버스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암컷이 수컷을 어떻게 피곤하게 만들겠어?”

“어, 어어?”

나는 당황해서 얼굴을 뒤로 뻗대며 이상한 소리를 내버렸다.

“아, 그 방법은 이미 하고 있는데도 네 체력보다 그놈의 정력이 넘쳐서 도무지 피곤해하질 않는 거야? 그렇게 튼튼한 녀석으로는 보이지 않던데, 보기와는 다른 모양이야? 아주 좋으~시겠어.”

그렇게 말하며, 스기엔은 또 음흉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안 하고 있어!”

“응? 안 하고 있어?”

“그래. 안 해!”

“왜?”

스기엔은 참으로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너희 둘은 서로 좋아하는 암컷과 수컷이잖아? 왜 안 하고 있는데?”

“…….”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테오도르와의 잠자리를 피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를 속이고 있다고는…….

* * *

마음이 무거웠다. 나도 처음부터 테오도르를 속이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이라도 가지게 되면…….”

나는 손을 내 배에 가져다 대었다. 판판했다. 불러올 조짐 따위는 없었다.

지난번 월경 이후, 테오도르랑 몸을 겹친 적이 없으니 당연히 임신했을 리 없었다.

사실, 처음에 근육통이 심하긴 했지만,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월경은…… 거짓말이었다.

“하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째서 문제를 하나 해치우면, 다른 문제가 생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스텔라 언니는 내게 귀족인 테오도르의 아이라도 가지면 어쩔 거냐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언니가 카르오 가문의 비밀을 모르니 하는 말이었다.

내가 테오도르의 아이를 가진다면, 그 아이는 카르오의 핏줄이고, 광증을 가진 채 태어날 운명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분홍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고, 테오도르를 진정시킬 수 있었으니, 그 아이의 광증 역시 내가 돌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게 무슨 일이 생겨서 그 아이의 광증 시기에 옆에 있어 줄 수 없다면?

혹은, 아주 기적적으로 내 피를 반은 타고 난 아이이니, 애초에 분홍 머리 여자의 체액을 가진 채 태어난 셈이라 아이는 광증이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혹시 그 아이는 광증이 없이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가 낳은 아이는? 분홍 머리 마녀의 피가 1/4밖에 없을 내 손자는 과연 괜찮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도저히 테오도르와 관계를 할 수 없었다.

테오도르가 나를 원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테오도르를 원했다.

하지만 혹시나 임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할 수 없었다.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됐어. 그만 고민하자. 이러다가 분홍 머리가 흰머리가 되겠네. 이럴 시간에 클레어나 보러 갈까?”

오늘부터 클레어도 별채가 아니라 본채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었다.

내 유일한 친구가 클레어임을 아는 오르디의 배려였다. 어쩌면 인스트나 테오도르의 배려일 수도 있었고.

“이거 선물로 줘야지!”

나는 이전에 클레어를 속인 것이 미안해서 산 선물을 챙겼다.

그때는 카오르 대공, 그러니까 전 카오르 대공을 속이고 훈련 시간도 늘리기 위해서 테오도르와 싸운 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지난번에 모은 돈은 전부 언니에게 빌려준다고 쓰고, 그냥 줬다고 읽을 용도로 써버렸지만, 나에게는 또 받은 월급이 있었다.

역시 직장인에게는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이 최고였다.

“지금쯤 왔을까? 짐이 별로 없어서 오후에는 올 거라고 했는데.”

나는 중얼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오르디의 말로는 클레어의 방을 바로 내 옆방으로 배정할 거라고 했다.

솔직히 거의 테오도르의 방에서 지내느라 이 방에서 지내는 일은 별로 없지만.

선물 상자를 들고, 옆방 앞에 섰다. 늘 내 노란 리본이 예쁘다고 말해주고, 부럽다는 듯이 쳐다봤던 클레어를 위해서 산 리본이었다.

‘마음에 들어 하면 좋겠는데.’

혹시 안에 있나 싶어서 문에 노크하려는 순간이었다.

“……친구라며?”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손을 멈췄다. 클레어의 목소리는 이렇게 앙칼지지 않았다.

겁이 많고 소심하지만 명랑한 클레어의 목소리는 이것보다 귀여웠다. 거기다가 이렇게 삐딱한 말투로 말하지도 않았다.

나는 방을 잘못 찾은 것인가 싶어서 손을 내렸다.

하지만 내 방은 제일 이쪽 복도의 고용인들 방에서는 제일 좋은 가장 안쪽 방이었고, 내 옆방이라고는 이방밖에 없었다.

“여기가 맞는데?”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다시 방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방문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너도 테오도르 님의 눈에 들고 싶어서 이렇게 짐을 싸 들고 본채로 온 거야? 창녀 같은 네 친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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